55화
“어디 보자... 이 정도면 토너먼트 진출은 거의 확정이고, 조 1위냐 2위냐가 문제겠네.”
메나예 돈코르 씨랑 꼭 껴안은 채 추첨식을 지켜본 문타리가 챔피언스리그 32강 대진 결과에 대해 내린 평가였다.
프랑스 리그 1 준우승팀인 마르세유, 스위스 슈퍼 리그 챔피언인 취리히.
그리고 스페인 라리가에서 2위를 차지한 레알 마드리드가 우리의 경쟁자들로 결정되었다.
레알이라.
지난 시즌에는 16강 토너먼트에서 자웅을 겨뤘었는데.
이번에는 보다 일찍 만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레알의 스쿼드에는 거의 상전벽해 수준의 변화가 있었다.
숙명의 라이벌인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지켜보며 심사가 뒤틀린 레알 팬들은, ‘갈락티코스’의 전격 부활을 선언한 플로렌티노 페레즈를 차기 회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페레즈는 자신의 약속을 확실히 지켰다.
이적시장에서 무지막지하게 돈을 풀어대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카, 카림 벤제마, 사비 알론소 등을 영입, 초호화 라인업을 구성했다.
물론 더하기가 있으면 빼기도 있는 법.
파비오 칸나바로, 하비에르 사비올라, 가브리엘 에인세, 아르연 로벤 등은 마드리드를 떠나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팀에 합류한 웨슬리 스네이더도 그 당사자 중 한 명.
“좋군.”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답게 감정 표현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옛 소속팀을 상대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는 느낌이 확 전해졌다.
“자, 챔스는 챔스고. 일단은 다가올 밀라노 더비에 집중하자고.”
사네티 주장의 분위기 정리.
밀라노의 진정한 주인을 가리는 시즌 첫 경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 *
“백강, 저 굳은 표정 좀 봐.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2009년 8월 29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경기를 준비하는 레오나르도 감독의 모습을 보고 왈테르 사무엘 형님이 한마디 했다.
“그럴 만도 하죠. 거의 그로기 상태로 두들겨 맞았으니까요. 딴 건 몰라도 ‘그릇’ 이야기는 진짜 자존심 상했을 것 같던데요.”
양 팀 지휘관의 뜨거웠던 설전 때문일까.
관중석을 메운 피켓 중 감독들에 대한 문구가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 오만방자한 무리뉴, 엉엉 울며 돌아가다!
- 초짜 감독 레오나르도가 오줌을 지렸다지?
어우, 유치해.
그래도 이런 요소가 축구 보는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자신의 그릇을 증명해야 하는 레오나르도 감독은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3톱 구성원은 마르코 보리엘로, 호나우지뉴, 알레산드로 파투.
지난 시즌과 비교하면 카카가 보리엘로로 바뀐 셈인데, 그거 하나만으로도 공격진의 무게감이 확 떨어져 보인다.
이에 맞서는 우리 팀은 4-3-1-2 전형.
프리시즌 동안 여러 실험을 거친 끝에 내린 무리뉴 감독의 결론이다.
나와 사무엘 에투가 최전방에 서고, 스네이더가 플레이 메이킹을 하는 시스템.
“오우, 시발. 분위기 장난 아닌데? 좋아좋아! 꼭 엘클라시코 뛰는 기분이야.”
에투는 더비 특유의 열기를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발롱도르 유력 후보’다운 담대함.
“경기 전에 있었던 설전 때문에 평소보다도 더 흥분하기 쉬운 경기입니다. 양 팀 주장분들께서 잘 인지시켜주시고, 좋은 게임 할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재수 없게도(?) 오늘 경기 주심을 맡게 된 니콜라 리촐리 심판이 사네티 주장과 젠나로 가투소를 불러서 신신당부를 했다.
글쎄요, 말로 해서 들을지.
카드나 제때제때 꺼내주시죠.
7만 8천여 관중이 이를 갈며 지켜보는 가운데 밀라노 더비의 막이 올랐다.
“왼쪽! 조금만 더 전진해요! 오케이! 지금 라인 딱 좋아요!”
오늘 밀란에서 리빙 레전드 알레산드로 네스타와 합을 맞추는 센터백은 치아구 시우바.
향후 월드클래스로 성장하게 되는 시우바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검증이 필요한 젊은 수비수에 불과했다.
밀라노 더비 출전도 이번이 처음.
안됐구나, 시우바야.
첫 경험인데 하필 나를 만나다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심어줄게.
삑-----
무슨 코미디 영화도 아니고.
아까 리촐리 주심의 설교를 직접 들었던 가투소가 경기 시작 5분 만에 옐로카드를 받았다.
침투하는 에투에게 패스를 넣어주려던 스네이더의 발목을 노리고 시원하게 양발 태클을 시전한 것이다.
“이건 레드지! 심판! 제대로 본 거 맞아요? 완전 고의로 들어왔는데?”
거의 골 넣을 때만큼이나 빠른 스피드로 달려간 에투가 리촐리 주심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괜찮아.”
다행히 자기 발로 일어나긴 했지만 통증이 좀 있는지 얼굴을 찡그리는 스네이더.
“다시 한 번 얘기합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경기에 임해주세요.”
두 번이나 얘기했으니 다음부턴 얄짤없겠군.
리촐리는 굉장히 보수적인 인물.
특히 심판의 권위를 엄청나게 중시하는 편이다.
세리에 A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가투소도 이를 모르진 않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네이더를 건드린 건 일종의 멘탈 공격이 아닐까 싶다.
체구는 작지만 심지가 굳은 스네이더에게 그게 먹힐진 모르겠지만.
우--- 우--- 우-----
양 팀 팬들의 야유가 쏟아지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가 재개되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프리킥을 준비하는 스네이더.
골문과의 거리는 약 35m.
직접 슈팅을 노리기엔 먼 거리다.
내게는 언제나처럼 두 명의 마크맨이 붙었다.
햄버거 빵처럼 앞뒤로 나를 둘러싼 시우바와 보리엘로.
니들도 참 고생이 많다.
“더! 더!! 더!!!”
자꾸 앞으로 빠져나오려는 밀란의 수비벽을 제어하느라 리촐리 주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극한직업이 따로 없네 진짜.
겨우겨우 정돈을 마친 후 수신호를 보내는 주심.
천천히 도움닫기하던 스네이더가 이를 악물며 공에 오른발을 갖다 댔다.
“슈팅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네스타가 다급히 소리쳤다.
뻐어어엉-----
거리가 거리인지라 모두가 패스를 예상했지만, 스네이더는 골문을 직접 노렸다.
이야, 궤적 보소.
수비벽을 가볍게 넘긴 공은 우아하게 춤을 추며 계속 날아갔다.
같은 선수 입장에서도 감탄사가 절로 터지는 무회전 프리킥.
공을 이렇게 찰 수 있는 선수가 전 세계에 과연 몇이나 될까?
처얼썩---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면서 골문 앞에 도달한 공은 디다 골키퍼의 손바닥에 닿기 직전 뚝 떨어지며 멋지게 그물을 갈랐다.
완벽 그 자체.
이건 디다가 아니라 디다 할아버지가 와도 못 막을 슈팅이었다.
우오오오오!!!!!
이른 시간 터진 선제골에 광분하는 네라주리의 추종자들.
벤치에서는 무리뉴 감독이 두 팔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저건 레오나르도 감독 보라고 하는 짓이 분명해.
무리뉴, 이 잔인한 사람...
“푸헤헤, 등신 같은 파울 하더니 꼴좋다.”
에투의 목소리는 무지막지하게 커서 가투소도 분명 들었을 거다.
이거, 아무래도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불겠구먼...
부디 몸조심하자 백강아.
* * *
작정하고 들어간 가투소의 거친 파울은 결과적으로 대실패였다.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그렇지만, 분노 버프(?)를 제대로 받은 스네이더가 이후에 보여주는 플레이의 수준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웨슬리 중에 오늘이 최고인 것 같은데? 시발 존나 잘하네?”
라리가에서부터 스네이더를 봐온 에투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망설임 없이 전후좌우로 쫙쫙 뿌려주는 패스는 접착제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받는 동료의 발에 쩍쩍 붙었다.
평소 약점으로 지적되던 탈압박과 세밀한 컨트롤도 오늘만큼은 만점.
‘원조 미친개’ 가투소와 ‘신흥 미친개’ 마티유 플라미니, 안드레아 피를로 등 만만찮은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압박해 왔지만 스네이더의 공을 쉽사리 빼앗지 못했다.
“아니, 백업 좀 빨리 오라고!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대체 스네이더한테 몇 명이 붙어?”
결국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고야 마는 잔루카 잠브로타.
미드필더진이 스네이더한테 온통 어그로를 끌리는 사이, 오른쪽 측면 수비를 거의 혼자 하고 있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저기... 레오나르도 감독님.
죄송하지만 언론 플레이 같은 거 하기 전에 팀 내부 단속부터 좀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분의 조짐이 막 보이는데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 했던가.
경기는 일방적인 우리의 페이스로 흘러갔다.
“압박! 압박! 적극적으로 해!”
레오나르도 감독이 쉬지 않고 팔을 휘두르며 선수들을 독려했지만 어쩐지 공허해 보였다.
하긴.
8년이라는 기간 동안 두 개의 빅 이어를 선물한 명장 카를로 안첼로티의 후임 자리를, 다른 감독 경력이 전무한 레오나르도가 맡게 됐으니.
선수단 장악이 잘 될 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0-0 상황일 때는 의욕을 보였던 밀란 녀석들이었지만 허무하게 선제골을 허용한 이후에는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움직임으로 일관했다.
이런 흐름이라면...
그래, 딱 한 골만 더 넣으면 알아서 무너질 것 같다.
그럼 슬슬 움직여보실까?
“나한테 줘!”
시우바를 등진 상태에서 손을 번쩍 들며 콜을 하자 마침 공을 잡고 있던 마이콘이 즉각 반응했다.
브라질 대표팀 선배인 호나우지뉴의 수비를 호쾌한 드리블로 뚫어내며 전방으로 롱 킥.
실전에서나 훈련에서나 수도 없이 맞춰봤던 합을 과시하듯, 볼은 내 이마에 정확하게 안겼다.
토옥---
스네이더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여 마침맞게 공을 떨궈준 나는, 착지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페널티박스 안으로 질주했다.
아직 여물지 못한 ‘미완(未完)의 대기(大器)’ 시우바는 나를 따라가야 할지 스네이더에게 붙어야 할지 순간적으로 갈팡질팡.
큰 무대에서의 경험 부족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스네이더는 최고조.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절묘한 스루패스를 넣어주었다.
이 패스 한 방으로 오프사이드 트랩 완전 붕괴.
“마이 볼! 마이 볼!”
삽시간에 벌어진 1:1 상황.
아직 정신줄을 잡고 있는 디다 골키퍼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을 덮치기 위해 뛰쳐나왔다.
어서 오세요, 디다 씨.
저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에투 잡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피를로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너무 늦었다.
욕심내지 않고 툭 밀어준 땅볼 패스가 골 냄새를 맡고 잔뜩 흥분한 에투의 오른발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디다가 자리를 비운 골문은 텅 비어 있었고.
애타게 경기를 지켜보던 레오나르도 감독에게 절망을 안기는 두 번째 골.
에투가 환호하는 팬들에게 달려가 화려한 구강(?) 세리머니를 펼쳤다.
“내가 누구?”
“사무엘 에투!”
“오늘의 주인공은 누구?”
“사무엘 에투!”
“세계 최고의 팀은 어디?”
“인테르! 오직 인테르!”
“시발! 존나 쩔어!”
“우와아아아악!!!”
저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조련 실력이 무슨 아이돌 가수급이다.
“쉬운 골 넣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꼭 농담만은 아닌 나의 농담에 에투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다음번엔 골을 양보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나한테 발롱도르 뺏길지도 몰라.”
“어이구, 무서워 죽겠네. 할 수 있으면 해보쇼.”
“크크크큭. 나이스 패스! 백강!”
이번 시즌 인테르를 이끌어갈 투톱의 거친 하이파이브에, 관중들의 함성 데시벨이 한층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