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56화 (57/176)

56화

웨슬리 스네이더와 사무엘 에투의 골로 전반전을 2-0으로 끝낸 우리 팀은 후반전에 더욱 날카로운 공격력을 과시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우리 팀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인 ‘마이콘 크로스-정백강 헤더’가 작렬하며 3-0.

세 골 차까지 벌어지면서 사실상 승부가 결정되었다.

“어우, 존나 재미없어. 너무 시시하잖아?”

딱히 도발의 의도가 담기진 않았던 에투의 또라이 같은 발언은, 안 그래도 뿔이 잔뜩 나 있던 젠나로 가투소를 자극했다.

“뭐 이 새끼야? 다시 말해 봐!”

참지 못하고 에투를 밀치는 장면이 하필이면 니콜라 리촐리 주심에게 딱 걸려 버렸다.

두 번째 옐로카드로 퇴장.

주장인 마시모 암브로시니가 주전으로 못 나오는 바람에 대신 완장을 찼던 가투소였는데 주장의 소임을 다하긴커녕 경기를 말아먹어 버렸다.

0-3으로 뒤지는 상황에서 10명이 싸우게 된 밀란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골을 더 먹히는 것밖엔 없었다.

우-----

이 시점부터 밀란 팬들이 야유를 보내면서 하나둘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레오나르도 감독은 벤치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생애 첫 밀라노 더비에서 무더기로 실점하며 멘탈이 완전히 나간 치아구 시우바는 나를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대승을 자축하는 ‘툭탁뻥’ 한 방으로 네 번째 골.

에투의 5번째 골은 헤더로 어시스트했다.

삑- 삑- 삑-----

리촐리 주심의 휘슬과 함께 일방적이었던 밀라노 더비가 끝났다.

창피해서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만 싶을 레오나르도 감독은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며 무리뉴 감독과 악수를 나눴다.

“오늘은 이렇게 됐지만 밀란은 여전히 저력 있는 팀이다. 다음 승부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경기 전에는 그리도 날이 서 있던 무리뉴 감독은, 이기고 나자 마음이 푸근해졌는지 밀란을 띄워주는 인터뷰를 했다.

어째 이게 더 멕이는 것 같은 느낌은 들었지만.

* * *

2골 2어시스트로 밀라노 더비 완승을 이끈 나는 쉴 틈도 없이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을 대비한 평가전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만날 상대는 호주.

호주가 초특급 축구 강국은 아니었지만, 이 대결은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감독 때문이었다.

허종무 감독 부임 전 한국 대표팀을 이끌던 핌 베어벡 감독이 호주의 사령탑을 맡아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된 것.

감독 교체 때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론 양국 모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으니 ‘윈윈’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열릴 모든 경기는 월드컵을 위한 전초전이라고 생각해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선수들 중 몇 명은 남아공에 가지 못한다는 것도 기억하고.”

“네! 감독님!”

허종무 감독은 오히려 월드컵 예선 때보다도 더 무게를 잡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며 하늘을 찌르게 된 팬들의 기대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의 실패로 바닥에 떨어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막상 월드컵 시즌이 다가오자, 또 16강이니 8강이니 하는 이야기가 스멀스멀 부활.

그 이유야 뭐...

“백강아, 너 때문이잖어! 대체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염기헌 선배가 웃으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일침을 가해 왔다.

“하하하...”

그저 웃지요.

그렇다. 바로 내가 문제긴 하다.

명색이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있는 팀인데 32강에서 톡 떨어지면 좀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물론 축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백강이 덕분에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박지승 선배가 특유의 ‘살인 눈웃음’으로 내 심장을 어택해 왔다.

내가 혜성처럼 등장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 대표팀의 절대적인 에이스로 활약해 왔던 지승 선배.

영광도 많았지만 그만큼 욕도 많이 먹었던 지난 몇 년.

내색을 잘 안해서 그렇지 지승 선배가 받았을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으리라.

저도 선배가 있어서 든든해요.

이번 월드컵에서 같이 역사를 써봅시다!

* * *

2009년 9월 5일, 서울월드컵경기장.

호주와의 경기를 보기 위해 5만 명이 넘는 인파가 상암벌에 몰려들었다.

- Welcome Back, Veerbeek!

베에벡 감독의 금의환향(?)을 환영하는 훈훈한 현수막도 관중석 여기저기에 보였다.

“백강!”

“감독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네가 이렇게 세계적인 선수가 될 줄도 전혀 몰랐지.”

“따지고 보면 다 감독님 덕분이죠.”

“하하, 무슨 그런 말을.”

시계를 돌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당시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던 베어벡 감독은 특이하게도 U-23 대표팀까지 함께 담당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아시안게임도 베어벡 감독의 몫.

나는 바로 이 대회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고, 덕분에 잉글랜드 진출까지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 팀은 조별리그부터 결승전까지 6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한 골도 실점하지 않으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쉽게 우승한 걸로 보이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천운(天運)이 따른 결과였다.

8강전, 준결승전, 결승전까지 죄다 승부차기로 이겼으니 말이다.

즉, 토너먼트에서는 모든 경기가 0-0이었던 셈.

결국 나름대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경기력에 대한 비난은 피할 수 없었고, 베어벡 감독은 여론에 밀려 사의를 표하게 되었다.

“어쨌든 오늘 좋은 경기 하자고, 백강. 우리 수비수들에게 훌륭한 공부가 될 거야. 자네 같은 선수를 막게 되어서 말이지.”

지당하신 말씀.

이런 기회가 흔히 있진 않죠.

자비는 없을 겁니다.

저도 오늘 꼭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거든요.

“이야... 애들 떡대 봐라. 프로필 맞는 거야?”

킥오프를 준비하는 이건호 선배가 호주 대표팀 선수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 월드컵 예선부터 아시아 지역에 묶여 참가하게 된 호주는, 예상보다 훨씬 강한 전력을 과시하며 최종예선 8경기를 6승 2무, 무패로 통과했다.

호주의 선전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 이유가 있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방금 건호 선배가 지적한 피지컬.

몸통 두께 자체가 확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역시 인종 차이...

나야 유럽에서 닳고 닳은(?) 몸이니 괜찮지만, 동료들 중 몇몇은 고생깨나 하겠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홈팬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우리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뻐엉-----

4-4-2 포메이션의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한 기성영이 공을 받자마자 왼쪽 측면으로 장거리 로빙 패스를 시도했다.

미리 훈련했던 기습 패턴.

패스가 약간 긴가 싶었지만, 박지승 선배가 놀라운 스피드로 공을 살려냈다.

그대로 거침없는 질주.

이렇게 무식한 돌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호주 수비진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회를 놓칠 지승 선배가 아니지.

우오오---

관중석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오늘 컨디션이 상당히 좋은지, 오른쪽 풀백 마크 밀리건의 거친 슬라이딩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는 지승 선배.

“백강아!”

페널티박스 안쪽 상황을 확인한 선배가 한 번 접더니 오른발로 크로스를 날렸다.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콰아앙-----

압도적인 타점에서 내려찍은 헤더슛이 그물을 찢을 기세로 꽂혔다.

EPL 팀 풀럼의 당당한 주전 골키퍼인 마크 슈워처가 손 한 번 뻗어보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슈팅.

“선배님! 크로스 죽였어요!”

인테르와 맨유에서 뛰는 국대의 두 기둥이 합작한 선제골.

지승 선배와 어깨동무를 한 채 팬들 앞에서 손을 번쩍 올렸다.

이게 빅클럽의 위엄이다, 이 말이야.

* * *

“아직 시간 많아! 느긋하게 하자!”

오늘 주장 완장을 차고 나선 미드필더 마크 브레시아노가 이른 실점에 당황한 동료들을 다잡았다.

호주의 모든 공격 작업은 이 남자의 발끝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낙 빠른 시간대에 골이 나와서 은근히 대량 득점도 기대했지만, 브레시아노의 지휘 아래 호주가 경기 템포를 뚝 떨어뜨리면서 다소 김이 샜다.

역시 노련하다니까...

“마크는 제가 마크할게요!”

라임 좋았다.

점유율 끌어올리기를 시도하는 팀을 상대할 땐 볼 순환의 핵심을 끊어주는 게 제맛.

“백강, 친선경긴데 이러기야?”

그림자처럼 들러붙는 나 때문에 짜증이 났는지, 브레시아노가 푸념했다.

세리에 A 팔레르모 소속인지라 나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

“모든 게임에 최선을 다하자는 주의거든.”

브레시아노의 발이 묶이자, 지공이 어려워진 호주는 곧바로 플랜 B를 가동했다.

장신 스트라이커 조쉬 케네디의 머리를 이용한 롱 볼 플레이가 그것.

현재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에서 뛰는 케네디의 신장은 무려 194cm에 달했다.

피지컬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 축구에 대한 이해도까지 갖춘 셈.

우리 수비진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세컨드 볼 주면 안돼! 주변 사람 잡아!”

우리 골키퍼 이원재 선배가 쩌렁쩌렁한 목청을 과시하며 소리쳤다.

정백강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단조롭게 날아오는 공중볼을 직접 골문에 타격하는 건 어렵다.

그보다 무서운 건 머리에 맞춘 이후의 상황.

대처를 잘못하면 치명적인 기회를 상대에게 헌납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케네디와 함께 전형적인 ‘빅 앤 스몰’ 투톱을 구성하고 있는 스콧 맥도널드가 질풍처럼 달려들며 헤더로 떨궈준 볼을 낚아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맥도널드.

툭---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센터백 조용헌을 농락하는 완벽한 알까기.

이종수가 파트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황급히 커버를 들어갔지만 늦었다.

맥도날드가 먼 쪽 포스트를 보고 감아 찬 슈팅이 절묘하게 휘어져 들어갔다.

파아앙-----

“야! 이 자식들아!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집중하란 말이야! 집중!”

노익장을 과시하며 멋지게 몸을 날려 공을 쳐 낸 원재 선배가 일어나자마자 불뚝 화를 냈다.

세컨드 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자마자 위기를 맞았으니 열이 날 만도 했다.

“이번에 지켜볼 거야! 사람 제대로 잡아!”

결정적인 찬스를 놓쳤지만 흐름은 아직 호주 쪽에 있었다.

코너킥 같은 세트피스는 호주가 피지컬의 우위를 살리기 아주 좋은 상황.

방심은 금물이었다.

나의 찰거머리 같은 압박에서 간만에 벗어난 브레시아노가 코너킥을 준비.

경계대상 1순위인 케네디는 먼 포스트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마크는 당연히 나의 몫.

야, 케네디.

네가 그렇게 헤더를 잘해?

나도 한 머리 하는데 한 판 붙어보자.

철썩---

“아, 진짜! 사람 잡으라고 했잖아!”

원재 선배의 절규.

케네디는 애초에 나를 떼 놓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짧게 올려 찬 브레시아노의 코너킥은 리즈 유나이티드 소속의 수비수 패트릭 키스노보의 이마에 제대로 얹혔다.

아까 슈워처가 그랬던 것처럼 손 한 번 뻗어보지 못하고 당한 원재 선배.

이것 참, 쉽지 않네.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하는데 말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