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57화 (58/176)

57화

“까놓고 말해서 얘네가 아시아에서 뛰는 건 반칙 아니냐?”

“그러니까요. 무슨 힘이... 어우...”

“사람이 아니라 돌덩이랑 부딪치는 것 같아요.”

전반 종료 후 하프타임.

호주 선수들의 압도적인 피지컬에 대한 간증이 이어졌다.

“우는 소리 좀 그만들 해. 어차피 월드컵 본선 가면 다 이런 애들이니까. 너네가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국대랑 붙어봤어? 안 붙어봤으면 말을 말어.”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해 버리는 이원재 선배.

환상적인 선방을 하고도 이어지는 세트피스에서 실점한 것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원재 말이 맞다. 불평하기보단 어떻게 이겨낼지에 대해 고민해야지.”

허종무 감독이 원재 선배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후반전에도 공격은 심플하게 가자. 어차피 상대도 지금 백강이 높이에 대응이 전혀 안 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결과다. 어떻게든 득점만 하면 된다.”

“네, 감독님!”

인테르와 비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우리 대표팀의 구성과 스타일을 보면 내가 미쳐 날뛰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잘게 썰어가기보다는, 강력한 측면을 활용한 빠른 역습이 주무기니까.

전반적인 점유율이나 경기력에서 좀 밀리더라도 언제든지 골을 터뜨릴 수 있는 실리축구.

그게 바로 허종무 감독이 구상하는 월드컵 본선에서의 모습이다.

우리 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한 32개 팀 중 하위권의 전력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좋은 전략으로 보인다.

“백강아.”

“네, 감독님”

“딱 70분까지만 뛰자.”

“알겠습니다.”

시즌 중에 핵심 선수를 국대로 보내는 구단이 흔히 그렇듯, 인테르에서도 내 출전 시간을 두고 풀타임은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앞으로 25분이라.

그 정도면 참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지.

그럼 나가보실까?

* * *

후반전 들어서도 호주가 게임을 풀어가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중원을 쿨하게 생략한 채 조쉬 케네디에게 다이렉트로 연결하며 노골적으로 힘싸움을 걸어갔다.

185cm의 이종수도 어디서 피지컬로 꿀리는 선수는 아니건만, 케네디의 높이는 너무나도 위력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원재 선배의 호통 덕분인지 세컨드 볼 찬스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

후반전에 기성영 대신 투입된 김정운 선배가 헌신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며 촘촘한 협력수비로 호주의 예봉을 꺾었다.

경기는 잠시 소강상태.

전반적으로는 호주가 경기를 주도했으나, 우리의 역습이 부담스러운지 적극적으로 올라오진 못했다.

무승부도 상관없다는 듯한 움직임.

음... 그건 좀 곤란한데.

답답하면 내가 뛰어야지 뭐.

“저한테 띄워주세요!”

최전방에 전봇대처럼 박혀 있어 봐야 패스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

이러면 내가 내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 수비진에서의 1차 빌드업을 담당하고 있는 조용헌 선배가 나의 위치 변화를 인지하고는 공을 높게 띄워서 전달했다.

문득 떠오르는 포츠머스 시절의 기억.

해리 레드냅 감독이 나를 스트라이커로 기용하기 전에, 먼저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테스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주요 역할은 좌우 측면으로 적절하게 볼을 배분해주는 것.

어디 보자...

이번에는 오른쪽을 봐줄까?

“창용아!”

우리 대표팀의 귀요미 막내인 이창용이 쇄도하는 타이밍에 맞춰 살짝 스핀을 건 헤더 패스를 찔러 주었다.

이렇게 머리로 하는 스루패스의 장점은?

수비가 미리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

“나이스 패스!”

수비를 따돌린 창용이의 발에 공이 착 붙었다.

애가 좀 비쩍 말라서 그렇지 기술만 따지고 보면 국대에서도 손꼽힐 수준.

훌륭한 퍼스트 터치 덕분에 준비 동작 없이 바로 가속을 붙일 수 있었다.

뻥 뚫린 공간으로 성큼성큼 전진하는 창용.

마음이 급해진 상대 풀백 셰인 스테파누토가 창용이의 유니폼을 잡아 끌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럽다.

“창용아, 괜찮니?”

“어우,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더니 팽 도네요.”

내가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나는데 무게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프로필엔 70kg라고 되어 있던데 어째 더 가벼운 것 같다.

설마 불려서 적은 거야?

창용아, 잘 먹고 살 좀 찌자꾸나.

그래야 이 형처럼 훌륭한 선수가 되지.

우--- 우--- 우---

비신사적인 파울에 대해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말레이시아 출신의 숩키딘 모드 살레 주심이 엄숙한 표정으로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잘만 하면 끌려가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세트피스 기회.

프리킥 키커로는 박지승 선배와 교체된 염기헌 선배가 나섰다.

“한 방 보여주시죠, 마법사님.”

“이게 선배를 놀려?”

“놀리다뇨. 정말 기대 중인데요.”

“백강아, 개떡같이 올려도 찰떡같이 넣어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헌 선배의 별명은 ‘왼발의 마법사’.

킥력이 뛰어난 선수들에게 흔히 붙여지는 별칭이고, 물론 안 풀리는 날에는 ‘왼발의 맙소사’로 불리곤 한다.

오늘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내게는 케네디와 마크 밀리건이 더블팀을 붙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집중 견제.

어라? 근데 얘네들 수비가 좀...

뻐엉-----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기헌 선배의 멋들어진 프리킥이 문전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니! 이거 뭐야?”

경악에 찬 케네디의 목소리.

이미 늦었어, 임마.

케네디와 밀리건 사이에서 우뚝 솟아오른 나의 머리에 공이 정확하게 임팩트되었다.

터엉! 철썩---

오른쪽 골포스트 안쪽을 강타한 공이 그대로 그물을 흔들었다.

베어벡 감독님, 아무래도 분석이 좀 부족하셨던 것 같습니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나에 대한 수비의 기본은 앞뒤로 찰싹 붙어서 아예 점프할 엄두를 못 내게 하는 것.

그런데 방금 호주 2인방의 마크는 너무나도 느슨했다.

일단 공중에 뜰 수만 있으면 수비가 둘이든 셋이든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높이로 압도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 미친놈아! 도대체 몇 미터를 뛰는 거냐. 그게 머리에 닿아?”

건호 선배는 어시스트를 하고도 얼떨떨한 듯 애정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선배님 프리킥이 너무 기막혀서 그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높이, 저한테 딱 적당하던데요.”

“오냐, 다음번에도 그 높이로 뿌려줄게.”

우리 막내 창용아, 보고 있니?

사회생활이란 이렇게 하는 거란다.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와중에 시계를 흘끗 보니 6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교체 직전에 터뜨린 두 번째 골.

이것이야말로 ‘절대 타이밍’.

역시 25분이면 충분하다니까.

* * *

“2골을 넣으며 오늘 경기 MVP로 선정된 정백강 선수를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표정 관리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온다.

“피지컬로 유명한 호주인데, 두 골 모두 헤더로 넣으셨어요. 보는 입장에선 정말 시원스러웠는데요. 실제로 상대해 보니 어떠셨나요?”

나완 달리 나연은 아주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칼 같은 딕션과 딱 적당한 정도의 미소.

역시 프로 방송인은 다르네.

그렇다.

오늘 반드시 승리해야 했던 이유는 경기 MVP 인터뷰어가 나연이기 때문이었다.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아시아 팀들과의 경기에서 몸싸움으로는 항상 이기고 들어갔었는데요. 호주는 확실히 다르더군요. 그래도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보니 금방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클럽에서 뛸 때보다 저에 대한 분석은 덜 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받았고요. 두 번째 골 같은 경우는 리그에서였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베어벡 감독님이 옛정을 생각해서 좀 봐주신 것 같기도 하네요. 하하하.”

질문보다 답변이 훨씬 긴 혜자 인터뷰.

명색이 남자친구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나연은 대본에 눈 한 번 두지 않고 내 얼굴만 바라보며 질문을 이어갔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최근 정백강 선수가 출전한 국가대표 경기에서 전승 기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걸 ‘정백광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턱 끝까지 올라온 ‘그럼요, 저 덕분이죠.’라는 대답을 속으로 삼켰다.

한국에서 언론에 노출될 때는 항상 ‘겸손’이 기본적인 덕목 아니겠는가.

“글쎄요.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허종무 효과’라고 해야 맞겠죠? 지금 대표팀에 개성 강한 선수들이 상당히 많은데요. 하나의 팀으로서 묶일 수 있었던 데는 감독님의 카리스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도 이 팀에서 나름대로의 장점을 살리며 해야 할 역할을 하는 거고요. 단지 제 역할이 골을 넣는 거다 보니까 좀 눈에 띄는 건 있습니다만... 하하하.”

허종무 감독의 세상 흐뭇한 미소가 머릿속에 짠하고 그려진다.

대체 이런 제자를 누가 싫어할 수 있으랴.

“오늘 고생 많았어. 너무 멋있었어.”

짧은 인터뷰가 끝나고 마이크가 꺼지자, 나연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도. 방송할 때 자기 너무 섹시해.”

“어머, 누가 듣겠어. 이따 봐.”

* * *

행복한 시간은 빨리도 지나가서,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밀라노였다.

이럴 땐 문타리가 정말 부럽구나...

애니웨이.

나의 밀라노 컴백 이후 공식적인 다음 일정은 파르마와의 리그 홈 경기였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그다음 경기에 쏠려 있었다.

[인테르 VS 레알 마드리드, 다시 만난 거인들의 한판 승부]

[무리뉴, “올해의 레알은 전혀 다른 팀... 경기 양상도 완전히 바뀔 것”]

[양 팀 주포 ‘정백강 VS 호날두’ 대결도 관심]

올림피크 리옹, CSKA 모스크바, 포르투, 레인저스 같은 훌륭한(?) 팀들과 겨룰 기회가 있었지만 축구의 신은 우리에게 레알을 점지해 주었었다.

정확히 말하면 첼시의 주장 존 테리가 뽑은 거긴 하지만...

나쁜 사람 같으니라구.

어쨌거나 두 팀의 명성만으로도 32강 최고의 매치업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는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느닷없이 혀를 놀리는 바람에 열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이번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물론 나다. 세계 최고의 클럽에 세계 최고의 선수가 왔으니 당연한 결과지.”

뭐 실력이야 워낙에 뛰어난 선수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발언.

그러나 같은 조에 전년도 득점왕인 내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일종의 도발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건수 잡은 기자들은 신이 나서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잔뜩 뽑아내기 시작했다.

[호날두, 정백강 저격? ‘이번 시즌 득점왕 내 것’]

[‘특급 골게터’ 정백강에게 도전 선언한 호날두]

호날두 팬들의 지분이 엄청난 한국의 축구 커뮤니티에서도 이 발언은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 날두라면 모르긴 함... 백강이도 작년처럼 한다는 보장이 음슴...

- 그래도 정백강이지 ㅋㅋㅋ 작년에 백강이 퍼포먼스 못 봄? 날두는 댈 게 아님

- 작년 날두는 팀에서 마음이 떠난 상태라 그럼

- 지랄하네 ㅋㅋ 프로의식 없는 거 팬이라는 새끼들이 인증해주는 수준 ㅋㅋㅋㅋ

- 다 좋은데 욕은 하지 말자 ㅡㅡ

- 네 다음 선비 ㅋㅋㅋㅋㅋ

- 근데 동기부여가 진짜 중요하긴 함 ㅇㅇ 자기 드림클럽 레알 갔으니 아마 날아다닐듯

- 동기부여는 정백강도 만만치 않지 ㅋㅋㅋ 올해야말로 챔스 먹고 싶을 텐데

- 좆밥 날두랑 좆밥 백강 가지고 싸우지 마라 ㅉㅉ 그냥 유일신 메시나 빨면 그만임

- 여기서 갑자기 메시가 왜 나오는데 미친 ㅋㅋㅋㅋㅋㅋ

- 다들 닥쳐! 유일한 신은 호돈신뿐임! 호멘...

워낙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호날두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은 끊임없이 나의 주위를 맴돌며 똑같이 한 방 먹여주길 기대했다.

때마침 파르마전에서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3-0 완승을 이끈 건 또 한 번의 ‘절대 타이밍’.

자연스럽게 기자들 앞에 설 기회가 생겼으니...

예상대로 이 질문도 나왔고 말이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챔피언스리그 개막전을 앞두고 당신을 의식한 듯한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 한국에선 겸손 그 자체였으니 이탈리아에선 와일드한 모습도 보여주도록 하자.

“지난 시즌 챔스에서 호날두가 넣은 골이... 4골인 걸로 알고 있다. 나는 15골로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새로 썼고. 이 정도면 대답은 충분히 된 것 같은데. 혹시 부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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