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나의 인터뷰 이후 장외 대결은 한층 거세졌다.
양 팀 감독인 무리뉴와 마누엘 폐예그리니가 참전하며 정백강이 최고다, 아니다 호날두가 짱이다 하며 제자 자랑에 열을 올렸다.
동료들도 마찬가지.
사무엘 에투, 마이콘, 사비 알론소, 카카 등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선수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힘을 보탰다.
흠... 사실 이런 평지풍파까진 원하지 않았었는데.
축구계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서, 앞으로의 언행을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그나저나 이 명단에 꼭 있어야 할 이름이 빠져 있네?
“문타리, 너는 왜 인터뷰 안 했어?”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문타리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당연히 했지... 근데...”
“근데?”
“그때 에투랑 같이 있었는데 에투 발언만 기사로 나갔어...”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 더러운 세상, 역시 유명해지고 볼 일이다.
애니웨이.
“곧 도착입니다.”
구단 직원의 안내에 창밖을 내다보니 구름이 잔뜩 긴 마드리드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별리그 1차전은 원정 경기.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우열을 가리게 된다.
“이렇게 분위기 험악할 땐 홈이 좋은데... 게다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라니...”
여리고 소중한 문타리가 칭얼대자 상남자 에투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발, 베르나베우가 별 거야? 걱정 붙들어 매라고. 내가 깔끔하게 이겨줄 테니.”
아닌 게 아니라 라리가에서 뛸 때 유독 레알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였던 에투다.
침까지 튀겨 가며 강변하는 에투의 얼굴을 보니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어린 시절 레알 소속이었지만 거의 못 뛰고,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맞았지만 쫓기듯 이적한 에투.
과연 그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두 클럽 중 어느 팀을 더 좋아할까?
“이봐, 에투.”
“왜?”
“레알과 바르셀로나. 어느 쪽이 더 좋아?”
“레알은 썩을 팀이고, 옛날 팀은 망할 팀이지 뭐. 결론은 둘 다 존나 싫어해.”
참으로 명료한 답변이다.
이렇게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 우리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활주로에 안착하고 있었다.
* * *
2009년 9월 16일.
많은 팬과 전문가들이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후보로 보고 있는 두 팀.
인테르와 레알, 레알과 인테르가 32강 1차전에서 만났다.
현재 폼은 양 팀 다 베스트.
한 경기를 더 치른 우리가 리그 3연승, 레알은 2연승을 거두며 쾌조의 시즌 스타트를 끊었다.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나와 호날두는 해당 경기들에서 모두 골을 기록하며 각각 머리와 발에 예열을 마친 상태.
물론 호날두도 머리 좀 쓸 줄 아는 선수고, 나의 발 역시 월클...까진 아니고 그냥저냥 쓸만하지만 말이다.
“또 만났군, 백강.”
경기 시작 전 몸을 풀고 있는데 라울 곤잘레스가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요.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지난번엔 신세 많이 졌지. 이곳이 그렇게 만만한 경기장이 아닌데 말이야.”
라울의 말을 듣자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2008-2009 챔스 16강 2차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그 경기에서 나는 환상적인 해트트릭을 기록했었다.
“정말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우리가 꽤 강해졌거든.”
“애석하게도 저도 더 성장했습니다. 아마 만만치 않을 겁니다. 재밌는 경기가 될 것 같네요.”
무리뉴 감독은 이번 시즌 메인 전술인 4-3-1-2 포메이션을 그대로 사용.
반면 폐예그리니 감독은 변화를 줬다.
이번 시즌 주전 스트라이커로 발돋움한 곤살로 이과인 대신 라울이 원톱 선발로 출전한 4-3-3 전형을 가동했다.
라울이 누군가.
비록 나이는 들었을지언정 원조 ‘챔스의 사나이’ 아니겠는가.
라울의 클래스 있는 한 방을 기대하는 페예그리니 감독이었다.
“후우... 후우...”
“긴장했어?”
“아냐.”
원체 조용한 스타일이라 눈에 잘 띄진 않았지만 웨슬리 스네이더의 오늘 활약도 매우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마지막 인사가 썩 좋진 못했던 친정팀을 상대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삑-----
참 많은 것들이 걸려 있는 빅매치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 * *
어우------
벌떡 일어났던 관중들이 탄식하며 주저앉았다.
레알 팬들을 설레게 만든 주인공은 호날두.
왼쪽 윙포워드로 나선 호날두는, 알론소가 대지를 가르며 전개해준 장거리 패스를 받은 후 마이콘을 상대로 1:1 승부를 걸어갔다.
각자의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 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수들의 맞대결.
오늘 경기 내내 충돌할 예정인 두 선수의 1라운드 결과는 호날두의 완승이었다.
측면을 파고들 것처럼 질주하다가 자신의 장기인 백숏으로 마이콘을 가볍게 떨쳐 냈다.
아무래도 민첩성이라는 부분에서는 호날두의 우위.
너무나도 빠른 방향 전환에 고전하는 모습이었다.
마이콘을 넘어선 호날두는 중앙으로 파고들며 크리스티안 키부의 태클까지 피했고, 그대로 중거리슛을 시도했다.
워낙 빠르고 강력한 슈팅이라 세자르 형님이 반응조차 하지 못했는데, 천만다행히도 공은 크로스바를 살짝 스치며 관중석으로 넘어갔다.
전반 5분 만에 터진 레알, 그리고 호날두의 선전포고였다.
“저 짜식이... 잘하긴 잘하네... 인정.”
일련의 상황을 지켜 본 에투가 머리를 긁적였다.
동감이야.
온더볼 상황에서 저렇게 폭발적인 움직임이라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플레이는 못 할 거다.
이미 한 번 죽었다 깨어난 건 함정이지만.
뻐엉---
용궁 갔다 돌아온 세자르 형님이 골킥을 길게 연결했다.
날두야, 너도 이런 플레이는 절대 못 할 거다.
헛다리? 백숏? 플립 플랩?
축구를 왜 그렇게 힘들게 하니?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단다.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솟구쳐 올라 공에 머리를 갖다 댔다.
목표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며 돌진하는 에투.
알고도 못 막는 이 공격 패턴에 수많은 팀들이 눈물을 쏟았다.
‘에투가 즐라탄보다 좋은 선수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기 어렵지만, ‘정백강과 더 잘 맞는 선수’인 것만은 분명했다.
에투의 발 앞에 톡 떨어지는 정밀한 헤더 패스.
단 두 번의 볼 터치에 슈팅 기회라니.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후랴앗!”
간만에 스페인에 돌아오자 힘이 불끈 솟는지, 경쾌한 기합성과 함께 오른발을 내뻗는 에투.
퍼억---
“파울! 심판! 파울이잖아요! 아니 이런 시발...”
강력한 슬라이딩 태클에 공을 놓치며 쓰러진 에투가 어필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창 기세 오른 에투의 앞을 막아선 건 포르투갈산(産) ‘미친개’ 페페.
성깔이 좀 더러워서 그렇지 대인마크 능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선수였다.
공격을 끊어낸 페페는 곧바로 파트너인 세르히오 라모스에게 볼을 연결했다.
레알의 최후방 빌드업 리더는 누가 뭐래도 라모스.
내가 미리 혼쭐을 좀 내주면 팀 오펜스 자체를 뻑뻑하게 만들 수 있다.
“어디 가시려고?”
건방지게 전방으로 공을 뿌려 주려는 라모스에게 들러붙었다.
라모스야, 나의 찰거머리 수비에 고생한 애들이 꽤 많단다.
어라? 이 녀석이?
우오오-----
관중석에서 터지는 함성.
라모스가 무슨 풋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내 태클을 피하더니, 탄력을 받아 곧장 치고 나갔다.
아니 무슨 수비수가 기술이 이렇게 좋아?
그리고 왜 이렇게 빨라?
괜히 달려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하이라이트 필름만 만들어 주었다.
“역습이다!”
스네이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모스가 직접 롱패스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호날두 쪽이 아닌 오른쪽 측면.
그곳엔 우리에게도 익숙한 얼굴, 카카가 있었다.
‘좌날두 우카카’라니.
이름값만 보면 참 후덜덜한 스쿼드긴 하다.
레알 이적 이후 부상으로 폼을 완전히 잃어버리며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카카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신체 능력이 살아있을 시절.
지금 같은 역습 상황에서 카카의 치달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터엉--- 터엉---
거침없이 전진하는 카카.
브라질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에게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수비수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네티 주장 VS 카카.
카카는 다른 잔재주 없이 계속 치고 달리며 스피드 대결로 이끌고 갔다.
지지 않고 따라붙는 주장.
“오오!”
27세 미드필더와 36세 수비수의 일기토는 주장의 판정승.
끝끝내 공에 발을 갖다 대며 카카의 돌파를 저지했다.
크으, 주장. 역시 멋져요.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레알의 공격.
사비 알론소와 손잡고 리버풀에서 이적해온 풀백알바로 아르벨로아가 쪼르르 달려와 스로인을 준비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사람도 레알 유스 출신.
유서 깊은 명문 구단답게 여기저기 씨앗을 참 많이도 뿌렸다.
‘믿쓰레(믿고 쓰는 레알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네.
아르벨로아가 짧게 던져 넣은 공을 받은 카카가 무리하지 않고 뒤쪽으로 공을 돌렸다.
밀라노에서나 마드리드에서나, 우리 주장 뚫기가 참 쉽지 않지?
“호날두 잡아!”
그야말로 찰나였다.
카카의 백패스를 받은 구티가 망설임 없이 페널티박스 안으로 로빙 패스를 때려 넣은 것.
벤치에서 무리뉴 감독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호날두가 박스 안에서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한 것.
그리고 침투를 허용한 마이콘이 슈팅하기 직전에 호날두를 슬쩍 밀친 것까지.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삑---
마르틴 한손 주심의 야속한 손가락이 페널티킥을 알리는 수신호를 그렸다.
전반 22분.
마치 한국에 있는 누군가의 가호를 받은 듯한 시간대였다.
근처에 있던 라울과 카카가 얼른 달려가 영웅이 된 호날두를 일으켜 세웠다.
마이콘에게 경고가 안 주어진 게 불행 중 다행.
오늘 여러모로 호날두에게 탈탈 털리고 있는 마이콘이었다.
평소엔 참으로 보기 힘든 약한 모습.
그나저나 구티는 왜 우리랑 붙을 때마다 항상 ‘그날’인 거야?
방금 장면은 호날두의 오프더볼 무브도 좋았지만 패스가 정말 환상적이었다.
자신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득점으로 연결하기 위해서 호날두가 키커로 나섰다.
이젠 세자르 형님을 믿어 볼 수밖에...
“가운데.”
“응? 뭐라고?”
“가운데야.”
스네이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페널티킥 방향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알아.”
뭐지?
어처구니 없는 자신감인데, 하도 단호하게 말하니까 믿음이 생기려고 한다.
휘슬이 울리고 호날두가 짧은 도움닫기 이후 인사이드로 밀어 차며 슈팅을 시도했다.
“우와!”
거짓말처럼 정중앙으로 날아가는 볼.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세자르 형님이 발을 쭉 뻗으며 공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됐다! 막았...”
하지만 호날두는 킥과 동시에 이미 실수를 예감했는지 곧바로 골문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툭---
끝까지 최선을 다한 세자르 형님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조금은 허무한 실점.
이번 시즌 챔스 1호골을 성공한 호날두가 환호하는 홈팬들을 위해 잔디 위를 미끄러지는 ‘무릎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때는 아직 ‘호우 세리머니’가 개발되기 전.
“젠장!”
너무나도 아깝게 골을 먹힌 세자르 형님이 바닥을 거칠게 내려쳤다.
“스네이더.”
“응?”
“PK 방향 알 수 있다는 거, 진짜야?”
“응.”
“100%로?”
“그래.”
“그럼 우리 팀 골키퍼한테 알려주면 되잖아.”
“알려주면, 방향이 바뀌어.”
“뭐? 그럼 아무 소용 없는 능력이잖아.”
“응.”
너무 당당하게 그렇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네.
어쨌든 지금은 스네이더의 세상 쓸모없는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
호날두 녀석이 골을 넣었단 말이지?
바로 갚아준다, 딱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