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59화 (60/176)

59화

“어깨 좀 펴. 괜찮아. 바로 갚아줄게.”

전반전 내내 뭐에 홀린 듯 기를 못 펴고 있는 마이콘을 토닥토닥해주었다.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먹겠다는 선언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플레이로 증명 중인 호날두.

호날두 급의 선수가 ‘풀핏’으로 달려들면 그 누가 막더라도 고전하는 건 당연했다.

“시발, 이상하네... 이렇게 빡센 녀석들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레알 박살’을 자신했던 에투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경기 전에 라울이 그러던데. ‘우리들은 강해졌다’고.”

“흥, 기다려 봐. 금방 동점골을 넣어줄 테니.”

경기 재개.

리드를 잡은 레알 마드리드 녀석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조직적인 압박을 보아하니,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이 프리시즌 동안 팀을 꽤 잘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도 작년 챔스 4강까지 오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팀.

당황하지 않고 공을 돌리며 기회를 엿봤다.

이 과정에서 가장 돋보인 건 에스테반 캄비아소.

적절한 패스 앤 무브로 적재적소에서 공을 받아주며 거센 압박 속에서 볼 소유권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고 보니 캄비아소도 레알 출신이네.

벤치에 앉아 있는 왈테르 사무엘 형님도 레알에서 뛴 적이 있고.

만약 루이스 피구 형님이 은퇴를 안 했다면 정말 볼 만 했겠다.

어째 레알에서 실패하거나 늙어버린 선수들만 온 것 같긴 한데...

기분 탓이겠지?

“나한테 패스해!”

슈퍼스타 정백강의 격려로 힘을 얻은 것일까.

마이콘이 오랜만에 공격적으로 치고 올라갔다.

그렇지, 이래야 ‘오른쪽’이지.

사비 알론소와의 끈질긴 몸싸움을 이겨낸 스네이더가 마이콘 쪽으로 공을 연결.

하지만 레알의 대처가 만만치 않았다.

라사나 디아라와 마르셀루가 동시에 달려들며 공 탈취를 시도.

윙어를 따로 두지 않는 4-3-1-2 포메이션이기 때문에, 마이콘이 막힌다면 우리 우측면 공격은 그냥 ‘0’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 비켜!”

이렇게 흥분한 모습의 마이콘은 처음 본다.

디아라와 마르셀루 사이의 협소한 빈 공간으로 공을 빼내며 직접 돌파를 시도하는 마이콘.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과감한 플레이였다.

당황한 마르셀루가 먼저 어깨를 집어넣으려 했으나 동급 최강의 파워를 자랑하는 마이콘은 무자비하게 상대를 튕겨내 버렸다.

“으억!”

비명을 지르며 무력하게 쓰러지는 마르셀루.

그래도 브라질 대표팀의 귀여운 후배인데, 승부 앞에선 얄짤 없다.

아마 호날두 때문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으리라.

‘분노의 질주’ 한 방에 순식간에 위기를 맞은 레알 수비진.

“뒤로 물러나! 어쩔 수 없어!”

라인 컨트롤을 맡고 있는 라모스가 콜을 했다.

마이콘의 킥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정백강-에투 투톱을 잡는 게 급선무라는 판단.

“질러!”

에투의 외침에 호응하듯 중거리포를 시도하는 마이콘.

뻐엉-----

맺힌 울분을 풀 듯 시원하게 때린 공이 맹렬한 기세로 골문 왼쪽 상단을 향해 날아갔다.

충분히 골도 가능한 코스인데...

“아오, 시발! 저게 막히네!”

에투의 한탄.

레알의 수호신 이케르 카시야스는 그리 쉽게 동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환상적인 다이빙으로 공을 쳐 내며 홈팬들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이어지는 코너킥 찬스.

나는 지긋지긋한 더블팀을 피해 페널티박스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골문과 먼 곳에 자리를 잡으면 상대 수비도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도 무서우니까 두 명 이상을 붙이든가, 아니면 한 명만 견제하고 나머지는 골문 쪽을 봐주든가.

레알 녀석들이 내놓은 해답은 후자였다.

팀 내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라모스를 내 마크맨으로 지정했다.

코너킥 키커는 스네이더.

친정팀을 상대로 뭔가를 보여줄 기회를 잡았다.

파앙-----

경쾌한 소리를 내며 먼 포스트 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공.

순간적으로 페페의 수비를 떨쳐낸 루시우가 프리 헤더 찬스를 맞았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놀라운 점프력을 과시하며 공에 이마를 갖다 대는 루시우.

역동작에 걸린 카시야스가 처절하게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오우-----

관중들의 탄성 속에 터진 알바로 아르벨로아의 결정적인 헤더 클리어.

슈팅 궤적을 끝까지 보고 있다가 가까스로 머리로 걷어냈다.

아직 공은 살아 있는 상황.

라모스가 나를 버려둔 채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페페가 공을 멀리 차 내려 했지만 에투가 끈덕지게 내민 허벅지에 살짝 스치며 공의 속도가 많이 죽었다.

거짓말처럼 가만히 서 있던 내 앞으로 툭 떨어지는 공.

어머, 이건 차야 해.

* * *

“뭐야? 이거 대체 뭐야?”

“크하하하! 살다 살다 이런 광경을 다 보네.”

“그러게.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솔직히 슈팅하는 순간 틀렸구나 싶었거든.”

“백강이 드디어 미쳤나 봐!”

아무리 그래도 미쳤다니.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나도 명색이 프로 축구선수인데.

인테르 원정팬들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동점골은 전반 39분 나의 ‘오른발’에서 터졌다.

그것도 25m짜리 중거리슛.

나를 방치한 라모스의 선택은 아주 참혹한 결과로 귀결되었다.

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프리시즌 동안 얼마나 많은 킥 훈련을 했던가.

그동안의 노력을 이 한 골로 모조리 보상받는 느낌이다.

나와 호날두가 각각 한 골씩 넣은 상황에서 전반전 종료.

“아주 좋았다, 백강.”

라커룸으로 돌아오자 무리뉴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감독님 덕분입니다.”

단순히 빈말만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보냈던 프리시즌.

내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추가로 실시했던 킥 훈련 때마다 무리뉴 감독은 끝까지 함께 남아 있었다.

덕분에 원래 약속했던 1시간보다 항상 늦어지는 게 문제긴 했지만.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었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역시 실력 향상에는 훈련이 최고시다.

“근데 다시 차라면 절대 그렇게는 못 찰 것 같아. 운이 좋았지.”

“동의.”

“나도 그렇게 생각.”

“그런 존나게 당연한 소리는 하나 마나지.”

아니 근데 이 사랑하는 동료들이?

분해서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사네티 주장이 쐐기를 박았다.

“다들 너무 그러지 마. 백강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물론 운이 좀 따르긴 한 것 같아.”

주장... 너무해요.

* * *

후반전 시작.

양 팀 모두 선수 교체는 없었다.

원정 경기이기 때문에 무승부도 나쁜 결과는 아니겠으나...

다른 건 몰라도 호날두한테는 참교육을 좀 시켜주고 싶었다.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아주 비장하다.

“나이스 패스!”

위협적인 장면을 먼저 연출해낸 건 우리 쪽이었다.

전반전에 생각보다 잠잠하던 스네이더가 드디어 감을 찾았는지, 앞서 구티 못지않은 기막힌 스루패스를 찔러 주었다.

카시야스가 처리해야 할지, 아니면 센터백이 걷어내야 할지 애매한 위치로 날아간 공.

“마이 볼!”

일단 콜은 페페가 했고, 공을 차지하기 위해 에투와 치열한 경주를 펼쳤다.

페페도 절대 느리지 않은 선수였지만 스피드는 역시 에투가 한 수 위.

카시야스 나온 것을 확인하고 페페의 태클을 피해 왼발로 찍어 찬 공이 골문 안쪽으로 날아갔다.

퍼엉-----

“으아아아아악! 시발 진짜!”

에투의 절규.

어느새 등장한 라모스가 공이 라인을 넘어가기 직전 시저스킥으로 멀리 차 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반사신경.

잘못된 판단으로 실점을 야기했던 라모스가 한 골 제대로 막으면서 속죄(?)를 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공격.

루즈볼을 따낸 티아고 모타가 지체 없이 오른쪽 측면으로 공을 뿌렸다.

이제 완전히 기운을 차린 듯한 마이콘의 오버래핑.

호날두가 수비 가담을 거의 하지 않고 있어서 공간이 많이 났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연합 수비 블록을 형성하는 디아라와 마르셀루.

처참하게 뚫렸던 기억이 남은 탓일까.

바짝 붙지 않고 거리를 좀 두며 드리블을 견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이콘은 영리한 선수.

상대 수비에 따라 플레이의 유형을 빠르게 결정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뻐엉-----

좋다 좋아.

빈틈을 놓치지 않은 얼리 크로스.

불과 몇 분 전 영웅이 되었던 라모스가 이 대목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20대 초반의 들끓는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공을 끊어내기 위해 섣부른 점프를 시도한 것.

이봐 친구, 그건 이 정백강님의 머리에도 안 닿겠다야.

공을 맞히지 못한 라모스가 허무하게 착지하는 사이, 여유롭게 공을 잡은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1:1 찬스.

카시야스고 나발이고, 오늘 나의 오른발은 최상이라고.

철썩---

후반 9분 만에 터진 역전골.

“여기 발 올려!”

내 곁으로 달려온 문타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축구화 닦기’ 세리머니.

“이래도 운이야?”

신나서 호기롭게 외치는 내게 즉각적인 응답이 돌아왔다.

“방금은 수비가 좀...”

“아직 더 검증해 봐야지.”

“그거 못 넣을 정도면 여기 있음 안 되지.”

에잉, 됐다.

말을 말자.

* * *

짝짝짝짝짝짝짝-----

환호와 박수에는 이미 익숙한 나다.

그러나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다.

전광판은 후반 43분을 가리키고 있다.

스코어는 3-1.

사실상 승부는 결정 난 상태다.

감독님, 이것까지 예상하고 저를 불러들이는 겁니까?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가득 메운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발로 두 골을 넣으며 호날두와의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한 나는, 에투의 크로스를 헤더골로 연결하며 기어이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베르나베우에서만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

모르긴 몰라도 역대 최초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레알 팬들이지만, 이 정도 활약을 한 선수에게 기립박수는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선제골을 넣을 때까진 좋았다. 계획대로 잘 흘러갔던 게임이었다. 다만 수비 집중력에서 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정백강은... 역시 훌륭한 선수였다.”

홈에서 패배한 페예그리니 감독이 씁쓸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다음은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

단상에 오른 내게 엄청난 플래시가 쏟아졌다.

- 요한 크루이프,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지뉴,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에 이어 베르나베우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다섯 번째 원정팀 선수가 되었다. 감상이 어떤가?

“그런가? 방금 알았다. 위대한 선수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 그리고 그런 영광을 허락해준 레알 마드리드 팬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 ‘정백강’ 하면 ‘머리’라는 인식이 있는데, 오늘은 발로만 두 골을 넣었다.

“가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내가 축구선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하하. 동료들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던데, 나는 운도 실력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 이 경기 전에 있었던 호날두와의 논쟁 아닌 논쟁이 화제였다.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가?

아, 고민되는 순간이다.

순한 맛이냐, 매운 맛이냐.

에라 모르겠다.

“지나간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그냥 남은 결과가 전부다. 오늘 나는 세 골을 넣었고, 호날두는 한 골을 넣었다. 이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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