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60화 (61/176)

60화

- 정백강 인터뷰 ㅅㅂ ㅋㅋㅋㅋㅋ

- 날두 부들부들해서 밤에 잠도 못 잤을 듯 ㅋㅋㅋㅋ

- 근데 좀 노매너 아닌가?

- 선비질 좀 그만하라고 ㅋㅋ 3골 1골 팩트잖어

- 첫골 뽀록, 2번째골 운빨, 3번째골 또 헤딩ㅋ

- 정백강 빠는 애들도 ㅂㅅ같은데 무작정 까는 애들은 더 등신임 ㅋㅋ 어떻게 해트트릭한 애를 까냐

- 그거 레알임. 쿨병 오지게 걸려서 한국 선수 잘하면 깔 것부터 찾음 ㅇㅇ

- 오늘 같은 날은 싸우지 좀 말자 ㅡㅡ 베르나베우에서 기립박수 받은 선수가 나왔는데 왜 그렇게 서로 못 죽여서 안달임?

- 냅둬유~ 원래 이런 축구 커뮤가 이런 재미 아니겄슈~

나의 레알 마드리드전 이후 인터뷰에 대해 한국에서나 유럽에서나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결론은 비슷했다.

‘못 할 말은 아니었다’는 것.

냉정하게 워딩만 보면 그냥 내가 세 골 넣고 상대가 한 골 넣었다고 한 게 다니까 말이다.

호날두가 내 발언에 대해 추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잠시 축구계를 뜨겁게 달궜던 이슈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뭐, 까놓고 말해서 약한 놈은 조용히 해야지.

거기서 입을 더 털어봐야 추해질 뿐이니까.

엉뚱하게도 이번 경기에 대한 불만은 우리 팀에서 나왔다.

“왜? 어째서 나한테는 기립박수를 안 쳐준 거야? 나도 베르나베우에서 무지 잘했었는데, 시발.”

에투 형, 이것이 바로 형과 나의 눈높이야.

* * *

레알과의 혈전을 마치고 밀라노에 도착했더니 에이전트 미노 라이올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백강 씨, 마드리드에서의 엄청난 활약은 잘 봤습니다. 당신 같은 선수가 제 고객이라는 게 정말 환상적이네요.”

“하하, 보통이죠 뭐. 그런데 그것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라이올라는 입에 발린 공치사나 하려고 바쁜 시간을 낭비하는 인물이 아니다.

보아하니 ‘쩐’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구먼그래.

“백강 씨는 시원시원해서 정말 좋네요. 혹시 미켈레 시빌로티라는 분을 아십니까?”

미켈레... 시빌로티...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확신은 없다.

“아뇨. 그게 누군가요?”

“밀라노, 아니 이탈리아 패션계를 주름잡는 거물 디자이너입니다. 대외 활동을 아주 적극적으로 하는 분은 아니라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용건을 바로 말씀드리죠. 시빌로티 씨가 백강 씨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네? 디자이너가 저를 왜...”

“곧 열리는 패션쇼에 백강 씨를 모델로 쓰고 싶다고 하더군요.”

“네? 패션쇼라고요?”

“사실 시빌로티 씨가 인테르의 엄청난 팬입니다. 요즘 인테르에서 최고 스타를 꼽으면 바로 백강 씨 아니겠습니까? 이런 제안이 들어온 것도 이상하진 않죠.”

“그런데 패션쇼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서...”

“일단 시빌로티 씨를 만나보고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번에 안면을 터놓으면 추후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라이올라가 말하는 ‘좋은 일’이란 곧 돈을 의미한다.

에이, 인맥 넒힌다고 생각하지 뭐.

“알겠어요. 한 번 만나보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약속이 정해지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 *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오래지 않아 인터폰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 정백강 선수십니까?

“맞습니다.”

- 일찍 오셨네요.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차를 끌고 진입로로 쭉 들어오시면 됩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이잉---

우와아... 미쳤다 미쳤어.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신세계가 나타났다.

몇 평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넓은 정원.

규모도 규모지만 관리 상태가 더 인상적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각이 딱딱 잡혀있는 정원수들.

여기 관리하는 분은 정말 힘들겠구나...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정원보다 더 엄청난 스케일의 건물이 등장했다.

이탈리아에 온 이후로 훌륭한 대저택들을 많이도 봤지만 이곳은 정말 차원이 다르다.

저택이라기보단 옛날 성에 온 느낌이랄까?

빌딩으로 치면 10층 높이는 족히 되어 보이는 중세풍 건물.

“환영합니다, 정백강 선수. 저는 시빌로티 씨를 모시는 집사 안토니오 로시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백발의 노신사가 나를 맞았다.

외관도 웅장했지만 저택 안쪽도 절대 그에 뒤지지 않았다.

“정말 멋진 저택이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원래 이곳은 예전에 이 지역 영주가 쓰던 성이랍니다. 10년 전에 시빌로티 씨가 매입하셨죠.”

헐...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로 성이었어.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신기한 걸음걸이로 앞서가던 로시가 2층에 위치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정백강 선수가 도착했습니다.”

“오오! 얼른 들어오게!”

조금 새된 듯한 목소리.

“들어가시죠.”

“네.”

문이 열리자 화려한 가구로 치장된, 그러나 무지하게 더러운 실내가 나타났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온갖 스케치들과 천 쪼가리들, 그리고 옷을 반만 걸친 채 쓰러져 있는 마네킹들까지.

너저분 그 자체다.

이거, 주인이 깔끔해서가 아니라 집사인 로시 덕분에 관리가 되는 거였군 그래.

“정백강! 반갑네, 반가워. 자넬 꼭 실제로 만나보고 싶었다네.”

시빌로티가 악수를 청해 왔다.

키는 170cm이 될까 말까.

붉은 실크로 만든 가운을 걸친 몸은 앙상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자그마한 체구와 별개로 눈빛만은 형형해서 알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1948년생이라고 했지.

한국 나이로 치면 환갑인데, 생기가 넘치는 행동거지 때문인지 그보단 훨씬 젊어 보인다.

“오늘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자, 의례적인 인사는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지.”

성격 한 번 화끈하시네.

식당으로 이동하면서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나도 말이지. 어릴 때는 인테르에서 뛰는 축구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네. 애석하게도 그럴 만한 깜냥은 아니었지만 말일세.”

“오히려 잘 된 게 아닐까요? 덕분에 다른 재능을 찾아 이렇게 성공하셨으니까 말이죠.”

“그게 그렇게 되나? 허허허. 물론 지금은 내 일을 아주 사랑하지. 자네 말마따나 축구를 잘 못 했던 게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이미 예상은 했지만 식당 역시 엄청나게 으리으리했다.

20명은 족히 앉을 만한 커다란 테이블에 은으로 만든 듯한 식기와 냅킨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앉게나. 곧 요리가 나올 걸세.”

“네, 시빌로티 씨.”

타이밍 좋게 음식들이 들어왔고, 로시의 지휘에 따라 착착 세팅되었다.

“원래 자네한테 바로 연락할까 했는데, 그래도 에이전트한테 먼저 묻는 게 순서인 것 같아 그렇게 했다네. 미노하고는 좀 아는 사이라 편하기도 하고 말이지.”

‘미노’라고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꽤 가까운 듯하다.

“사실 연락을 받고 매우 놀랐습니다. 패션쇼라니, 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운동만 했던 사람이라서요.”

“그랬나. 사실 내 쇼에 인테르 선수가 모델로 선 게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네. 옛날에 날렸던 골키퍼 발테르 쳉가도 선 적이 있고... 현역 중에는 하비에르도 한 번 경험이 있지. 그게 언제더라?”

“5년 전입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로시가 즉시 대답했다.

사네티 주장의 패션쇼라니.

나중에 꼭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사실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시빌로티 씨가 주최하는 쇼라면 아주 큰 무대일 텐데요. 그런 중요한 장소에서 경험도 없는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거든요.”

“허허, 수만 명 관중 앞에서 축구를 하는 사람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먼. 내 쇼를 보러 오는 관객은 그에 비하면 무척 초라하다네. 전혀 걱정할 것 없네. 그리고 말이지...”

시빌로티가 와인 한 모금을 여유롭게 넘긴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 쇼에 다른 사람이 아닌 자네가 꼭 서줬으면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네.”

* * *

따르릉---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라이올라.

어떻게 매번 이렇게 딱 맞춰서 연락을 할까.

참 신기한 능력이다.

이 정도 감각이 있어야 에이전트로 대성할 수 있는 거겠지.

“시빌로티 씨를 만난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쇼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시빌로티 이 양반, 마피아도 아닐 텐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왔다.

다시 시계를 돌려 뜨거웠던(?) 식사 자리.

“이번 쇼는 일종의 자선 행사야. 쇼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은 전부 아이들을 위해 쓰일 걸세. 우리 이탈리아에는 가난 때문에 정규 교육도 못 받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다네. 자네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

내 가정사가 여기서 나올 줄이야.

전혀 예상 못했다.

“저에 대해 잘 아시네요. 맞습니다.”

“사실은 나도 자네랑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네. 술밖에 모르는 망나니 아버지와 일찌감치 갈라선 후에, 양육비 한 푼 제대로 못 받으면서 어머니 혼자 힘들게 나를 기르셨지. 돌아가실 때까지 쭉 고생만 하셨다네.”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시빌로티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미안하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인데 말이지. 도무지 나아지지가 않는구먼.”

이보세요, 시빌로티 씨.

아무리 그래도 눈물은 반칙 아닙니까.

자연스럽게 어머니 생각이 나자 내 마음도 심하게 흔들렸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정말 비참한 건 당장 겪는 고통 때문만은 아닐세.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꺾어버리기 때문이지.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보란 듯이 성공한 자네야말로 이번 쇼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네. 어떤가,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나? 암울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해주지 않겠나?”

이건... 결정타다.

이런 말을 듣고도 ‘아니요’를 외치면 그게 사람이야? 목석이지.

“아... 알겠습니다.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무대에 서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시빌로티가 내 손을 맞잡으며 흔들었다.

뭔가 제대로 낚인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힘이 된다면야...

하여간에 쇼 출연이 확정되면서 나는 바로 멘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강, 무슨 일이야?”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했어요, 주장.”

“물어볼 거? 뭔데?”

“주장, 예전에 디자이너 미켈레 시빌로티 씨가 연 패션쇼에 나간 적이 있으시죠?”

“...”

왜 대답이 없을까.

“주장? 듣고 계세요?”

“어어, 있어 있어. 근데 그건 어디서 들었지?”

“오늘 에이전트 소개로 시빌로티 씨를 만났거든요.”

“뭐? 그게 정말이야?”

“네, 저보고 이번에 열리는 자선 패션쇼에 서달라고 부탁을 받았어요.”

“그렇구나. 수락했어?”

“네, 그래서 연락드렸어요. 조언을 좀 구하려고요. 경험이 있으시니까.”

“조언...이랄 게 뭐 있나. 백강, 너라면 잘할 거야. 그럼 이만!”

“어? 주장? 주장!”

끊어버리셨네.

형수님 관련된 건이 아니면 거의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주장인데 말이지.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