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훈련장, 집, 그리고 경기장이 전부였던 밀라노 생활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미켈레 시빌로티가 소개해준 현직 모델에게 듣는 ‘워킹 연습’이 추가된 것이다.
처음에는 뭐가 그리 어렵겠나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죠. 어깨가 너무 올라갔잖아요!”
“왜 자꾸 아래를 봐요? 시선은 항상 정면!”
“팔이 너무 부자연스러워요. 평소에 걸을 때도 그렇게 이상하게 흔들어요?”
크흑, 서럽다 서러워.
내가 천하의 무리뉴 감독한테도 이렇게 안 혼나는 사람인데.
괜히 한다고 했나...
모델 수업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울분은 몽땅 그라운드 위에서 풀어 버렸다.
[정백강, 칼리아리 원정서 멀티골... 팀 3-0 완승 이끌어]
[후반 40분 극적 결승골... 나폴리 무너뜨린 정백강의 헤더 한 방]
[1골 2어시스트 ‘원맨쇼’... 정백강에게 무릎 꿇은 삼프도리아]
나의 신들린 듯한 활약을 앞세워 우리 팀은 리그 시작부터 쾌조의 6연승을 내달렸다.
호흡이 맞아들어가기 시작한 나와 에투는, 6경기 동안 팀이 기록한 17골 중 무려 15골을 합작하며 ‘유럽 최강 투톱’의 위용을 뽐냈다.
스페인으로 떠난 즐라탄 역시 라리가 1라운드부터 5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며 금방 적응에 성공.
지난 이적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거래 중 하나였던 에투와 즐라탄의 트레이드는, 적어도 현재 상황까지만 놓고 보면 ‘윈윈’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 * *
“이걸... 입으라고요?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요?”
“아니에요. 이 옷이 맞습니다.”
오,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오늘은 시빌로티가 주최하는 자선 패션쇼가 열리는 날.
보안 문제 때문에 행사 당일에서야 공개된 내 옷의 디자인은...
한 마디로 ‘파격’이었다.
어쩐지...
사네티 주장이 자꾸 날 피해 다니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는데 이걸 어쩌나.
“5분 뒤 리허설 시작합니다!”
그래, 리허설까진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이 옷을 입고 동료들 앞에 어떻게 나선단 말이냐.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하다.
“오우, 오늘의 주인공이 오셨구먼.”
대기실에 들어온 시빌로티가 반색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지금 기분이라면 충분히 뱉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입을 옷들은 어떤가? 마음에 드나? 요 근래 가장 힘을 쏟은 역작인데.”
힘을 좀만 덜 쓰지 그러셨어요.
“하.하.하. 아주 훌륭합니다. 저 같은 게 입어도 될지 모르겠어요.”
“무슨 그런 말을. 자네가 이번 무대에 서주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네.”
“곧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진행 요원 덕분에 시빌로티와의 짧은 인사가 끝났다.
“멋진 모습 기대하겠네.”
우라질.
* * *
- 다들 도착했어, 백강. 주장은 일이 있어서 같이 못 왔어.
문타리가 메시지와 함께 전송한 사진에는 문타리와 파트너 메나예 돈코르, 에투, 스네이더, 그리고 세자르 형님이 있었다.
주장, 못 볼 꼴을 피해 오지 않으셨군요.
근데 아셨으면 좀 말려주시지...
- 굳이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다들 바쁘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답장을 했으나 칼같이 대답이 돌아왔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엄청 기대하고 있다구. 우리 보면 손 흔들어 줘.
기대하고 있으니까 문제인 거야, 타리 형.
오늘 런웨이에 내 차례는 총 세 번.
피날레인 마지막은 그나마 좀 낫지만 나머지가 문제다.
“정백강 선수, 다음 차례입니다.”
“네...”
무대 위를 비추는 뜨거운 스포트라이트.
어째 리허설 때보다 조명이 더 센 것 같다.
손이고 나발이고 뭐가 보여야 흔들어 주지.
눈이 너무 부시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을 깔면 안 된다.
시선은 항상 정면.
얼마나 혹독하게 수업을 받았던가.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의 첫 번째 워킹이 시작되었다.
이번 의상은 검정 가죽바지에 하얀 셔츠.
이렇게만 말하면 뭐가 문제인가 싶겠지만, 아주 심각한 결함이 있는 옷이다.
양쪽 유두 부근에 뚫린 꽃무늬 모양 구멍.
대체 거기에 구멍이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꽃무늬로.
나는 도저히 모르겄다.
어우, 그나저나 여기는 사람도 많은데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양쪽 구멍으로 찬바람이 슝슝 들어오는데 어째 기분이 묘하다.
그래도 마무리 포즈는 확실하게.
억겁처럼 느껴졌던 첫 번째 워킹이 드디어 끝났다.
이대로 집에 가고 싶지만 아직 두 번 남았다.
“바로 옷 갈아 입으실게요.”
알고 있다구요.
하... 이번에 입을 옷은 감촉부터 정말 싫다.
2009년에 비닐옷이 웬말이냐.
시빌로티 씨, 이런 건 한국에선 1990년대에 실험이 끝났어요.
K팝의 대부 ‘JYC’ 모르세요?
옷을 걸치긴 걸쳤는데 안이 다 비쳐 보이니 그냥 팬티 하나만 입고 있는 느낌이다.
이탈리아의 아이들아.
너희에게 용기를 주려고 형이 이렇게까지 하고 있단다.
부디 힘을 내서 살아가려무나.
* * *
짝짝짝짝짝짝-----
쇼는 끝났다.
피날레 무대에서 입은 나의 마지막 의상은 화려한 레이스가 잔뜩 달린 중세 귀족풍 재킷이었다.
거기에 하의는 꽉 끼는 쫄쫄이...
안 그래도 하체가 두꺼운 축구선수한테 이런 옷을 입히면 어떡합니까?
하아...
그래도 꽃유두 셔츠나 더럽게 땀 차는 비닐옷보단 훨씬 만족스러웠다.
기진맥진해서 대기실로 돌아오니, 꽃다발을 든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하는 상황.
그중에서 표정을 제일 못 숨기는 에투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게 보인다.
짜식, 네 맘 이해한다.
“정말 훌륭했어요, 백강 씨.”
으잉?
문타리가 뜨악한 얼굴로 그의 사랑하는 예비신부 돈코르를 바라보았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아뇨. 정말 감동했어요. 시빌로티 님의 디자인이야 예전부터 명불허전이었는데, 그걸 소화해낸 백강 씨의 워킹과 표정 연기도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오늘이 처음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의외의 상황에 눈만 껌뻑껌뻑하는 인테르의 핵심 선수들.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아, 그러고 보니 돈코르도 모델 출신이지.
‘이쪽 감성’의 소유자란 말씀이다.
이렇게 되면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
지금 나를 깠다간 순식간에 ‘패알못’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야, 정말 끝내줬어 백강.”
“너무 멋있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니까?”
“이참에 모델도 겸업하는 게 어때? 축구만 하기엔 너의 재능이 너무 아까운걸.”
가증스러운 녀석들.
근데 내가 정말 그렇게 잘했나?
* * *
패션업계로 잠깐의 외도(?)를 마친 나는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다음 경기는 마르세유와의 챔피언스리그 32강 2차전.
지난번에 상대했던 레알 마드리드와 마찬가지로, 마르세유 역시 이번 시즌 새로운 감독이 부임한 팀이었다.
그 주인공은 디디에 데샹.
마르세유에서 뛴 경력도 있을뿐더러, 프랑스 대표팀에서 주장까지 역임했던 레전드 오브 레전드이자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월드컵, 유로, 챔스, 리그앙, 세리에 등 굵직굵직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냈던 데샹은, 지도자로서도 출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나코를 이끌고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하더니, 칼치오폴리로 인해 강등된 유벤투스에 부임하여 승점 –9의 장애물을 넘고 리그 1위로 승격에 성공한 바 있었다.
마르세유는 그가 세 번째로 이끌게 된 팀.
‘챔스 준우승 감독’의 가락이 어디 가지 않았는지, 1차전에서 취리히를 5-0으로 대파하며 우리를 제치고 조 1위에 올랐다.
이번 시즌 리그앙에서도 3승 2무로 순항 중.
하여간에 능력 하나만큼은 정말 확실한 감독이다.
“인테르는 거인이고, 게다가 원정 경기다. 엄청나게 힘든 경기가 될 것이다. 특히 정백강을 막는 방법에 대해 연구가 많이 필요할 듯하다. 솔직히 아직까진 답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겸손까지 갖췄으니 금상첨화.
에이스 판독도 잘 하시고 말이지.
“데샹은 타고난 승리자다. 그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이해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리가 유리한 것은 맞지만, 방심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무리뉴 감독의 훈훈한 발언.
역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법이다.
하지만 이런 덕담과는 별개로 언론과 팬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으니...
[정백강, 역사상 최초로 챔스에서 ‘연속 해트트릭’ 노린다]
[‘기록 브레이커’ 정백강의 새로운 도전]
[도박사들이 예측한 정백강의 해트트릭 확률은 얼마?]
- 솔직히 가능하다고 봄. 요즘 기세가 워낙 미쳤음
- 얼척 없는 소리 ㄴㄴ 해트트릭이 무슨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ㅋㅋㅋ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도 했는데 주세페 메아차에선 껌 아니겠음둥?
- 그건 레알 수비진이 병신이라 그럼ㅋㅋㅋ 정백강 빨려면 팬카페나 가라 ㅋㅋ 여기서 이러지 말고
- 라모스 페페 아르벨로아가 병신이라는 수준 진짜 ㅋㅋㅋㅋㅋ
- 라모스 개삽질로 2골 주웠는데?
- 원래 모든 골은 상대 실수에서 나오는 거란다. 결정력도 실력이지
- 백강충 아웃!
- 쿨병충 아웃!
- 와.. 또 싸우냐 적당히 좀 하자 진짜 ㅋㅋㅋㅋㅋ
챔스에서 연속 해트트릭이라...
회귀하기 전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호날두랑 메시가 달성했던 것 같다.
뭐, 걔네가 하기 전에 내 이름을 먼저 새겨넣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그래.
* * *
2009년 9월 29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이변을 꿈꾸는 마르세유와 이번 시즌 트레블을 노리는 인테르가 밀라노에서 만났다.
2003-2004 시즌 챔스 결승 이후 5년이 지나 다시 만난 무리뉴 감독과 데샹 감독.
당시에는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포르투가 모나코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뒀었다.
데샹 감독 입장에서는 일종의 복수전이기도 한 셈이다.
“자, 다들 얼지 말고. 할 수 있어! 이기고 돌아가자!”
힘든 경기를 앞두고 동료들을 독려하는 마르세유의 주장 마마두 니앙.
비교적 화제가 덜 되어서 그렇지, 니앙 역시 취리히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었다.
그 역시 대기록 달성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셈.
물론 니앙이 우리를 상대로 진짜 해트트릭을 할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킥오프.
우리 팀의 선축으로 전반전이 시작되었다.
본인의 표현대로 ‘거인’을 상대해야 하는 데샹 감독은 4-5-1에 가까운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최전방의 니앙을 제외한 전원이 수비에 가담하다가 역습 한 방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이었다.
실리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데샹 감독다운 선택.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고 버티는 상대를 가장 잘 패는 게 또 우리 팀의 특징이었다.
왜냐고?
왜긴 왜야.
내가 있으니까 그렇지.
뻐엉---
마르세유의 두터운 중원을 상대해 줄 의사가 없다는 듯, 4백라인 바로 앞에서 공을 잡은 캄비아소가 내 머리를 겨냥한 롱패스를 시도했다.
요즘엔 이럴 때 에투 쪽 찬스를 봐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에투가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침투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마르세유 수비진 역시 에투 쪽 견제에 신경이 팔린 상황.
콰아앙-----
확률이란 건 결국 확률일 뿐.
패스만 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
나의 기습적인 중거리 헤더 슈팅이 스티브 만단다 골키퍼의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그물을 갈랐다.
Grande!!! Testa!!!
Grande!!! Testa!!!
전반 3분.
생각보다 훨씬 일찍 터진 선제골에 홈팬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자, 일단 한 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