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62화 (63/176)

62화

대기록이라는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달성한 쪽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만, 반대로 허용한 입장에서는 평생 이불킥할 굴욕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느냐.

첫 골이 터진 이후 마르세유 선수들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이 말이야.

- 질 수는 있어, 하지만 해트트릭은 안 되지.

꼭 이렇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내 마크맨인 술레만 디아와라는 허무한 실점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듯 더욱 적극적으로 들러붙었다.

어우, 이러면 좋지 않아.

플레이 스타일상 수비와 몸을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지라, 상대가 더티하게 나오면 무지하게 피곤해진다.

“이것 좀 놓고 얘기하지?”

“...”

“지금 우리가 하는 거 축구야, 격투기가 아니라.”

“...”

나의 경고에 일언반구 대꾸가 없는 디아와라 녀석.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군.

하지만 애물단지처럼 꼭 붙잡은 내 유니폼을 놓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내가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이는 사이, 마르세유가 간담이 서늘한 역습 한 번으로 홈팬들이 가슴을 쓸어 내리게 만들었다.

그 시작은 스네이더의 턴오버.

상대 압박에 갇혀 우물쭈물하다가 허무하게 공을 빼앗겨 버렸다.

컨디션이 최상일 때는 거의 완전체 미드필더에 가까운 스네이더지만, 기본적으로 탈압박 능력은 고질적 약점이었다.

“죽어라 달려!”

공을 탈취한 아르헨티나 대표팀 미드필더 루초 곤잘레스가 머리칼을 휘날리며 왼쪽 측면으로 공을 전개했다.

총알처럼 튀어나가 공을 잡은 선수는 마르세유의 ‘신성(新星)’ 아템 벤 아르파.

1차 저지선으로 나선 티아고 모타의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더니 거침없이 전진했다.

이야, 고놈 참 빠르다.

프랑스가 기대하는 특급 유망주답게, 스피드와 개인기가 아주 출중했다.

계속 측면으로 진격해서 마이콘과 승부하는 대신, 중앙 쪽으로 파고드는 벤 아르파.

모타의 복수를 위해 캄비아소가 나섰는데...

“저런 미친 새끼가!”

에투의 입에서 걸걸한 욕설이 뿜어져 나왔다.

세리에 수위급 수비형 미드필더인 캄비아소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플립 플랩(Flip-flap).

이래서 드리블러에게 공간을 주면 안 된다니까...

벤 아르파가 어그로를 끄는 사이, 현재 나와 함께 챔스 득점 공동 선두인 마마두 니앙이 우리 수비진 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타이밍 좋게 바로 들어가는 스루패스.

“휴, 간 떨어질 뻔했네.”

언제나 든든한 세자르 형님이 몸을 날려 공을 잡아내면서 일단 상황 종료.

비록 무위로 돌아가긴 했지만, 마르세유의 역습은 엄청나게 위협적이었다.

특히 벤 아르파의 순간적인 천재성은 입이 떡 벌어질 수준.

저런 재능이 있는 선수도 끝내 대성을 못 했으니...

이 축구판에 이름 하나 남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깨닫는다.

야, 근데 좀 떨어져라 디아와라야.

이러다 정분나겠어.

* * *

“역시 데샹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야.”

결국 1-0으로 전반전을 마친 뒤 맞은 하프타임.

무리뉴 감독이 재밌다는 듯 입술을 핥았다.

이른 시간에 골을 허용한 걸 감안하면 마르세유의 수비 안정 속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심판의 관대한 콜에 도움을 받긴 했지만 말이지...

만약 내가 주심이었으면 디아와라는 이미 퇴장을 세 번은 당했을 거다.

“후반전엔 웨슬리 대신 마리오가 나간다. 그리고 라인은 내리도록 해. 역습엔 역습이다.”

데샹 감독이 실리 축구를 한다지만, 무리뉴 감독 역시 지독한 현실주의자.

단단히 가드 올리고 카운터 펀치를 노리는 상대에게 굳이 기회를 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감독님, 저 해트트릭 하고 싶은데...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켰다.

스네이더 대신 발로텔리가 들어가면서 우리 역시 4-5-1 같은 4-3-3 진형을 갖추게 되었다.

후반전 시작.

“자, 천천히 하자! 천천히!”

나와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었던 사네티 주장이 다시 한 번 무리뉴 감독의 지시를 상기시켰다.

아, 참고로 주장은 2004년의 패션쇼 때 초록 형광빛 나는 탱크톱을... 크흑.

애니웨이.

무리뉴 감독의 ‘맞방패 전략’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마르세유 공격진도 괜찮은 선수들이긴 했지만, 개인 능력만으로 우리의 견고한 수비진을 부수기에는 클래스가 약간 모자랐다.

아까 날뛰었던 벤 아르파도, 압박이 조금 강화되니 위력이 확 죽어버렸다.

그렇다고 라인을 끌어올려 공격에 힘을 싣자니, 발 빠른 에투와 발로텔리의 역습에 혼쭐이 날 공산이 컸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의 편.

결국 데샹 감독의 결단이 중요했다.

0-1 패배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리스크를 안더라도 공격적으로 나설 것이냐.

우----- 우-----

바로 야유 나오죠?

아마 내가 관중석에 있었어도 짜증이 났을 거다.

적잖은 돈과 시간을 빼서 축구 보러 왔는데 ‘달릴까 말까 달릴까 말까’ 하고 있으니.

지독하게도 버티며 때를 기다리던 데샹 감독은 결국 후반 35분이 다 되어서야 결단을 내렸다.

왼쪽 풀백 타예 타이우를 불러들이고 레알 마드리드 출신의 스트라이커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를 투입.

공중 장악에 일가견이 있는 모리엔테스에게 일단 붙여주고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골이 필요한데 시간이 충분치 않을 때 사용하는 고전적인 방법.

“백강! 내려가서 수비 가담해!”

즉각 대응하는 무리뉴 감독.

끄응, 해트트릭은 물 건너 갔구나.

좀 아쉽긴 하지만 다음에 하면 되지 뭐.

루시우-키부 라인에 정백강까지 합류한 우리 팀 페널티박스는 그야말로 철벽.

전반전 하이라이트 필름 하나 찍고 감감무소식이던 벤 아르파가 모리엔테스를 겨냥한 얼리 크로스를 시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콰아앙-----

소리 한 번 호쾌하다.

헤더 클리어란 이렇게 하는 거지.

우와아아악!!!

그냥 머리로 걷어냈을 뿐인데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는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발로텔리가 아직 공중에 떠 있는 볼을 엄청난 속도로 쫓아가고 있었다.

이거 뭐야? 기회야?

모르겠다, 나도 일단 달려.

터엉---

트래핑 순간 모두의 시선이 부심에게 고정됐다.

올라가지 않는 깃발.

마르세유 녀석들이 골 넣겠다고 너무 많이 올라와 있던 게 화근이었다.

에투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그동안 출전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던 발로텔리.

마침내 이번 시즌 마수걸이 골을 넣을 기회를 잡았다.

뻐어어엉-----

맞으면 크게 다칠 것 같은 살벌한 강슛.

골문 오른쪽 상단을 정확히 노렸으나 마르세유의 수문장 스티브 만단다가 믿을 수 없는 반사신경을 과시하며 공을 쳐냈다.

스핀이 잔뜩 걸린 공이 나가지 않고 페널티박스 안쪽에 떨어졌다.

이제는 루즈볼 다툼.

에투보다 약간 빨랐던 디아와라가 가까스로 공을 걷어냈으나 자세가 불안정한 탓에 멀리 뻗지 못했다.

아이고... 힘들어...

그래도 뛴 보람이 있었네.

이 거리에서의 헤더슛은 또 오랜만인걸?

* * *

후반 37분.

26m 거리에서 작렬한 나의 슈팅에 그물이 출렁였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만단다와 디아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도 수비수 출신이라 그 마음 알지.

그 허탈감, 상실감, 무력감...

홈팬들 앞으로 달려간 나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로 두 골째라는 제스처였다.

나도 모르게 즉흥적으로 나온 세리머니.

근데 이거 꽤 괜찮은데?

스코어가 2-0으로 벌어지자 양 팀 벤치가 갑자기 바빠졌다.

“다 내려와! 이대로 마무리해!”

“한 골 더 넣고 끝내자!”

어려워만 보였던 나의 해트트릭 달성이 가까워지자 나타난 변화였다.

데샹 감독이야 그렇다 쳐도, 무리뉴 감독은 굳이 이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

제자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선택이다.

감동이네요, 감독님.

라임 좋고.

경기 종료까지 10여 분을 남겨둔 채 시작된 창과 방패의 대결.

이 드라마의 결말은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추가시간에 에투가 페널티킥을 얻어낸 것이다.

“백강, 네가 차.”

“뭐?”

잘못 들었겠지.

혹시 귀에 이상이 생겼나?

“네가 차라고. 이거 넣으면 해트트릭이잖아.”

에투가? 양보를?

그것도 페널티킥을?

“그래, 백강이 차.”

“좀 불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기록 세우는 장면, 구경 한 번 하자.”

동료들이 하나둘 다가와 말을 보탰다.

감독님도 그러더니 너희까지 왜 그러니.

오늘 나를 울릴 생각인 거야?

“자신 없으면 말고. 내가 찰게.”

이건 100% 진심이다.

역시 이럴 때는 발로텔리가 분위기에 초를 쳐 줘야 제맛이지.

“닥쳐, 내가 찰 거야.”

평소 같았으면 양보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아니다.

페널티 스폿에 공을 놓고 숨을 골랐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만단다 골키퍼.

아마 내 표정도 저렇겠지.

삑-----

챔피언스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슈팅이 골문을 향해 날아갔다.

* * *

[정백강, 챔피언스리그 2경기 연속 해트트릭 달성]

[‘챔스의 사나이’ 정백강, 통산 13경기서 21골 기록... 경기당 1.6골 페이스]

[기록만큼이나 빛났던 팀 케미스트리, 사무엘 에투의 ‘아름다운 양보’]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PK가 하나 섞인 게 오히려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었다.

“푸하하, 나중에 존나 비싼 밥이나 한 번 사라고.”

호쾌하게 말했던 에투는 며칠 지나지 않아 엄청난 테러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국에서 날아온 ‘택배 테러’말이다.

문타리에 이은 두 번째 피해자(?)였다.

기록도 세웠겠다, 단합도 확인했겠다.

팀 분위기는 당연히 최고조.

우리 팀의 연승 가도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우디네세와 제노아를 각각 2-0, 4-0으로 셧아웃시키며 리그에서만 8연승.

수페르코파와 챔스까지 포함하면 무려 11연승이었다.

10월 중순이 지나도록 전승을 달리고 있는 팀은 전 유럽을 통틀어 딱 두 곳밖에 없었다.

우리와, 지난 시즌 트레블의 주인공 바르셀로나.

물론 같은 승률 100%지만 느낌은 확 달랐다.

펩 과르디올라 체제에서 2년 차를 맞은 바르셀로나는 한층 완성도 높은 티키타카를 구사하며 어떤 팀을 만나든 6 대 4, 심하게는 8 대 2까지 점유율을 가져가는 포제션 축구의 대명사였다.

그에 반해 우리는 점유율과 상관없이 지공과 속공을 상황에 맞춰 구사하며, 투톱의 출중한 득점력과 짠물 수비로 승리를 쟁취하는 스타일.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공통점이라면 딱 하나, ‘강하다’는 것뿐.

-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 난 답을 알아. 붙어 봐야 암 ㅋㅋㅋ

- 노잼 ㅡㅡ 나는 인터 밀란에 한표 던진다

- 당연히 바르샤지 ㅋㅋ 둘이 붙으면 점유율 90:10 나올 듯

- 바르샤 애무축구하다가 정백강한테 철퇴 맞고 질질 짤걸?

- 주세페 메아차면 인테르, 누캄프면 바르샤 ㅇㅇ

- 주세페 메아차가 아니고 산시로거든?

- 아직도 AC 밀란 빠는 애가 있다고?

- 그러게 ㅋㅋ 인터랑 바르카 얘기하는데 밀란 빠들이 왜 끼누 ㅋㅋㅋㅋㅋ

- 됐고 솔직히 5:5 본다

- 나도 5:5. 진짜 붙어봐야 암, 이건.

- 그럼 나는 51:49. 어느 쪽이 51인지는 비밀ㅋ

- 이건 또 신개념 ㅂㅅ일세?

‘현 유럽 최강’ 떡밥은 한국 축구 커뮤니티에서도 엄청난 화제였다.

물론 싸우기만 더럽게 싸우고 결론은 절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9년 10월 20일.

우리와 바르셀로나는 챔스 조별리그 3차전에서 똑같이 3-0 완승을 거두며 이 소모성 논쟁에 또 한 번 기름을 활활 부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21일.

2009년도 발롱도르 최종 후보가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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