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것 참...
기분이 묘하다.
물론 이럴 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은가.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카카...
회귀하기 전에는 수십 억 광년 넘게 떨어진 별처럼 그저 바라만 보던 이름들.
이제는 거기와 나란히, 아니 어쩌면 더 높은 곳에 ‘정백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것도 한국인 최초로.
발롱도르 후보를 50명씩 뽑을 때는 박지승이나 설기윤 같은 선배들이 이름을 올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30명 체제로 바뀐 이후에는 내가 처음이다.
“어이고,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 축하한다, 이 녀석아.
“그 말 하려고 이 비싼 국제전화를 한 거야?”
- 발롱도르 아니냐, 발롱도르.
대사건이긴 한가 보다.
포츠머스에 입단했을 때도.
또 EPL과 세리에에서 득점왕 먹을 때도 축하 메시지 한 통 없었던 나의 베프 김석중이가 친히 전화를 해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통화를 마치고 석중이와 같이 축구를 하던 시절을 되돌아본다.
초등학교 때는 어땠더라.
아, 그때는 발롱도르가 뭔지도 몰랐구나.
좀 더 커서 중학생이 되자 나중에 크면 발롱도르를 받겠다는, 아주 큰 꿈을 품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쯤 발롱도르 위너가 루이스 피구 형님이었다.
피구 형님, 잘 사시려나.
생각난 김에 이따 연락이나 한 번 드려야겠다.
이후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좀 더 현실주의자가 되었더랬다.
소박하게 ‘프로 선수’가 되는 게 목표였지.
생각해보면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네.
심지어 트럭에 치이기까지 했으니.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거야.
애니웨이.
우리 팀은 나를 포함해 총 4명의 발롱도르 최종 후보를 배출했다.
나머지 셋은 세자르 형님, 마이콘, 그리고 에투.
물론 에투야 바르셀로나 시절의 활약이 더 크게 반영됐겠지만 말이다.
30명 중 4명이나 차지했건만, 정작 이 분야 1등은 따로 있었다.
그 팀은 당연히(?) 바르셀로나.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에 티에리 앙리, 즐라탄까지 무려 5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이상하게도 에투와 즐라탄은 자꾸 겹친다.
그리고 트레블 팀의 위엄이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할 수 있고.
까짓거.
올해 우리가 트레블하고 후보로 한 10명 올려보지 뭐.
못할 게 뭐 있겠는가.
나도, 이 정백강이도 여기까지 왔는데.
* * *
“어서 와요! 문타리는요? 같이 안 왔어요?”
“주차 마치고 금방 올 거예요. 정말 축하해요! 백강 씨. 선물은 저기다 두면 될까요?”
“엇,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안 돼요. 이따 뜯어볼 때까진 손대지 마세요.”
문타리의 피앙세 메나예 돈코르가 선물 상자를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타리 형, 그렇게 안 봤는데 벌써 변한 거야?
금이야 옥이야 하던 시절은 어디 가고 돈코르 씨가 짐을 들게 하다니.
이래서 남자란... 쯧쯧...
그러나 나의 오해는 단 2분 만에 해소되었다.
“백강! 축하해!”
“응? 그건 또 뭐야. 선물이 또 있어?”
“물론이지. 내 거 하나, 달링 거 하나. 같이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 달링이 따로 하나 하고 싶다고 해서.”
그놈의 달링, 달링, 우리 달링.
언제까지 이렇게 달달한가 지켜보겠어.
“근데 이건 뭔데 이렇게 커?”
“이따 뜯어보면 알아. 기대하라구. 틀림없이 맘에 들 테니까.”
오늘 날짜는 2009년 11월 3일.
무슨 날이냐 하면, 내 생일이다.
포츠머스에 있을 땐 조용히 지나갔었지만, 밀라노에서는 벌써 2년 차 아닌가.
나름 친구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생일파티라는 걸 한 번 열어보았다.
손님의 대부분이 항상 보던 얼굴들이라는 건 함정이지만...
이거, 너무 축구만 하고 살았나?
그나마 클럽 죽돌이의 저력(?)을 보여주며 여사친을 잔뜩 몰고 온 발로텔리가 아니었다면, 완전 남탕 잔치가 될 뻔했다.
어디 보자... 얼추 다 온 건가.
딩동-
‘응, 아냐’라고 외치는 듯한 초인종 소리.
그나저나 누구지?
더 올 사람이 있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밖에는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로시 씨? 여긴 어떻게...”
내게 엄청난 흑역사를 심어준 망할 디자이너 미켈레 시빌로티의 집사, 안토니오 로시였다.
역시나 말쑥한 정장 차림이다.
이 양반은 옷이 정장뿐인가.
“오늘 생일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시빌로티 씨가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지금 일 때문에 프랑스에 가 계셔서 제가 대신 전달하러 왔습니다.”
“정말이요? 생각도 못했는데... 일단 들어오시죠.”
예의상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들어오라고 하긴 했는데,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으시려나 모르겠다.
“저긴, 뭘 하는 건가요? 카드가 있는 것 같은데요?”
로시가 가리킨 곳에는 연장자 축에 드는 사네티 주장과 코치 몇 명이 포커를 하고 있었다.
“아, 포커 중인데. 같이 즐기실래요?”
나의 제안에 바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로시.
“앞으로... 대략 두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겠군요. 좋아요, 그렇게 하죠.”
힐끗 보니 로시의 얼굴을 확인한 주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로시의 얼굴과 함께 탱크톱의 기억이 또 떠오르셨나 보군요, 주장.
그 기분 이해합니다...
“요! 요! 요! 요!”
한쪽에선 광란의 댄스 파티가 한창이었다.
이 괴상망측한 추임새의 주인공은 에투.
음악이 곧 에투고 에투가 곧 음악인 물아일체의 경지에 빠져든 듯했다.
정말 캐릭터 하나는 독보적이라니까.
“백강! 뭐해? 같이 춤추자! 오늘은 존나 개쩌는 너의 날이잖아! 요! 요! 요! 요!”
그렇게 이상한 소리 지르면서 춤추는 게 나의 날이라면 사양할래.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했는데 나한테 말만 걸어놓고는 다시 음악과 한 몸이 되는 에투였다.
“하하하, 정말요? 저도 그 밴드 좋아해요. 언제 한 번 같이 가시죠? 티켓은 당연히 제가 살게요. 아니면 힘을 좀 써서 만나게 해 드릴 수도 있긴 해요. 그 레이블 대표랑 좀 아는 사이거든요. 저도 나름 유명인사라서요. 하하하.”
에투는 좀 이상하긴 해도 순수한 맛이라도 있지.
제일 가증스러운 건 스네이더다.
우리랑 있을 땐 과묵 그 자체더니,..
여자와 술이 있으니 이건 뭐 픽업 아티스트가 따로 없다.
근데 스네이더, 애 딸린 유부남인데.
저래도 되나?
“자! 그럼 대망의 선물 개봉을 해볼까요?”
시원시원한 성격의 돈코르가 박수를 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어디 보자.
“내 건 가장 마지막에 해야 돼! 알았지?”
문타리가 어린애처럼 보챘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이길래 저러나.
그럼 일단 제일 작은 것부터.
시계네?
차는 좋아하지만 시계는 별 관심이 없어서 봐도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와우, 바쉐론 콘스탄틴! 그거 비싼 거야. 어? 이거 한정판 아닌가? 나도 이거 갖고 싶었는데 너무 귀한 거라 구하질 못했어.”
시계를 좀 아는 남자 루시우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귀한 물건이었어?
“이거 선물해주신 분이 누군가요?”
“시빌로티 씹니다! 전 세계에 20대밖에 없는 물건이죠.”
포커 삼매경에 빠져 있던 로시가 손을 번쩍 들며 대답했다.
“출시가는 한 30만 유로 정도 했을 텐데. 지금은 돈이 있어도 못 사는 물건이야.”
덧붙이는 루시우.
크헉.
30만 유로면 5억 원이 넘는다.
시빌로티 아저씨가 통이 크시네.
그래도 패션쇼에 선 보람이 생기긴 했다.
이어서 장갑, 와인, 향수, 목걸이 등등 명품 선물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 다들 잘 버는 처지다 보니, 선물도 하나같이 값어치 있는 것들이다.
정말 돈은 일단 많고 볼 일.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타리의 차례가 왔다.
어우, 뭐가 이렇게 무거워?
상자를 벗기자 실크 보자기에 싸인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와! 진짜 대박이야. 캭캭캭! 문타리 너 진짜 멋있는 놈이구나?”
에투의 격한 리액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문타리의 선물은...
나의 흉상이었다.
“이래 봬도 제작 기간이 한 달이 넘어.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했지.”
문타리의 두 눈이 자랑스럽게 반짝거렸다.
이렇게 뿌듯해하는데 화를 낼 수도 없고.
“고.마.워.”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근데 너무 안 닮은 거 아냐?
“저런 건 어디서 제작해? 내 것도 하나 만들고 싶은데. 거실에 장식해두게.”
“이리로 와봐. 연락처 알려줄게. 내 이름 대면 좀 저렴하게 해줄 거야.”
나르시시즘의 끝판왕인 발로텔리가 진지하게 묻자 문타리가 한쪽 구석으로 그를 끌고 갔다.
무슨 시트꼼 찍니?
아이고 두야.
“이건 말도 안 돼!”
흉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포커에 열중하던 주세페 바레시 수석코치가 비명을 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칩이 비교적 고르게 분배되어 있었는데.
지금 보니 로시 빼고 다 개털이다.
집사가 아니고 타짜셨군요.
정말 다이내믹하고 즐거운 생일파티다.
아이 행복해!
* * *
8월에 일찍 밀란을 만난 이후 약체만 줄줄이 상대했던 리그 일정.
이제 이기기도 지겨워질 때쯤, 드디어 좀 붙어볼 만한 상대를 만났다.
리그 2위 로마가 그 주인공.
사실 시즌 초반만 하더라도 로마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개막전인 제노아 원정에서 2-3 패배, 홈 첫 경기인 유벤투스전에서도 1-3 완패.
가뜩이나 스타트부터 꼬였는데,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이 사임까지 해버렸으니.
이는 로셀라 센시 구단주와 스팔레티 감독의 곯고 곯은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다.
지난 시즌 6위라는 탐탁잖은 성적표를 받아 들어야 했던 로마 팬들은 ‘올해도 글렀구나’라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구세주가 등장했으니.
지난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유벤투스에서 경질당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긴급 소방수로 투입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번 시즌 최종적인 목표는 챔피언스리그 직행 티켓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라니에리의 취임사를 해석하면 ‘최소 3위 안에 들겠다’는 이야기.
당연히 누구도 곧이듣지 않았다.
그 이후로 파죽의 9연승을 거둘 때까지는 말이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로마는 그렇게 순식간에 우승후보로 급부상했다.
상승세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의 부활이었다.
리그 26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던 2006-2007 시즌 이후 토티는 하락세에 접어들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후 2년 간 14골, 13골에 그쳤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의 토티는 뭔가 달랐다.
11라운드까지 무려 8골을 폭발시키며 제2의 전성기를 맞는 중.
토티의 투톱 파트너인 미르코 부치니치 역시 6골로 그에 못지않게 좋은 득점 감각을 뽐내고 있었다.
“기세가 좋은 팀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껄끄러운 일이다. 특히 그 팀의 에이스가 토티라면 더욱 그렇다.”
무리뉴 감독의 얌전한(?) 인터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인데.
이에 대한 라니에리 감독의 답변이 아주 걸작이었다.
“리그 유일의 전승팀을 상대한다는 건 언제나 공포스러운 일이다. 특히 그 팀의 에이스가 정백강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리뉴 감독이 엄살을 피웠다면, 라니에리 감독에게서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번 시즌 회춘한 토티가 8골을 넣는 동안, 나는 16골을 욱여넣고 있었으니...
이탈리아 전역에 ‘정백강 경보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둘 중 한 팀의 연승 행진은 멈출 수밖에 없는 대결.
모든 이탈리아 축구팬들의 관심이 로마의 유서 깊은 홈구장 스타디오 올림피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