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64화 (65/176)

64화

2009년 11월 8일 오후 6시.

로마의 저녁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그리고 몸을 풀고 있는 로마 선수들에게서도 날씨 못지않게 싸늘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의외인걸.

연승 때문에 잔뜩 들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보단 앞으로 상대해야 할 ‘리그 최강 빌런’ 인테르에 대한 경계심이 더 커 보였다.

“오우, 시발. 쟤네 표정 왜 이렇게 살벌하냐. 오늘 경기 개빡세겠는데?”

경험이 풍부한 에투도 본능적으로 느낀 듯했다.

이렇게 냉정한 상대는 이기기 어려운 법.

강자 입장에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미친 척 달려들거나,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바짝 쫄아 있는 쪽이 훨씬 편하다.

Roma Roma Roma-

Core de 'sta città-

웅장한 로마 응원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킥오프.

“아이고, 드디어 만났네.”

“그러게. 요즘 활약이 엄청나던데? 팀도 연승 중이고.”

“너만 하겠냐. 솔직히 지난 경기 때 일부러 옐로카드 받을까 고민했었어. 그랬으면 경고 누적으로 오늘 쉴 수 있었거든. 양심상 차마 그렇게는 못했지만 말야.”

“에이, 엄살 부리시네.”

“엄살은 네가 부리는 거지. 11경기에서 16골 넣고 있는 애가... 네가 사람이냐?”

나의 마크맨은 니콜라스 부르디소.

지난 시즌까지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지만, 루시우가 우리 팀에 합류하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야 했다.

그래도 워낙 클래스가 있고 세리에라는 리그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선수라, 로마로 적을 옮기자마자 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맹활약 중.

최근 5경기 연속으로 실점이 없는 로마 수비의 핵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오늘 나에 의해 무실점 기록은 깨질 예정이었지만.

“자신 있게 하자! 자신 있게!”

최전방에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가 있다면, 중원에는 ‘로마의 황태자’라고 할 수 있는 다니엘레 데 로시가 있었다.

1983년생이니 올해 나이 스물여섯.

완연한 전성기에 들어선 데 로시의 표면적인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

그러나 실제로는 공수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육각형 미드필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뻐엉-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데 로시가 4백 라인 바로 앞에서 시도한 장거리 로빙 스루패스가 절묘하게 휘어져 들어갔다.

공의 움직임을 따라 페널티박스로 진격하는 미르코 부치니치.

부치니치는 186cm의 장신에 발기술과 센스까지 갖추고 있어, 살짝 과장하면 거의 토티만큼이나 까다로운 선수였다.

무릎 부상에서 회복하여 간만에 선발로 나선 왈테르 사무엘 형님이 부치니치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무엘 형님은 2000-2001 시즌 로마가 18년 만에 스쿠데토를 차지했을 때의 우승 멤버.

대단한 영광을 함께 했던 팀을 적으로 다시 만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도 포츠머스를 한 번 만나고 싶긴 한데.

내가 떠난 뒤 팀이 영 시원치 않아서... 흠흠.

아아아-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로마 선배 사무엘을 맞이한 부치니치의 선택은 다이렉트 하프발리슛이었다.

최근 잘나가는 팀의 기세를 반영하듯 날카로운 코스로 날아간 공은 세자르 형님의 손끝에 걸리며 골라인을 넘어갔다.

경기 첫 유효슈팅은 홈팀 로마에게서 나왔다.

녀석들, 쫌 하네?

“아, 왜 또 나한테 와. 저리 가, 훠이훠이.”

“서운하게 왜 이러시나. 오랜만에 만났잖아. 그렇게 나랑 있는 게 싫어?”

“몰라, 마음대로 해.”

세트피스를 위해 올라온 부르디소가 입술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전담 수비로 내가 붙은 이상 골 넣기는 글렀으니 짜증을 낼 만도...

그리고 토티의 코너킥은 예상대로 부르디소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내가 처리할게!”

놀라운 체공력을 과시하며 날아올라 공을 끊어내는 루시우.

사네티 주장이 루즈볼을 잡자마자 곧바로 역습을 시도했다.

역습의 첨병은 수비에 가담하지 않고 전방에서 기회를 엿보던 에투.

직접 드리블하며 전진하던 주장이 상대 수비 뒷공간으로 롱패스를 떨궈 주었다.

로마의 오른쪽 풀백 마르코 카세티와 에투의 치열한 경주.

스타트는 분명 카세티가 먼저 끊었지만, 스피드 하면 에투 아니겠는가.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줄리우 세르지우 골키퍼가 뛰어나왔다.

그대로 태클 시도.

퍼어억-

삽시간에 벌어진 세 선수의 충돌.

“끄아악! 시발! 시이발!”

그리고 처절한 비명.

에투가 발목을 붙잡은 채 잔디 위를 뒹굴었다.

* * *

리그 선두와 2위의 대결.

승점 3점 이상이 걸린 큰 경기에서 주전 스트라이커의 이탈.

그리고 그 대체자가...

“너 어제 또 늦게까지 술 마셨지?”

“...”

어차피 후보로 밀린 김에 더 방탕하게 살고 있는 발로텔리라니.

딱 봐도 얘 상태 메롱인데...

어쩔 수 없네.

아무래도 이 경기는 내가 캐리해야겠다.

에투의 부상으로 인해 분위기가 한층 뜨거워진 스타디오 올림피코.

전반적인 주도권은 로마가 계속 쥐고 나갔다.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해줘야 할 스네이더가 데 로시한테 완전히 호구 잡혀버린 게 컸다.

역시 9연승 기록은 고스톱 쳐서 딴 게 아니었어.

이런 중원의 우위를 등에 업고 드디어 그 남자, 토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비드 피사로와의 2대 1 패스를 통해 캄비아소의 압박을 벗겨낸 뒤 중거리포.

뒤에서 볼 땐 분명 가볍게 찬 것 같았는데, 힘이 충분히 실린 살벌한 슈팅이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다 올라가!”

세자르 형님의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골킥.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부르디소는 경합 따위는 진작에 포기하고 뒤로 약간 물러나 있었다.

쓸데없는 체력 소모는 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대로 스네이더에게 헤더 패스를 연결했다.

기다렸다는 듯 즉각적으로 달려드는 데 로시.

이 정도면 오늘 밤 스네이더 꿈에 나올 기세다.

“마리오!”

태클에 막히기 직전에 스네이더가 재빨리 왼발로 찔러준 스루패스.

정상 컨디션의 발로텔리였다면 충분히 잡고도 남았을 공이지만 멍때리다가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내가 어지간하면 팀원들한테 뭐라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도저히 못 참겠다.

“야, 마리오! 뭐해! 집중 안 해?”

“...”

투입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뚱한 얼굴로 입을 꾹 닫고만 있는 발로텔리.

괜히 건드렸나?

어째 불안한 느낌이...

삑삑- 삐비빅-

아, 망했어.

벤치에서 무리뉴 감독이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 *

투입된 지 딱 5분 만에 시원스러운 백태클 한 번으로 레드카드를 획득한 발로텔리.

게다가 그 태클의 대상이 옛 동료 부르디소였다.

자기도 잘못한 건 아는지 주심에게 항의 한 번 하지 않고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이제 10명이 뛰어야 하는 상황.

무리뉴 감독은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있던 스네이더를 중앙으로 끌어내리고 4-1-3-1 포메이션으로 전환했다.

전반전 남은 시간은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안 그래도 불리한 양상이었는데 수적 열세까지 겹쳤으니...

우리 4백의 몸을 던진 수비가 아니었다면 자칫 45분 만에 승부가 결정될 뻔했다.

하프타임.

라커룸 분위기는 당연히 엉망이었다.

대역죄인 발로텔리는 한쪽 구석에 박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원체 시한폭탄 같은 녀석이지만 하필 오늘 그럴 줄은 몰랐다.

에투의 갑작스런 부상이 불러온 생각도 못한 나비효과.

“자, 모두 긍정적인 부분에 집중하자. 일단 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이런 경기는 비기더라도 충분히 만족이다.”

무리뉴 감독이 풀죽은 제자들을 격려했다.

“하비에르.”

“네, 감독님.”

“후반전에 오버래핑은 최대한 자제해라. 혹시 마이콘이 올라가도 최소 3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사네티 주장에게는 수비에 전념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웨슬리는 공을 잡으면 일단 마이콘 쪽을 봐주고,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백강의 머리를 노려라. 점유율은 포기해도 좋다.”

“네.”

내 생일파티에서 슈퍼 달변가로 변신했던 스네이더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백강.”

“말씀하시죠.”

“연계고 뭐고 필요 없다. 어차피 공격진엔 너밖에 없으니까. 그냥 네게 오는 모든 공을 슈팅으로 연결해.”

두드리면 열린다, 뭐 그런 작전입니까?

하긴, 다른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긴 하다.

“알겠습니다.”

* * *

이예에-

로마 팬들의 환호성이 전반전 때보다 한층 더 커졌다.

아직 0-0이건만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한 반응.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한테 한 번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마리오 그 미친 새끼, 언젠가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다니까.”

폭행 피해 당사자로 로마에 크게 기여한(?) 부르디소가 이를 갈았다.

“다치진 않았어?”

“찰과상만 입었어. 태클이 조금만 더 깊었으면 발목이 아작났을지도 모르겠다.”

“그것 참 다행이네. 혹시 내가 골을 넣어도 죄책감이 덜하잖아. 부상자한테 이겼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거든.”

살짝쿵 신경을 건드리자 부르디소가 인상을 찡그렸다.

“진심이야? 지금 11 대 10이야, 백강. 후반 45분이 통으로 남았고. 안됐지만 오늘 경기는 우리가 잡았어.”

자, 이게 바로 정백강식 심리전의 첫 번째 스텝.

일단은 성공적이다.

“자! 끝내러 가자!”

킥오프 직전 파이팅을 외치며 사기를 끌어 올리는 로마의 주장 토티.

1998년도에 주장이 됐으니 벌써 10년 넘게 팀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든 버티자!”

주장 경력이라면 1999년부터 완장을 찬 우리 사네티 주장도 크게 밀리진 않는다.

그야말로 ‘주장계의 고인물’들.

휘슬과 함께 킥오프.

후반 시작과 동시에 로마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의 생각은 명확해 보였다.

‘어떻게든 한 골만 넣자’는 것.

전반전부터 10명이 뛰느라 이미 평소보다 지친 몸 상태.

게다가 원정 경기.

일단 실점하는 순간 심리적으로 와르르 무너질 공산이 컸다.

잔뜩 신이 난 데 로시는 아예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까지 올라가서 패스를 뿌리고 슈팅을 날려댔다.

양쪽 풀백인 카세티와 욘 아르네 리세도 거의 윙어처럼 플레이하는 중.

루시우와 사무엘 형님이 아무리 뛰어난 센터백이라도 90분 내내 동일한 집중력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루시우가 낙하지점을 잘못 판단하며 리세의 크로스를 놓쳤고, 그 빈틈을 파고든 토티가 1:1 찬스를 맞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 팀 최후의 보루인 세자르 형님의 정신 나간 선방이 나왔다.

노련한 토티가 다리 사이로 깔아 찬 땅볼 슈팅.

모두가 골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세자르 형님이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무릎으로 공을 막아낸 뒤 곧바로 덮쳤다.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토티가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로 길게 주세요!”

위기 뒤에 기회가 오는 법.

잔디 위에 무인도처럼 외로이 떠 있는 나를 향해 세자르 형님의 장거리 골킥이 날아왔다.

나는 감독의 지시에 충실한 사나이.

콰앙-

30m 거리에서 날린 중거리 헤더슛을 세르지우 골키퍼가 쉽게 잡아냈다.

5분 동안 시달리던 우리의 공격은 딱 10초 만에 깔끔하게 마무리.

“백강, 뭐야? 실망인데. 그렇게 해서 골을 넣겠다고? 미안하지만 우리 수비진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아까의 도발 때문에 아직도 빈정이 상해 있던 것일까.

부르디소가 나를 비웃고 나섰다.

디소 형, 이게 바로 큰 그림, 영어로는 ‘빅 픽처’라는 거야.

두고 보라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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