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65화 (66/176)

65화

콰앙-

퍼엉-

피융-

“백강, 혹시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지?”

“장난이라니. 난 매우 진지해. 그리고 이거 감독님 지시사항인데?”

“그래? 내가 떠나고 나니 무리뉴 감독이 좀 이상해졌구나.”

세상 허무한 헤더 슈팅만 벌써 4개째.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후반전도 어느덧 20분이 넘어간 시점.

경기장 안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에투의 부상과, 이어지는 발로텔리의 퇴장 때만 하더라도 승리를 확신했었던 로마 팬들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했다.

금방 열릴 것만 같았던 우리 골문의 빗장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던 것.

그동안 팀의 압도적인 전력 덕분에 꿀 많이 빨았던(?) 세자르 형님이 ‘인생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터엉-

거기에 골대 러시는 덤.

크로스바와 골포스트에 맞은 슈팅이 후반전에만 4개나 되었다.

‘골대 맞히면 진다’는 속설이 항상 맞는 건 아니지만, 맞힌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그렇게 날이 서 있다던 로마의 공격수들이 오늘만큼은 마지막 한 끗을 넘기지 못하며 고전 중이었다.

보다 쫄깃한 경기를 위해 자체 밸런스 패치라도 들어간 듯한 모습.

예상외로 잘 버티고 있는 가운데 무리뉴 감독은 선수교체를 단행했다.

스네이더를 불러들이고 문타리를 투입했다.

중원에서의 창의성을 좀 포기하는 대신, 활동량 좋은 선수를 넣어서 수비에 힘을 싣겠다는 생각으로 보였다.

감독님, 정말 무승부로 만족하시는 겁니까?

저는 싫은데용.

세리에 득점왕 자존심이 있지...

“와... 미치고 팔짝 뛰겠네. 저 형 오늘 대체 왜 저래?”

내 헤더 슈팅을 구경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 거의 개점 휴업 상태인 부르디소가 탄식을 내뱉었다.

사각지대를 제대로 노린 프란체스코 토티의 오른발 슈팅이 또 한 번 세자르 형님의 펀칭에 막혀 골라인을 넘어갔다.

그야말로 ‘야신의 재림’.

안 풀리는 경기가 답답했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쉰 토티가 코너킥을 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거, 코너킥 횟수도 체감상 20번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

골을 바라는 홈팬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코너킥이 왈테르 사무엘 형님의 머리에 맞고 공중에 높이 떴다.

뻐어엉-

떨어지는 공을 냅다 후린 다니엘레 데 로시의 중거리포.

소리가 아주 살벌했다.

발등에 제대로 얹힌 슈팅을 엉덩이로 막아내는 루시우.

어우, 저건 진짜 아프겠다...

정신없는 혼전 끝, 최후에 공을 따낸 사람은 문타리였다.

“백강!”

흐름이 느껴진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 같다.

일발 역전을 할 수 있는 딱 한 번의 기회 말이다.

이제 앞서 뿌려놓았던 떡밥들에 변주를 줄 차례.

당장이라도 점프를 할 것처럼 하체에 바운스를 주었다.

지금 부르디소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이런 알람이 울리겠지.

- 또 헤더슛이네? 지겹기도 해라.

사람인 이상 어쩔 수가 없다.

발로텔리 퇴장 이후로는 줄곧 그짓(?)만 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공중으로 뛰어오르지 않았다.

대신 몸을 빙글 돌려 앞으로 질주.

미안해, 디소 형.

페이크였어.

물론 부르디소가 나보다 발이 빠른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심리적 허점을 완벽하게 찌른 상황.

순간적으로 방심한 부르디소보다 내가 한발 빨랐다.

“줄리우! 나와야 돼!”

빠르게 현재 상황을 파악한 부르디소가 뒤늦게 나를 따라오면서 줄리우 세르지우 골키퍼를 불러냈다.

딱 그 타이밍에 땅에 떨어지는 공.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오른발을 뻗었다.

터엉-

됐다, 닿았다.

떨어진 자리에서 공이 똑바로 떠올랐다.

“아냐! 다시 들어가!”

이제서야 내 의도를 파악한 부르디소가 부르짖었다.

라임 좋고.

뛰쳐나오다가 황급히 다시 뒷걸음질 치는 세르지우.

이미 늦었단 말씀이지.

콰앙-

내가 직접 띄워서 내 이마에 맞힌 ‘셀프 헤더슛’이 빠른 속도로 골문 안쪽을 향해 날아갔다.

* * *

삑- 삑- 삑--

경기 종료 휘슬과 동시에 나를 포함한 우리 팀 10명 전원이 그대로 잔디 위에 누워 버렸다.

천신만고라는 표현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진짜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후반 27분 터진 나의 선제골은 그대로 결승골이 되었는데, 남은 20분 동안의 수비는 정말 처절 그 자체였다.

완벽한 자물쇠 모드를 가동하라는 무리뉴 감독의 지시에 따라 나까지 수비하러 내려갔고, ‘9백+세자르 형님’으로 구성된 10명의 결사대는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로 로마의 예봉을 꺾었다.

“너 이눔의 자식!”

치밀한 낚시에 걸려 결승골을 헌납한 부르디소가 잔디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어때? 작전 좋았지?”

“그 머리, 강력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두뇌도 좀 쓴다 너?”

“너는 단순해서 속이기 쉽... 농담이야, 농담.”

부르디소의 얼굴에 순간 스친 살기를 확인하고는 급히 수습에 나섰다.

“됐고, 유니폼이나 줘.”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유니폼 교환이야.”

“은퇴하고 생활 어려워지면 팔려고. 실착 유니폼은 가격이 좀 나가거든.”

“에이, 그래. 기분이다. 가져가슈.”

[인테르, 로마 원정서 1-0 진땀승... 리그 독주체제 완성]

[부상, 그리고 퇴장... 숱한 악재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인테르의 투혼]

[세자르 막고, 정백강 넣고... 공수에서 존재감 뽐낸 발롱도르 후보들]

- 정백강 골 센스 지려버렸다 ㄷㄷ

- 레알 ㅋㅋㅋ 거기서 키퍼 나온 거 보고 헤딩이라니. 창의력 대장이다 진짜 ㅋㅋ

- 아직도 발전하는 정백강!

- 개인적으로 정백강 골 중에 제일 멋있었음

- 에이, 정백강 하면 그래도 0809 밀란더비 초장거리 헤딩슛이 짜세지 ㅋㅋㅋ

- 미안 ㅋㅋ 그거 까먹고 있었다. ㅇㅈㅇㅈ

- 정백강 졸라 빠네 진짜 ㅋㅋㅋ 메신이었으면 거기서 골키퍼까지 제쳤지 ㅉㅉㅉ

- 골키퍼 제끼고 넣으면 뭐 예술점수라도 주냐? ㅋㅋㅋㅋㅋ

- ㅂㅅ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 팝콘 가져왔다.. 싸움구경엔 역시 팝콘이지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벌어진 90분 간의 혈투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승리했으니 해피엔딩...이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나와 함께 팀 득점의 대부분을 책임지던 에투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정밀검사 결과 발목 인대가 심하게 파열된 것으로 나타났다.

결장 예상 기간은 최소 4개월.

순탄하게 달려온 우리 팀의 2009-2010 시즌 여정에 처음으로 등장한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 *

따르릉-

아오, 누가 개념 없게 새벽 6시에 전화질을... 할 사람이 문타리밖에 없지 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야, 아무래도 팀에 마가 꼈나 봐. 지금 웨슬리 기사 때문에 난리도 아냐.”

“웨슬리? 걔가 왜? 사람이라도 때렸대?”

“기사 한 번 찾아봐. 어, 달링. 깼어? 미안해. 금방 갈게. 뭐? 일어난 김에? 흐흐흐... 알았어. 백강, 미안하다. 엄청 급한 일이 생겨서 끊을게.”

이것들이 정말...

지금 자는 사람 깨워놓고 뭐하는 짓거리야?

순간 짜증이 확 솟으면서 잠도 달아나 버렸다.

아, 훈련 없는 날엔 최소 14시간은 자야 되는데...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난리람?

곧바로 스네이더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인테르의 스타 미드필더 웨슬리 스네이더, 알고 보니 불륜남?]

[파파라치가 포착한 스네이더의 내연녀는 누구?]

[결혼 4년만에 위기 맞은 스네이더 부부... 이혼시 추정 위자료는 얼마?]

아오, 진짜...

내 생일파티에서 처음 보는 여자한테 수작 부릴 때부터 알아봤다.

에투가 그렇게 돼서 가뜩이나 우울한데 왜들 이러세요.

대체 왜?

* * *

“정말 죄송합니다.”

기사가 터진 이튿날 초췌한 몰골로 훈련장에 나타난 스네이더가 무리뉴 감독과 코치진, 그리고 동료들에게 사과했다.

“아니 뭐 죄송할 것까지야...”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해는 한다.”

사실 축구선수들의 불륜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돈 많겠다, 힘 넘치겠다, 여자 꼬이기에는 최상의 직업이긴 하지...

살인 강도 방화 같은 중범죄도 아니고 말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구단 입장에서는 ‘축구만 잘하면’ 개인사에 대해서 터치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작은 소동으로 넘어가나 싶었지만, 일은 그리 간단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내연녀와의 관계가 이미 레알 마드리드 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분노한 부인이 즉각적으로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자업자득에 인과응보였는데, 문제는 이 시점부터 스네이더가 ‘축구를 못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스캔들 이후 첫 게임인 아탈란타 원정에 선발 출전한 스네이더는, 인테르 합류 이후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40분 만에 교체되는 수모를 맛봤다.

전반전도 다 못 뛰었을 정도니 얼마나 못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터.

그다음 경기인 라치오전에서는 후반전에 교체로 나섰으나, 여전히 경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폭발한 무리뉴 감독은 이어지는 볼로냐전에서 스네이더를 출전 명단에서 제외하는 강수를 뒀다.

정백강-에투 투톱에 스네이더가 뒤를 받치던 인테르의 막강 공격진 중 두 명이 순식간에 나가리된 상황.

물론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내가 있긴 했지만,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경기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드디어 깨진 인테르의 연승! 아탈란타 상대로 1-1 무승부]

[‘무적함대’ 이상징후 보인다? 인테르 1-1 라치오, 리그 2연속 무승부]

[무승부의 늪에 빠진 인테르... 볼로냐 원정서 졸전 끝 0-0... 개막 첫 무득점 경기 펼쳐]

12연승 기간 동안 경기당 2.9골을 때려 박던 ‘폭군’ 인테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활발한 침투로 나에 대한 수비를 분산시켜 주던 에투가 없으니, 이제 상대 수비진은 죽어라 나만 붙잡았다.

상상 이상의 집중 견제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2골을 넣긴 했으나, 아예 나한테 전담 수비수 2명을 붙이는 6백 전략을 들고나온 볼로냐의 벽을 넘진 못했다.

덩달아 나의 연속 득점 기록도 끝.

지난 시즌만 하더라도 에르난 크레스포나 훌리오 크루스 같은 스트라이커들이 출전 기회를 못 받을 정도로 빵빵했던 공격진이었건만...

지금은 모두 다 팀을 떠나고 없다.

에투의 공백을 메워줘야 할 발로텔리는 로마전 퇴장으로 인해 2경기 출장 금지 징계를 받고 아탈란타전과 라치오전에선 아예 나오지도 못했다.

그리고 볼로냐전에서 경고 누적 퇴장.

복귀하자마자 또 퇴장당하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룩했다.

우리가 3연무를 캐며 헤매는 동안, 리그 2위 로마는 3연승의 휘파람을 불었다.

한때 9점 차까지 벌어졌던 승점 차는 이제 고작 3점.

일이 안 풀리려고 그러는 것일까.

리그 상황이 이토록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하필이면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날 다음 상대가 레알 마드리드였다.

현재 우리 팀이 속한 C조의 상황은,

인테르 : 4승, 승점 12점

레알 : 3승 1패, 승점 9점

마르세유 : 1승 3패, 승점 3점

취리히 : 4패, 승점 0점.

물론 16강 진출은 이미 확정지은 상황이었으나 문제는 몇 위로 올라가냐에 있었다.

만약 이번에 레알에게 패한다면 승점 동률.

그리고 마지막 경기는 난이도 차이가 많이 났다.

우리는 껄끄러운 마르세유 원정, 레알은 최약체 취리히와의 홈 경기를 남겨둔 상태.

공이 둥글다지만 레알의 실질적인 승점은 최소 12점으로 보는 게 타당했다.

이번 시즌 트레블을 노리는 우리로서는, 할 수만 있다면 조 1위로 올라가는 게 베스트.

에투 없이 16강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 더더욱 1위가 간절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경기를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감독을 하는 가장 큰 기쁨이다. 필승의 각오로 임하겠다.”

인터뷰는 그럴듯하게 했지만 무리뉴 감독의 속도 타들어가고 있으리라.

유일한 위안거리라면 홈 경기라는 것.

주축들의 이탈로 만신창이가 된 인테르와, 복수를 노리는 레알이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의 한판 승부를 앞두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