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명성이 사실이었네요. 제일 빨리 오셨어요.”
에투의 아내인 조르젯 에투가 문을 열어주며 생긋 웃었다.
170cm이 훌쩍 넘는 키에 8등신 비율.
자애로워 보이는 미인형의 얼굴.
그리고 성격은 전형적인 요조숙녀 스타일.
인테르 대표 망나니인 에투와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짝이다.
흘러간 유행가 하나가 생각난다.
제목이 뭐더라... 그래 맞아.
<반대가 끌리는 이유>였어.
“제가 빠른 게 아닙니다. 다른 친구들이 게으른 거죠.”
“어머, 농담도 잘하시네요.”
응? 농담 아닌데.
“사무엘 상태는 좀 어떤가요?”
“요즘 감정이 좀 격해요. 조울증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엄청나게 즐거워 보이다가도 금방 우울해지곤 하죠. 걱정이에요.”
부상이란 걸 모르고 살아온 나지만, 그래도 축구선수니까 에투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새 팀에 막 적응해서 날개를 펴려고 하는 시점에 4주도 아니고 4개월짜리 장기 부상을 끊어 버렸으니.
“백강, 내 얘긴 나한테 직접 물어봐야지 왜 아내한테 물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깁스에 목발까지 중무장을 한 에투가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안 물어봐도 상태 알겠네.”
“이봐, 동정하지 말라고. 나는 멀쩡하니까.”
“어이고 무서워라. 그나저나 어쩐 일로 초대를 다 하셨대?”
“왜긴 왜야?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해서 그러지.”
그럴듯한 이유라도 만들어낼 줄 알았는데.
솔직담백한 게 딱 에투스럽다.
에투와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른 손님들이 속속 도착했다.
항상 만나는 지겹고도 반가운 얼굴들.
“메나예, 어서 와.”
“보고 싶었어.”
“우리 어제도 봤는데?”
“그러게. 우리 이참에 같이 살까?”
특히 조르젯과 돈코르는 서로 꼭 끌어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저 둘은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
나의 물음에 문타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둘이 통하는 게 많잖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
조르젯은 코트디부아르, 그리고 돈코르는 가나 사람.
같은 아프리카 대륙 출신에 서로의 남편과 약혼자는 같은 팀에서 뛰는 축구선수.
성격만 잘 맞는다면 여러모로 좋은 친구가 될 만한 요소를 갖췄다.
“오늘은 프랑스 요리를 준비했어요. 요리사를 부를까 했는데 그냥 직접 만들었거든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식당으로 손님들을 안내한 안주인 조르젯이 수줍게 말했다.
“맛은 내가 보증하지. 우리 아내가 프랑스에 오래 살아서 프랑스 요리 하나는 기가 막힌다구.”
흐뭇하게 웃는 에투.
카메룬의 흑표범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프랑스에 계셨다고요?”
“네, 어릴 때 이민 가서 거의 10년 넘게 살았어요. 사실 남편도 거기서 만났고요.”
그때 돈코르가 호들갑을 떨며 끼어들었다.
“에투 씨와 조르젯의 러브스토리, 얼마나 로맨틱한지 몰라요.”
“네?”
“으엑?”
“로맨틱요?”
“설마요!”
로맨틱이라니.
에투와 도무지 매치되지 않는 단어에 손님들이 일제히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거 반응이 왜들 이래? 나만큼 낭만적인 사람이 어딨다고?”
낭만이 아니라 남만족이겠지.
“도저히 못 믿겠는걸? 어디 한 번 들려줘 봐, 사무엘.”
네라주리의 일원이라면 거절하기 힘든 사네티 주장의 부탁.
잠깐 생각에 잠겼던 에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내를 만난 건... 그러니까 열다섯 살 때였네요. 와,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구나...”
에투가 기억을 더듬으며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소년 에투는 카메룬의 축구 클럽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프랑스 리그앙 소속인 낭트의 유스팀에 들어갈 기회를 잡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프랑스 땅을 밟은 에투.
그의 대리인은 최종 입단 테스트 전날, 머리를 좀 다듬고 가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실력이 물론 제일 중요하지만 인상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조언이 내 인생을 바꿨죠.”
외국에 온 건 처음이라 멀리 가긴 무섭고, 어차피 아는 곳도 없고.
아무 생각 없이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미용실에 들어갔는데...
“웬 천사가 저한테 인사를 건네더군요. 그게 조르젯이었죠. 첫눈에 반했어요.”
상남자 에투는 사랑도 무조건 직진이었다.
미용실 영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을 마치고 나오는 조르젯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과연 그녀의 대답은?
“사실은 저도 남편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막 두근거렸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거든요. 당연히 오케이였죠.”
그... 그래요?
조르젯의 증언을 들으며 정말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입단 준비를 하면서 한 2주 정도 조르젯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죠. 근데 그 썩을 놈의 낭트가...”
“여보! 입!”
“아... 미안...”
에투가 거친 말을 쓰자 바로 단속 들어가는 조르젯.
밖에서 그렇게 욕을 쓰는 이유를 이제 알았다.
집안에서 못 하는 스트레스를 푸는 거였구나.
“하여간 낭트가 갑자기 내 입단을 취소해 버렸어요. 순식간에 붕 떠버린 나는 카메룬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죠. 유럽 진출이 좌절된 것보다 조르젯을 볼 수 없다는 게 더 슬펐어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돈코르가 이 타이밍에서 또 끼어들었다.
“바로 이 부분이 하이라이트랍니다. 에투 씨가 얼마나 로맨티시스트인지 알 수 있어요.”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조르젯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남편은 카메룬에 돌아간 날부터 저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요.”
오. 마이. 갓.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에투가 매일매일 러브레터를 썼다고?
“어... 얼마나요?”
“마요르카 이적한 다음에 스페인에서 완전히 자리 잡기 전까지니까... 한 3년 정도 될 거야.”
“정확히 3년 2개월 14일이에요, 여보.”
“그걸 외우고 있었어?”
“죽을 때까지 안 잊을 건데요?”
갑자기 부부 사이에서 맴도는 핑크빛 기운.
“내가 2004년에 바르셀로나, 아니지. ‘옛날 팀’에 이적한 후에야 같이 살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8년 동안은 계속 장거리 연애였지. 아내는 프랑스, 나는 스페인에 있었으니. 그때 비행기를 얼마나 많이 탔는지... 지금은 다 추억이지.”
“제가 풍족하지 못한 형편이라서, 남편만 계속 왔다갔다 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참 미안하고 고맙죠.”
“에이, 무슨 그런 말을 해. 내가 좋아서 한 건데. 덕분에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렸잖아.”
어우, 귀가 녹아내릴 것 같다.
욕쟁이 에투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과묵해 보이던 스네이더가 알고보니 불륜남이었던 것도 그렇고.
역시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모두가 충격과 공포, 그리고 어쩌면 감동에 빠진 가운데, 손님들 중 홍일점인 돈코르는 눈물까지 흘렸다.
“몇 번을 들어도 너무 멋진 이야기에요.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들을 때마다 이런다니까...”
“어머, 메나예! 주책이야. 잠깐 기다려. 내가 티슈 갖다줄게.”
조르젯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옆에 앉아 있던 마이콘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백강, 문타리 표정 좀 봐.”
과연.
엉엉 우는 약혼녀를 위로하는 문타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타리 형, 큰일 났네.
때려죽여도 이 스토리는 못 이길 것 같은데?
* * *
2009년 11월 24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마드리드를 떠난 ‘하얀 사자 군단’이 밀라노로 진격해 왔다.
199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對) 인테르전 4연패 중인 레알 마드리드.
그 굴욕의 역사를 깨려면 오늘이 적기이긴 했다.
물론 내가 가만있진 않겠지만.
“마드리드에서 인테르의 연승 행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무패 기록도 깨줄 생각으로 우리가 이곳에 왔다.”
우리 팀의 최근 성적을 꼬집은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의 인터뷰는 꽤나 도발적이었다.
“나는 폐예그리니가 부럽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1-3으로 참패당했던 일을 이리도 빨리 잊을 수 있다니. 그래서 우리가 이기더라도 별로 미안하진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또 잊어버릴 것 아니겠는가?”
가뜩이나 팀 상황이 엉망진창인데 상대 감독이 긁어오자 짜증이 난 모양.
무리뉴 감독이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선발 명단이 공개된 후, 도박사들의 승부 예측은 레알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우리 홈 경기임을 감안하면 다소 충격적인 결과.
하지만 스쿼드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긴 했다.
4-3-3 포메이션을 가동하는 우리 팀의 3톱이 나와 문타리, 그리고 히카르두 콰레스마였으니...
문타리는 왼쪽 윙어를 볼 수 있긴 하지만 중앙에서 뛸 때 제 위력이 나오는 선수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약체인 포츠머스 시절에야 공격포인트도 꽤 기록한 바 있었으나, 인테르 이적 후에는 거의 수비적인 역할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속되게 표현하면 넣을 선수가 마땅찮아 ‘땜빵’으로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
오른쪽의 콰레스마는... 하...
딱히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그냥 [콰] 그 자체.
지난 시즌 겨울 이적시장 때 급히 윙어를 구했던 첼시로 임대를 갔으나, 거기서도 전혀 활약하지 못한 채 쓸쓸히 돌아왔더랬다.
첼시에서의 최종 기록은 5경기 출전해서 0골 0어시스트.
영입을 승인한 루이스 스콜라리 감독도, 경질당한 스콜라리의 후임으로 온 거스 히딩크 감독도 모두 콰레스마를 외면했다.
정말 어지간히 못했다는 이야기다.
발로텔리가 ‘복귀전 퇴장’이라는 신기원으로 무리뉴 감독을 개빡치게 만들지 않았다면 콰레스마가 선발로 나오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암담한 우리와 비교하면, 레알의 공격진은 막강 그 자체.
곤살로 이과인과 라울 곤잘레스가 투톱을 형성하고, 양쪽 날개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카카가 포진했다.
하락세인 우리 팀을 만만히 본 것일까?
원정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공격적인 전술을 들고나온 폐예그리니 감독이었다.
레알의 선수 구성에서 앞선 경기들과 눈에 띄는 변화를 하나 꼽자면 수비진 개편.
매우 공격적이고, 때로는 모험에 가까운 수비를 하는 세르히오 라모스가 극강 결정력의 사나이 정백강과는 궁합이 안 좋다고 판단했는지 오른쪽 풀백으로 돌렸다.
라모스를 대신하여 센터백 자리를 차지한 선수는 라울 알비올.
발렌시아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의 눈에 든 알비올은 1500만 유로(약 255억원)라는 적잖은 이적료로 올 시즌 레알에 합류했다.
190cm의 장신으로 라인 컨트롤, 위치선정, 공중경합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선수.
심지어 발까지 빨라서, ‘라리가 최고의 센터백은 알비올’이라는 평가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나의 미션은...
- 문타리와 콰레스마의 지원을 받으며 알비올과 페페를 뚫고 골을 넣을 것!
으...
경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숨이 턱 막혀 온다.
하지만 이럴 때 한 건 해주는 사람이야말로 슈퍼스타가 아니겠는가.
영웅은 난세에 등장한댔다.
백강아, 오늘 영웅이 한 번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