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67화 (68/176)

67화

우리 팀의 선축으로 전반전이 시작되었다.

“처음 만나는 거지? 잘 부탁해.”

“...”

여러모로 힘든 오늘 게임.

자주 부딪히게 될 라울 알비올을 입으로라도 좀 괴롭히려고 했는데 묵묵부답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내가 아니지.

“지금 무시하는 거야?”

“아이... 돈트... 잉글리쉬...”

아... 미안하다 야.

영어 되게 잘하게 생겼는데 못하는구나.

어떡하냐, 스페인어는 나도 모르는데...

그냥 입 닫고 축구나 열심히 해야 쓰겄다.

내가 언어의 장벽에 막혀 심리전에 실패하는 동안,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공을 잡았다.

“최대한 간결하게 플레이해라.”

경기 시작 전 콰레스마에게 무리뉴 감독이 한 지시는 딱 이거 하나였다.

하지만 선수의 스타일이란 게 어디 말 한마디로 바뀌는 것이던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듯(?) 드리블을 시작하는 콰레스마.

무리뉴 감독 복장 터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퍼억-

나의 옛 동료 라사나 디아라가 깔끔한 태클로 가볍게 공을 빼앗았다.

그동안 경기나 제대로 뛰었으면 몰라.

스마 형, 이런 높은 레벨의 게임에서 그런 묻지마 드리블이 먹히겠어요?

디아라가 끊어낸 공을 그대로 호날두에게 연결했다.

지난번에 괜히 입 털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굴욕만 당했던 호날두.

느낀 바가 있었는지 오늘 경기를 앞두고는 아무런 코멘트를 하지 않았었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마이콘과 호날두의 재회.

당시 마이콘은 호날두가 날뛰는 걸 제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 공격에서 제 몫을 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었다.

오늘은 과연 어떨지...

터엉-

오, 의외인걸?

호날두는 직접 돌파 대신 크로스를 택했다.

마이콘이 드리블을 의식하고 멀리 떨어져서 수비하자 무리하지 않고 킥으로 선회.

내가 누군가.

회귀 전후를 통틀어서 호날두라는 선수를 20년 가까이 봐온 사람 아니겠는가?

‘욕심부리지 않는 호날두’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해 보였다.

날두야.

너, 정말 이기고 싶구나?

이번 시즌 포텐이 만개하며 스페인 라리가에서 득점 랭킹 3위에 올라 있는 곤살로 이과인이 좋은 위치선정을 보여주며 헤더로 마무리했으나 골문을 크게 벗어났다.

세자르 형님의 골킥.

콰레스마 쪽은 가망이 없어 보이고... 문타리를 한 번 믿어볼까?

내가 헤더로 전달한 패스를 문타리가 가슴으로 트래핑했다.

곧바로 압박 들어가는 세르히오 라모스.

센터백으로 뛸 때도 엄청나게 과감하다고 생각했는데, 풀백 라모스는 훨씬 공격적이었다.

당황해서 황급히 뒤쪽으로 공을 돌리는 문타리.

그러나 패스가 너무 느슨했다.

사비 알론소의 깔끔한 인터셉트.

“문타리! 너무 얼어 있어! 릴랙스, 릴랙스!”

원래 큰 경기에서 긴장하는 경향이 있는 문타리.

오늘은 포지션까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보니 더욱 그래 보였다.

타리 형, 돈코르가 지켜보고 있어.

매일 편지는 못 쓰더라도 축구는 잘해야 될 거 아냐.

“카카 쪽이다!”

티아고 모타의 외침과 동시에 알론소의 스루패스가 오른쪽 측면으로 뿌려졌다.

경기장을 최대한 넓게 쓰고 있는 모습.

레알 공격진에는 호날두, 이과인, 라울 등 오프더볼 무브가 좋은 선수가 많았다.

지금 같은 횡패스에 너무 휘둘리다간 침투 한 방에 실점할 여지가 다분했다.

“라인 유지! 라인 유지!”

“자기 위치 계속 확인해!”

“호날두 체크 오케이!”

우리 수비진이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클래스 높고 경험 풍부한 우리의 4백도 이 다음에 벌어질 상황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측면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던 카카의 벼락같은 크로스와, 갑자기 들이닥친 그림자 하나.

퍼엉- 철썩-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신 레알의 공격진을 몽땅 미끼로 써버린 남자.

라모스가 장발을 휘날리며 원정팀 응원석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갔다.

얼마나 빡세게 뛰었는지 트레이드마크인 머리띠가 벗겨질 정도.

아니, 대체 쟤가 거기서 왜 나와?

* * *

이상하게 레알만 만나면 선제골을 먹고 시작하는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에 가선 항상 승리하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느낌이 좋지 않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여리고 소중한 문타리는 완전 기가 죽어 버렸다.

상대 풀백의 공격 가담은 우리 윙어가 견제해주는 게 기본적으로 맞긴 하다.

하지만 그건 일반론.

풀백 주제에(?) 페널티박스까지 들어가서 헤더를 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냥 라모스가 이상한 놈인 거다.

수비라인에 변화를 준 페예그리니 감독의 작전이 결과적으론 적중한 상황.

뛰느라 풀린 머리띠를 곱게 고쳐 매는 라모스의 모습이 매우 얄미워 보인다.

경기 재개.

콰레스마도 안 되고, 문타리도 안 된다면 중앙 공격으로 게임을 풀어가야겠지?

“데얀! 쭉쭉 올라가!”

무리뉴 감독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듯하다.

현재 우리 팀의 미드필더들 중에서 가장 공격 재능이 뛰어난 친구는 데얀 스탄코비치.

스네이더만큼 날카로운 한 방은 없지만, 대신 체력과 활동량이 더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으으악!”

또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던 콰레스마가 디아라에게 유니폼을 잡히며 잔디 위를 굴렀다.

다행히도 이번엔 우리의 프리킥 선언.

정말 오랜만의 선발 출전이다 보니 감독에게 어필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자꾸 저러면 오히려 역효과일 것 같은데?

다른 감독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무리뉴 감독이 특히 싫어하는 선수 유형이 ‘말귀 못 알아듣는’ 케이스다.

반대로 내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크흠.

콰레스마가 일어나자마자 빠르게 연결한 프리킥 패스를 스탄코비치가 받았다.

“백강!”

오늘 홍길동처럼 ‘여기 뿅 저기 뿅’하는 디아라의 압박을 피해, 스탄코비치가 하프라인 부근에서 한 번에 로빙 패스를 연결했다.

오, 이 패턴 오랜만이야.

측면에서의 크로스가 아니라 종으로 날아오는 공중볼을 직접 타격하는 ‘정백강표 라인브레이킹’.

즐라탄과 함께 뛰던 시절, 많은 팀을 울렸던 공격 방식이다.

에투 합류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콰앙-

투우웅-

일진이 안 좋은가.

안 풀리려니까 더럽게 안 풀린다.

이마에 맞추는 감은 기가 막히게 좋았는데 결과는 골대샷.

왼쪽 골포스트를 강타하며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오늘 에투가 나왔으면 분명 이렇게 얘기했을 거야.

이런 시이발...

* * *

전반 종료 후 하프타임.

“수비는 아주 좋았다.”

지당하신 말씀.

비록 라모스에게 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레알의 맹공을 꽁꽁 틀어막은 수비진의 활약은 대단했다.

상대 공격진의 수준 차를 생각해본다면, 거의 로마전 퍼포먼스에 비견될 수준.

“문제는 공격인데...”

무리뉴 감독이 작전판 앞에 서서 한참 뭔가를 끄적이더니, 뒤돌아서며 엄숙히 선언했다.

“자, 이게 후반전 포메이션이다.”

크으...

말 그대로 고육지책(苦肉之策).

경기를 지켜보면서 무리뉴 감독이 얼마나 머리를 싸맸을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이 전술의 진짜 목적은...”

한참 동안 이어지는 설명.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듣다 보니 꽤 일리 있는 작전이다.

그건 그런데...

“감독님, 이건 한 번 시도하면 더 이상 저쪽에서 속아줄 것 같지 않습니다만?”

나의 질문에 무리뉴 감독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레알 선수들이나 페예그리니가 바보는 아니지.”

이 태연한 반응은 뭐지?

“그 말씀은...?”

“그 딱 한 번의 시도를 넣어주는 것! 그게 백강, 너의 역할이다.”

아니 무슨 이런 양아... 감독님이 다 있어?

* * *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가 잡겠는걸?”

경기장 입장 전 대기 타임.

전반전에 거의 MOM급 활약을 펼친 디아라가 시비를 걸어 왔다.

거참,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되게 거슬리는구만.

“조용히 해. 게임은 이제 시작이니까.”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내 두뇌는 멈추지 않고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무리뉴 감독이 말한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후반전 선공은 앞서고 있는 레알.

서두를 이유가 없어진 상황에서 완급조절에 들어갔다.

호날두와 이과인만 적극적으로 공격을 노리고, 라울과 카카는 후방으로 내려와서 중원에 힘을 실어주었다.

티키타카로 축구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있는 바르셀로나만큼은 아니지만, 레알 역시 패싱 축구의 원조 맛집인 라리가의 명문 구단.

공을 돌리며 점유율을 유지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팀이었다.

여기서 조급해하며 달려들다가 한 골 더 먹으면 말짱 황이다.

존버하면 기회는 언젠가 온다.

그게 코인... 아니 축구다.

“헤이! 헤이!”

몸이 잔뜩 달아오른 호날두가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공을 달라고 소리쳤다.

녀석, 무난히 이길 것 같으니까 골이 마려워졌구나?

이건 정말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준 격이다.

징징거림을 참지 못한 알론소가 호날두 쪽으로 롱패스 전개.

공을 받은 호날두는 이번에야말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듯 마이콘을 상대로 드리블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짝 날이 선 마이콘의 수비는 벽 그 자체.

돌파가 여의치 않자 코너킥이라도 얻어내려 했으나, 그것마저 실패하며 골킥이 선언되었다.

드디어 찾아온 기회.

우리 선수들이 무리뉴 감독의 지시대로 위치했다.

“뭐야 이거?”

그렇게도 의기양양하던 디아라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4-4-2나 4-3-1-2처럼 정형화된 숫자로 얘기하기 힘든 괴상한 포메이션.

4백 앞에 캄비아소와 모타가 진을 친 것 까지는 정상.

최전방에 내가 있는 것도 뭐, 당연히 정상.

하지만 나머지 선수들, 즉 스탄코비치, 콰레스마, 그리고 문타리는 모두 오른쪽 측면에 위치했다.

그것도 거의 터치라인에 붙을 정도로 넓게.

마이콘까지 포함하면 4명이나 투자된(?) 셈이었다.

상대가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시작된 우리의 전진.

마이콘이 문타리에게, 문타리가 스탄코비치에게.

압박 들어온다 싶으면 다시 뒤로 돌려 문타리에게.

측면에 배치된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레알 녀석들도 위협은 줄 수 있을지언정 공을 빼앗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에 모타도 적절히 올라와서 삼각형 대형 유지에 도움을 주었으니.

기어이 하프라인을 넘어서자 레알 수비진에도 비상이 걸렸다.

애들 장난같이 보이는 공격이지만, 인테르의 스트라이커가 누구던가.

바로 정백강이다.

잠깐이라도 틈을 줬다간 크로스 한 방에 바로 동점이 될 수 있었다.

무리뉴 감독에게 정말 크게 혼난 콰레스마는, 드디어 욕구를 참을 줄 아는 사나이가 되어 침착하게 패스를 내주고 있었다.

“Loza de barro!”

“Balón de Oro!”

대부분이 스페인어라 내용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레알 선수들의 목소리에서 확실히 당황한 게 느껴졌다.

때가 오고 있다...

라모스의 골 이후 시종 여유 넘치던 페예그리니 감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Notas favoritas!”

감독의 고함과 손짓이 신호였는지, 레알의 미드필더들이 동시에 합을 맞춰 오른쪽 측면으로 달려들었다.

이놈들, 드디어 걸렸구나.

“주장!”

이야, 공을 잡고 있었던 게 또 하필 가장 든든한 마이콘이라니.

이건 축구의 신께서 보우하신 게 틀림없다.

뻐어엉-

마이콘의 자로 잰 듯한 초장거리 킥이 왼쪽 측면에서 미친 듯이 뛰어 올라오던 사네티 주장의 발 앞에 떨어졌다.

저게 어딜 봐서 36세의 스피드란 말인가.

레알은 11명 전체가 오른쪽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주장을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라모스가 뒤늦게 백업을 갔지만 잘못된 판단.

차라리 현재 자리를 지키느니만 못했다.

완전히 가속이 붙은 주장은 라모스의 태클 시도를 가볍게 뛰어넘어 버렸다.

후반 14분만에 맞은 프리 크로스 찬스.

“간다!”

한 번 접고 주발인 오른발로 올린 크로스가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감겨 들어왔다.

씁... 약간 긴데?

혼신의 전력 질주 여파인지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킥.

그때 무리뉴 감독의 목소리가 주문처럼 머리에 띵 울렸다.

- 딱 한 번의 기회를 넣어주는 것. 그게 너의 역할이다.

거참, 알았다구요. 감독님.

공을 이마에 맞히는 순간 경악으로 커진 이케르 카시야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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