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예에-
열광하는 홈팬들 앞으로 달려가 손가락 하나를 펼친 뒤 이마를 두드렸다.
챔피언스리그에서 사상 최초로 연속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던 마르세유전 이후, 내 전용 세리머니로 밀고 있는 동작.
Grande!!! Testa!!!
Grande!!! Testa!!!
함성이 한층 더 커졌다.
무리뉴 감독이 준비한 기만전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성동격서(聲東擊西)’.
오른쪽 측면에서 뭘 노리는 것처럼 잔뜩 벌여놨지만 진짜 노리는 곳은 반대쪽이었다.
이 작전을 수행하려면 발이 빠르고 전술 이해도가 높은 선수, 그리고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줄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다.
전자가 사네티 주장, 후자가 나였던 셈.
“이야, 방금은 패스가 나빴는데 말이지.”
어시스트를 기록한 주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길든 짧든 넣어야죠. 누가 주신 패슨데.”
“이 녀석이 나를 놀리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주장.
훈훈한 우리 팀과는 달리 허무하게 실점한 레알 마드리드 녀석들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Mi novela!”
“No muy popular!”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뭔가 잘잘못을 따지는 듯했다.
근데 그거 아니?
너희들의 잘못은 딱 하나뿐이야.
나를 적으로 만났다는 것.
동점이 되자 레알 벤치가 소란스러워졌다.
UEFA(유럽축구협회)의 규정에 따르면 조별리그 승점 동률이 나올 경우, 동률인 팀들의 상대승점(전적)을 적용한다.
다시 말해, 오늘 무승부로 끝날 경우, 우리가 마지막 경기인 마르세유전에서 패하더라도 무조건 조 1위라는 말씀.
이제 선택은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의 몫이었다.
무승부로 인테르전 연패를 끊는 데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끝까지 승리를 노려볼 것이냐.
경기 재개와 동시에 답은 나왔다.
아까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포지셔닝하는 마르셀루와 세르히오 라모스.
이거이거, 어떻게든 이겨볼 작정이구만.
레알의 양쪽 윙어인 호날두와 카카는 중앙으로 파고들려는 성향이 강한 선수들.
따라서 측면 공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풀백의 오버래핑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역습에는 그만큼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백강 빼고 전부 내려가!”
무리뉴 감독은 곧바로 두줄 수비 대형을 지시했다.
창과 방패의 대결 양상.
뻐엉-
투콱-
하필이면 내가 골을 넣는 바람에 흥분했는지, 호날두가 무리한 슈팅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 선수 중 하나라지만 아직 스물넷.
한창 마인드 컨트롤 안 될 나이다.
날두야, 인생을 조금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을 게다.
세상사는 원래 뜻대로 안 된다는 걸.
후반 30분이 넘어가도록 성과가 없자 다급해진 페예그리니 감독이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챔스 공포증’이 도진 듯 좋은 찬스를 많이 놓쳤던 곤살로 이과인 아웃.
향후 우여곡절 끝에 ‘황제마’로 성장하게 되는 카림 벤제마 투입.
무리뉴 감독 역시 지쳐 보이는 히카르두 콰레스마를 불러들이고 발로텔리에게 속죄 기회를 주었다.
텔리야, 오늘은 퇴장당하면 안 된다?
* * *
- 4000만 유로? 그 돈으로는 벤제마의 귀 한쪽 정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올림피크 리옹의 장미셸 올라스 회장이 했던 유명한 발언.
결국 3500만 유로에 레알 유니폼을 입으면서 비웃음을 당하긴 했지만,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벤제마의 재능은 번쩍였다.
골게터 스타일의 이과인과 달리 벤제마는 키핑과 연계가 되는 선수.
촘촘하게 진을 친 우리 수비진 사이에서도 귀신 같이 볼을 지켜내며 레알의 공격 작업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골을 못 넣는데.
그렇게도 레알의 공격진을 칭송했던 도박사들이 우스워 보일 정도로, 오늘 상대의 결정력은 형편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건 호날두.
슈팅 수는 가장 많이 가져가면서도 위협적인 장면은 거의 연출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킥은 골문을 벗어났고, 어쩌다 안쪽으로 향하는 슛은 골키퍼 정면.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쫓기는 모양새다.
이윽고 후반 40분이 되자 페예그리니 감독이 마지막 모험을 시작했다.
비기나 패하나 어차피 조 2위.
최후방에 페페만 남겨둔 채 전원이 공격 진영으로 올라갔다.
이럴 땐 또 수비에 참여해줘야 제맛 아니겠는가.
뛰어 내려가고 있는데 무리뉴 감독이 나를 멈춰 세웠다.
“백강! 너는 자리 지켜!”
응? 어쩐 일이시래?
의아한 생각은 들었지만 감독의 지시는 절대적.
“느려빠진 녀석이 혼자서 뭐 하려고? 넌 내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라울 알비올 대신 나를 마크하게 된 페페는 영어가 좀 되는 모양이다.
“아, 그러시구나. 내가 너희 상대로 3경기에서 7골 쑤셔 넣는 동안 너는 뭐 했더라?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
제발 가만있는 사람 건들지 좀 마라, 페페야.
“오케이, 잡았어!”
마르셀루가 알비올의 머리를 노리며 붙여준 공을 루시우가 헤더로 끊어냈다.
발로텔리의 발끝에 안기는 루즈볼.
“마리오! 멀리 걷어내!”
캄비아소의 매우 상식적인 주문.
그런데 여기서 발로텔리의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됐다.
갑자기 우리 진영에서 드리블을 시작하는 발로텔리.
“야! 뭐해! 그냥 걷어내라니까?”
발로텔리의 이상행동 때문에 땡잡은 건 레알 녀석들.
마르셀루와 라사나 디아라가 동시에 공을 노리며 다리를 뻗었다.
우우와아아악-
그 순간 터지는 관중들의 함성.
발로텔리가 태클 사이로 공만 쑥 빼내며 빙글 돌았다.
아니, 저기서 무슨 크루이프 턴이야?
터엉-
탈압박에 성공한 발로텔리가 앞쪽으로 공을 멀리 차 놓은 채 질주했다.
교체된 지 얼마 안 되어 체력은 넘치는 상태.
역습은 생각도 못 했던 듯, 레알 녀석들의 수비 복귀 속도는 형편 없었다.
발로텔리가 아무런 방해 없이 하프라인을 넘는 순간 이미 게임 오버.
2대 1 상황을 맞닥뜨린 페페는 완전 멘붕에 빠졌다.
나를 막는 것도 아니고 발로텔리에게 붙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포지션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마리오! 나한테 올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뭐라고 말하든 분명 슈팅을 시도했을 발로텔리.
그러나 최근에 사고 친 게 워낙 많아서 그런지 군말 없이 크로스를 올려주었다.
“이런 개 같은!”
페페는 분명 포르투갈어로 말했지만, 어쩐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은 매직.
콰아아앙-
내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공이 굉음을 내며 골문 오른쪽 상단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거지, 이 맛이지.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관중들이 이미 손가락 두 개를 하늘 높이 들고 있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승리의 ‘V’ 마크처럼 보인다.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나를 따라 자기 머리를 두드리는 장면은 그 자체로 대단한 장관이었다.
세리머니를 마친 나는 페페에 대한 마지막 도발까지 잊지 않았다.
“야, 이제 8골이다!”
* * *
[인테르, 조별리그 5차전서 레알 마드리드 상대로 2-1 승리 거두며 C조 1위 확정]
[‘레알 킬러’ 정백강, 멀티골 기록하며 팀 승리 견인]
[축구는 골로 얘기하는 것, 무리뉴가 보여준 ‘효율의 미학’]
볼 점유율 64%-36%.
유효슈팅 11-2.
그 외에 패스 횟수, 패스 성공률, 코너킥과 프리킥 횟수까지 모두 레알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스코어가 2-1인데.
프로란 결과로 말하는 법이다.
이번에야말로 인테르전 연패 탈출을 노렸던 레알은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또 한 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거? 내 결정이 아냐. 감독 지시였어.”
의문의 폭풍 드리블로 역적이 될 뻔했다가 영웅에 등극한 발로텔리의 증언.
오오,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신 겁니까.
간만에 ‘갓리뉴’ 모드를 보여준 무리뉴 감독이었다.
난적이라고 여겨졌던 레알을 물리친 우리 팀은 다시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5일 후 열린 피오렌티나 원정 경기에서 4-0 완승을 거두며 완벽 부활을 선언.
내가 2골, 루시우가 1골, 종료 직전 크리스티안 키부가 1골.
4골 모두를 헤더로 집어넣는 진기록을 세우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피오렌티나전이 우리 팀의 11월 마지막 경기였다.
* * *
- 야, 내일이다. 드디어...
- 어차피 바로 기사 뜰 텐데 왜 이렇게 호들갑들임?
- 그래도 궁금하잖아 ㅋㅋㅋㅋ
- 너무 긴장된다 ㅠㅠ 과연 정백강이 ㅠㅠ
- 내가 유출된 거 보고 왔는데 정백강 맞음
- 진짜임? 링크 줘봐
- 내 꿈에 나온 건데 링크가 어딨음?
- 아 시발 ㅋㅋ ㅂㅅ같네 진짜 ㅋㅋㅋㅋㅋ
- 정백강은 무슨 정백강이야 ㅡㅡ 당연히 메시 줘야지. 트레블했는데 ㅋㅋㅋ
- 최고팀상이면 바르샤가 받는 게 맞지, 근데 개인상인데 메시를 왜 줘? ㅋㅋㅋㅋ
- 메시 개인기록이 딸림?
- 정백강보다 딸리는건 팩트지 ㅋㅋㅋㅋ
- 꾸레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 메시 얘기하면 무조건 꾸레 이 지랄 ㅋㅋㅋ
- 이전글 검색 다 해보고 왔다 이 꾸레야 ㅋㅋㅋㅋ
- 그새 닉네임 바꿨어 ㅋㅋㅋ 바꿔도 정보 보면 다 나온단다 ㅋㅋㅋㅋ 탈퇴하고 재가입하렴 ㅋㅋ
2009년 발롱도르 수상자 발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면서, 국내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또 한 차례 ‘정메대전’이 발발했다.
물론 대다수는 나의 수상을 지지해주었지만, 리오넬 메시를 응원하는 목소리도 없진 않았다.
불현듯 맨유와의 승부차기가 떠오른다.
그때 이겨서 올라갔다면.
결승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나 이겼다면.
논란의 여지도 없게 우리가 트레블을 했다면...
아니다,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말자.
나는 지금 집에서 전화 한 통을 기다리고 있다.
공식 발표는 12월 1일 발롱도르를 주관하는 프랑스의 축구잡지 <프랑스 풋볼> 홈페이지에 개시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30인의 발롱도르 최종 후보들은 오늘 미리 결과를 통지받을 예정.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
언제 이렇게 땀이 났을까.
핸드폰을 쥔 손이 축축하다.
따르릉-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뻔했다.
발신자는... 아, 뭐야. 문타리잖아.
“왜?”
“궁금해서 전화했어. 연락 왔어?”
“연락? 왔지, 너한테.”
“아직 안 왔구나.”
“내가 이따 연락할게. 끊어.”
끊고 나니 좀 미안하다.
내가 너무 싸가지 없게 굴었나?
문타리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건 알지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선 적은 처음이다.
나중에 좀 풀어줘야겠다.
따르릉-
이번에야말로... 에투네?
얘는 자기도 후보면서 왜 전화를 하지?
“무슨 일이야?”
“나, 연락받았어. 내가 6위래. 이게 말이 돼? 올해 나보다 축구를 잘했던 새ㄲ... 아, 미안해 조르젯. 녀석이 다섯 명이나 된다고?”
에투 형, 미안한데 그중 한 명이 나야.
“그러게나 말이야.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네. 근데 혹시 연락한 사람이 수상자도 얘기해줬어?”
“아니, 딱 내 순위만 말해줬는데?”
이런 씨, 그럼 나한테도 곧 연락이 온단 소리잖아.
“끊어!”
가나와 카메룬의 국민 영웅들 덕분에, 대한민국의 영웅께서 김이 팍 샜다.
따르릉-
이번엔 또 어떤 잡놈이 전화를...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집어 드는 순간 온몸의 피가 쫙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이번엔 진짜다.
“네, 정백강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프랑스 풋볼>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정백강 선수가 잔디 위에서 보여준 활약에 무한한 찬사를 보냅니다. 지금 발롱도르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말씀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