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대망의 2009년 12월 1일.
발롱도르 주관사인 <프랑스 풋볼> 홈페이지에 수상자가 공개되었다.
그리고 파장은 엄청났다.
사실 이 투표라는 게 사람이 하다 보니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논란이야 매년 발생하는 것.
그러나 올해는 유독 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발롱도르를 품에 안은 선수는 리오넬 메시였다.
전국민적인 응원 속에 한국인 첫 발롱도르를 노렸던 나는 2위에 만족해야 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나와 메시가 획득한 포인트.
누가 이기든 박빙이 될 거라던 당초 예상에 비해 1위와 2위의 점수 차이가 너무 크게 났기 때문이다.
메시가 무려 415점을 획득한 반면, 경쟁자인 나는 겨우 291점에 그쳤다.
나와 메시의 격차가 나와 3위 호날두(170점 획득)의 점수 차보다 더 컸으니 잡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결과에 대해 가장 크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선 인물은 무리뉴 감독이었다.
“메시는 물론 발롱도르를 받을 자격이 있는 선수다. 그러나 백강 역시 마찬가지다. 신이 아닌 이상, 둘 중 누가 나은 선수인지 절대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투표 결과가 보여주는 사실은 분명하다. 백강이 유럽이나 남미에서 태어났다면, 결과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것 말이다.”
모두가 머릿속으로 생각은 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 화두, ‘인종차별’.
발롱도르는 96개국의 기자단 투표로 결정되는 상인데, 그 중 절반이 넘는 53개국이 유럽 소재 국가였으니...
인종차별이 발생할 소지는 충분했다.
- 와 진짜 개열받는다 ㅠㅠ
- 더러운 유럽 기자들 ㅡㅡ
- 2009년에 41경기 59골 넣은 게 정백강인데 발롱 못 받았다고? 이게 말이 됨?
- 진짜 앞으로 발롱 누구한테 주나 지켜본다
- 분해서 어제부터 잠을 못 잤다 ㅠㅠ 개피곤하네
- 아 진짜 졸라게 징징대네 ㅋㅋㅋ 메시가 받은 게 그렇게 배아픔??
- 메시가 받을 수도 있는데 124점 차가 말이 안 되는 건 사실 아님? 좀 납득이 돼야 넘어가지
- 이게 맞음 ㅇㅇ 수상 결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자들이 존나 악의적으로 투표한 게 보여서 거지같은 거지
- 여러분 긴급 속보입니다! 백악관에 청원하면 발롱도르 재투표 들어간답니다! 다들 힘을 모아주세요. 대한민국의 힘을 보여줍시다!!!
- 청원하고 왔습니다 ^^ 함께 해요!!!
- 세상에 이걸 믿는 ㅂㅅ이 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든 한국팬들의 분노야 뭐, 말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인 나도 결국엔 사람인지라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했다.
감정 섞인 말 한마디가 바로 기사화되어 잘 쌓아둔 내 이미지를 깎아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상식에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
2009년까지의 발롱도르 시상식은 상의 명성에 비해 굉장히 초라했다.
어차피 사전에 결과를 다 공개하기 때문에, 작은 스튜디오에 수상자만 불러서 트로피 전달하고 소감 듣는 게 끝이었다.
내년, 그러니까 2010년부터는 ‘FIFA 발롱도르’로 통합되면서 규모가 확 커지고 수상자 사전 공개도 사라지게 되지만 말이다.
만약 이번에 시상식 초청받았으면 엄청 심각한 고민에 빠질 뻔했다.
이런 일이 다신 없도록, 내년엔 부디 확실하게 가자. 백강아.
* * *
“크흠, 흠흠.”
“뭐야?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발롱도르 결과 발표 이후 어쩐지 동료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게 느껴진다.
심지어 에투마저도 내 눈치를 본다.
나름 배려해주는 거겠지만, 솔직히 좀 불편하다.
“나는 괜찮으니까 평소처럼 해도 돼.”
“내 말이. 그깟 상 하나 못 받은 게 뭐 대수라고 이러는 거야?”
예나 지금이나 나를 똑같이 대해주는 건 발로텔리뿐이다.
발롱도르를 ‘그깟 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축구선수는 아마 발로텔리뿐이겠지.
[‘FIFA 올해의 선수’ 최종 후보 5인 발표]
[발롱도르 이어 또 맞붙은 정백강과 메시]
[들러리(?) 된 호날두, 사비, 이니에스타. 3~5위 다툰다]
비록 발롱도르는 놓쳤지만 2009년 한 해 농사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거의 발롱도르 급의 영예를 자랑하는(굳이 따지면 아주 약간 부족하긴 하지만) ‘FIFA 올해의 선수’ 상이 아직 남아 있었다.
100% 기자단 투표로 이뤄지는 발롱도르와 달리 각국 대표팀 감독, 주장, 팬들 등 다양한 국적과 성향의 인물들이 투표에 참여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기도 했고.
비교적 최근인 2000년도 이후만 따지더라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가 엇갈린 케이스가 네 번이나 나왔었다.
‘트레블 팀의 에이스’ 메시의 천하통일이냐, 아니면 ‘세계 최고의 공격수’ 정백강의 반격이냐.
축구계의 관심이 ‘정메대전’ 제2라운드에 쏠렸다.
* * *
“피구 형님이요? 그것 참 매우 불안하네요. 왜 하필이면... 다른 분들도 많을 텐데.”
“에이,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그렇긴 한데 워낙 전적이 화려하다 보니... 징크스라는 게 완전 무시할 건 아니더라고요.”
사네티 주장이 물어 온(?) 최신 소식은 썩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마르세유 원정에서 주전들을 모두 빼고도 1-0 신승을 거둔 우리 팀.
디펜딩 챔피언인 바르셀로나도 못한 ‘조별리그 전승’을 거두며 상큼하게 녹아웃 스테이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16강 대진 추첨장에 우리 팀 대표로 루이스 피구 형님이 간다는 게 아니겠는가.
인테르 앰배서더(홍보대사)를 맡고 있으니 자격이야 차고 넘쳤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직접 뽑는 건 아니고, 그냥 자리만 지키는 거잖아? 괜찮을 거야.”
“그러길 바라야겠네요...”
문타리에게 이 이야길 해줬더니 생각보다 훨씬 대범한 반응을 보였다.
“에이, 뭐 그런 걱정을 해. 그런 거 다 미신이야, 미신. 백강, 생각보다 지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는걸? 실망이야.”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피구 형님 대신에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다면 바꿀래?”
“당연히 바꿔야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
12월 18일 밤에 열린 16강 대진 추첨식은 에투의 집에 모여서 다 같이 보게 되었다.
원래는 사네티 주장의 집에서 보는 게 ‘국룰’.
그런데 에투의 아내인 조르젯이 집에 손님들이 오는 걸 워낙 좋아해서 사랑방 역할을 자처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대가족 사이에서 자라서 그런지, 집이 북적북적한 게 좋더라구요. 그래서 아이도 더 낳을 생각이에요.”
벌써 셋인데 충분하지 않나?
뭐, 에투가 능력이 좀 되니까 괜찮겠지.
재활에 매진하고 있는 에투도 우리가 놀러가면 덜 심심해 하니 일석이조.
하지만 제일 기뻐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가끔 이렇게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합법적으로 말이지.”
흐뭇하게 웃는 주장.
이 형님 처음엔 가정적인 남편에 애처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갈수록 공처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크으, 맛난다.”
소파에 자릴 차지하고 앉은 문타리가 쉴 새 없이 맛김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마르세유전에서의 페널티킥 양보 이후 ‘택배 테러’를 받았던 에투인지라, 집에 맛김은 산처럼 쌓여 있다.
어우, 근데 저렇게 먹으면 짜지도 않나?
“포르투갈의 영웅께서 나오셨구만.”
카메라가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피구 형님을 비췄다.
이왕 먼 길 가셨으니 부디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형님.
진행자의 소개에 따라 UEFA(유럽축구연맹) 사무총장인 잔니 인판티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판티노는 제프 블라터의 뒤를 이어 나중에 FIFA 회장까지 역임하게 되는 거물.
물론 나만 알고 있는, 먼 미래의 일이다.
“시작이다.”
힐끗 주장을 보니, 마치 기도를 하듯이 양손을 꼭 모으고 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던 지난해의 설욕, 그리고 트레블을 위한 첫 관문.
그 상대가 곧 결정된다.
긴장되는 순간.
- VfB 슈투트가르트.
가장 약한 조라 평가받았던 G조에서 2위를 차지한 슈투트가르트.
1위를 차지한 세비야가 독주하는 사이, 루마니아 리그 챔피언인 우니레아 우르지체니를 승점 1점 차로 겨우 꺾고 16강 무대를 밟은 팀이다.
쉽게 쉽게 가고 싶은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대다.
- FC 바르셀로나.
“이런 시ㅂ... 안 좋은!”
에투가 조르젯 눈치를 보느라 험한 말을 가까스로 참았다.
정말 욕 나오는 상황이다.
“이거 조작 있는 거 아냐 정말?”
문타리도 김을 우물거리면서 말을 보탰다.
일단 바르셀로나는 8강 진출 99.99999% 확정.
슈투트가르트 관계자들이 서로 마주 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이 정도인데 저분들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 올림피아코스 FC.
좋다 좋아.
전력도 약할뿐더러 우리는 지난 시즌에 파나티나이코스를 상대해 봤기 때문에 그리스 원정 경험도 보유하고 있다.
- FC 지롱댕 드 보르도.
까비.
A조 1위 보르도는 이번 시즌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팀이다.
조별리그 6경기에서 무려 5승 1무를 거두며 독일 최고의 명문 바이에른 뮌헨을 2위로 밀어냈다.
이 프랑스발 돌풍의 최대 피해자는 이탈리아의 자존심 유벤투스.
보르도 덕분에 3위에 머물며 유로파리그로 가게 되었다.
- FC 바이에른 뮌헨.
어우, 바로 나오네.
“만났으면 좋겠는데? 아주 그냥 박살을 내주게.”
친정팀의 이름을 본 루시우가 이를 갈았다.
뮌헨에서 재계약 제의조차 못 받고 팀을 옮기게 됐으니 감정이 좋을 수가 없겠지.
우리 팀의 올해 신입생 중에는 이전 소속팀을 증오하는 친구들이 유독 많은 느낌이다.
뮌헨이라.
쉬운 상대는 분명 아니지만, 지난 시즌에 한 번 이겨본 경험은 크게 작용할 것 같다.
- ACF 피오렌티나.
이탈리아 팀이 드디어 등장했다.
리그에선 10위권대로 처져 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이상할 정도의 저력을 보여주며 올림피크 리옹을 2위로 밀어냈다.
이름값은 분명 뮌헨이 우위.
그러나 피오렌티나도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 첼시 FC.
2위 그룹 끝판왕의 등장.
D조에서 2위에 그치긴 했지만, 첼시는 좀 억울한 구석이 있는 팀이다.
조별리그에서 4승 2패를 거뒀는데, 패한 2경기에 모두 심각한 판정 논란이 있었다.
포르투전에서는 상대 손에 맞고 들어간 골이 인정되며 0-1 패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에서도 당연히 불렸어야 할 페널티킥이 족히 3개는 안 불리는 악재 속에 1-2로 패했다.
사실 전력으로만 보면 조 1위가 더 합당한 팀.
“어어? 뭐야? 재수 없게 왜 이래?”
티아고 모타가 인상을 찡그렸다.
인판티노 사무총장이 첼시를 뽑은 직후, 갑자기 카메라가 피구 형님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지금 타이밍에 화면이 왜 돌아가?”
잠자코 보고만 있던 사네티 주장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우연이겠죠. 너무 신경 쓰지 마...”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오늘 벌써 세 번째 등장하는 피구 형님의 동공이 진도 12로 마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