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유벤투스와의 리그 경기를 1-0 승리로 장식하면서, 우리 팀의 올해 일정이 모두 끝났다.
세리에에서 15승 3무, 승점 48점으로 단독 1위.
챔피언스리그에서 조 1위로 16강 진출.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리보르노를 꺾고 8강 진출.
‘트레블 재수생’으로서 해야 할 일들은 모두 착실하게 해낸 셈이었다.
유벤투스전을 마친 나는 쉴 틈도 없이 스위스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내일은 대망의 FIFA 올해의 선수 시상식이 열리는 날.
솔직히 언질이라도 줄 줄 알았는데, 혹시라도 ‘노쇼’할까봐 겁났는지 시상식 참석 안내만 받았을 뿐 다른 연락은 전혀 없었다.
“백강, 긴장되나?”
“아닙니다, 하하하.”
사실 무지 긴장된다.
수상할지 말지도 물론 그렇지만,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무리뉴 감독이야 그렇다 치는데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는 대체 왜 같이 가는 것인가.
구단주가 나를 예뻐하는 거야 진즉 알았지만 시상식까지 따라오실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또 메시가 받으면 어쩌려고...
그리고 또 한 사람.
“내가 받아봐서 아는데 거짓말일 겁니다.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어요.”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는 주인공은...
‘일 페노메노(Il Fenomeno)’, 호나우두다.
현재 고국 브라질에서 재활 중인 호나우두는 내일 시상식에 게스트로 초대를 받았다.
어차피 와야 하는 거, 좀 일찍 와서 유벤투스전을 관람한 후 스위스로 같이 이동하는 중.
우리 팀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당시 모라티 구단주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회복한 모양이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그래. 97년도는 정말 대단했었지.”
미소를 지으며 추억을 회상하는 모라티 구단주.
1997년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호나우두가 인테르 소속으로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싹쓸이한 해다.
우리 팀에서 그 해 ‘최고의 선수’가 나온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무려 1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말이지.
우리 팀의 암흑기 동안 라이벌 밀란과 유벤투스는 4명의 발롱도르 위너와 3명의 FIFA 올해의 선수를 배출했다.
내색은 안 해도 모라티 구단주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터.
어우, 갑자기 부담감이 확 올라온다.
* * *
“아,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건은 방에 미리 옮겨 놓았습니다.”
“물건이요?”
“네, 미켈레 시빌로티 씨가 미리 맡겨 놓으신 물건이 있습니다. 정백강 선수에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취리히의 호텔에서 시빌로티의 이름을 들을 줄이야.
이 양반은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불쑥불쑥 존재감을 뽐낸다.
뭘 보낸 걸까?
또 시계는 아니겠지?
나의 의문은 방에 도착하면서 바로 풀렸다.
“흠, 괜찮네.”
시빌로티의 깜짝 선물은 턱시도였다.
파격적인 걸 좋아하는 시빌로티의 작품인지라 걱정을 좀 했지만 아주 무난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디자인의 멋진 옷이었다.
몸에 딱 맞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고.
내 사이즈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니...
깜짝 선물과 동봉된 쪽지에는 자필로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천재 소리 듣는 디자이너답게 굉장한 악필이라 겨우 해독할 수 있었다.
- 1997년, 호나우두의 턱시도도 내가 만들었다네. 하나님의 행운이 깃들길 바라며. 미켈레.
턱시도를 입고 거울 앞에 서자 기분이 묘하다.
벌써 상을 받은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수상소감을 준비 안 했네.
좀 미리 알려주면 좋을 텐데...
내일 상을 못 받는다면 희대의 뻘짓이 되겠지만, 전 세계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어버버하는 것보단 낫겠지.
정말 오랜만에 펜을 들고 종이 앞에 앉았다.
수상소감이라.
감사를 표하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 수도 없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래,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쓸지 안 쓸지도 모를 수상소감을, 그렇게 새벽까지 써 내려갔다.
* * *
2009년 12월 21일.
결전의 날이다.
시상식이 열리는 취리히 콩그레스하우스 인근은 세계 최고의 축구 스타들을 만나기 위한 팬들과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 모라티 구단주, 그리고 무리뉴 감독까지.
‘인테르 3인방’이 나타나자 엄청난 양의 플래시가 터졌다.
- 수상 확률을 몇 %라고 예상하십니까?
- 구단주까지 왔다는 건 이유가 있겠죠?
-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에게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잠시 후면 모든 게 알려질 겁니다.”
“하이파이브 해주세요!”
기꺼이.
나와 손이 닿은 꼬마팬이 좋아서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러댔다.
팬서비스를 마친 후 행사장에 입장.
가장 먼저 눈에 띈 선수는 디디에 드록바였다.
비록 최종 후보 5인에는 들지 못했지만 기꺼이 시상식에 참여한 대인배.
경배하라, ‘드멘’.
“오우, 백강! 감독님!”
드록바 역시 나와 무리뉴 감독의 얼굴을 확인하고 반색을 했다.
“미국에서 보고 여기서 또 만나네.”
“그리고 2월에도 볼 일이 있지.”
드록바가 말하는 ‘2월’이란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루이스 피구 형님 덕분에(?) 성사된 매치업.
“그러게. 더 높은 곳에서 만났으면 좋았을걸.”
“만만치 않은 경기가 될 거야. 너희가 강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 역시 요즘 기세가 좋거든.”
드록바의 말은 사실이었다.
명장 카를로 안첼로티의 지휘를 받는 첼시는 EPL에서 당당히 선두에 올라 있었으며, 드록바는 득점 1위에 랭크된 상태였다.
“아, 그나저나 이건 비밀인데...”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추는 드록바.
“응? 뭐가 비밀이야?”
“나, 1위 표를 너한테 던졌어. 혹시라도 수상하면 내 덕분인 줄 알라고. 하하하.”
그렇구나.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의 주장 자격으로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
정말 드록바의 한 표 때문에 결과가 뒤바뀌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왔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행사장 한켠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뒤덮였다.
평균 신장 170cm에 못 미치는 바르셀로나의 작은 거인들.
리오넬 메시,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인사를 하러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사회자가 내 고민을 덜어주었다.
“월드 베스트 일레븐 선정자들은 모두 무대 뒤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세계 축구계를 호령하는 11명의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섰다.
“이따 행사 시작하면 가림막이 올라갈 겁니다. 최대한 멋있게 등장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행사 준비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매우 초췌해 보이는 진행요원이 자리를 일일이 배치해주었다.
“골키퍼,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순이거든요. 음... 정백강 선수가 가장 마지막에 트로피를 받을 거예요.”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아마 정통 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 때문이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바로 옆에 메시가 서 있다는 게 좀 민망하긴 하지만.
“발롱도르, 수상 축하해.”
“고마워. 사실 너한테 더 어울리는 상인데.”
“무슨 그런 말을 해. 당연히 네가 받아야지.”
어색하기 그지없는 덕담을 주고받는 사이, 공격진 3명 중 가장 쩌리(?)인 호날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시상식이 다 그렇듯, 초반은 무척이나 지루했다.
뭐가 막 펑펑 터지는데 별로 멋있지 않은 공식 영상과, 높으신 분들의 블라블라...
바짝 긴장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깜빡 졸 뻔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각 부문 시상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올해의 팀이죠. 베스트 일레븐을 여러분들께 소개합니다!”
열렬한 환호성 속에 11명의 스타들이 무대 위에 등장했다.
골키퍼에 이케르 카시야스.
수비진에 다니 알베스, 존 테리, 네마냐 비디치, 파트리스 에브라.
중원에는 사비-이니에스타 콤비에 스티븐 제라드.
최전방에는 메시, 호날두, 그리고...
“정! 백! 강!”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름이 불리는 순간 어쩐지 울컥하다.
은퇴를 종용받던 늙다리 센터백이 ‘지구 대표팀’의 일원이 되어 트로피를 받고 있다니.
기념촬영까지 마친 후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훌륭해, 훌륭해, 백강.”
옆에 앉은 모라티 구단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져야 할 텐데...
“다음은 페어플레이상입니다.”
페어플레이상은 올해 7월 타계한 바비 롭슨 경에게 주어졌다.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 롭슨 경은 위대한 선수이자 훌륭한 감독이었으며, 암 투병을 하던 말년에는 ‘바비 롭슨 재단’을 설립하여 암 치료 사업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스크린에 롭슨 경의 생전 모습이 나오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하늘에선 부디 평안하시길.
“이어지는 순서는 올해 신설된 푸스카스상입니다. 헝가리의 레전드 페렌츠 푸스카스의 이름을 붙인 이 상은, 한 해 동안 가장 멋진 골을 넣은 선수에게 수여됩니다.”
아주 중요한 상은 아니지만, ‘초대’라는 이름이 붙으니 좀 탐이 나는 건 사실이다.
가만있자, 원래는 누가 받았었더라?
생각에 잠긴 사이, 후보에 오른 골 영상이 순차적으로 재생되었다.
엠마누엘 아데바요르, 마이클 에시앙, 이니에스타, 니우마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백강.
어?
분명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호날두 하면 딱 떠오르는 챔스 포르투전 초장거리 중거리포.
아! 역사가 바뀌었구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포르투와의 챔스 8강전에서 호날두가 넣은 골은 페널티킥과 역습 상황에서의 마무리가 전부였다.
내 골이 후보로 올라갔다는 걸 듣긴 했는데, 당연히 호날두가 받을 줄만 알았지.
호날두가 후보에도 없다곤 미처 생각 못 했다.
가만, 이 흐름이라면 수상자는?
“정백강!”
뭐야? 진짜 나야?
생각도 못한 일이 생겼다.
초대 푸스카스상 트로피에 내 이름이 새겨질 줄이야.
선정된 골은 로마전에서 니콜라스 부르디소와 골키퍼를 동시에 농락한 ‘셀프 헤더골’이었다.
“어... 일단 감사합니다. 후보들을 쭉 보니 머리로 넣은 골은 저밖에 없군요. 이 신선함을 높게 평가해주신 것 같습니다. 2010년에도 더 멋진 헤더골을 넣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직도 얼떨떨하다.
베스트 일레븐에 푸스카스상까지 받았으니, 일단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면했다.
“다음은 FIFA 올해의 여자선수상입니다. 수상은 제프 블라터 회장님이 하겠습니다.”
FIFA의 절대적인 독재자 제프 블라터가 드디어 무대 위에 등장했다.
블라터 회장이 등장했다는 건, 시상식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는 뜻.
잠시 후면 2009년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 공개된다.
“마르타 비에이라 다 실바.”
명실상부 최고의 여자축구선수인 마르타가 또 한 번 FI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무려 4년 연속 수상.
수상 베테랑(?)답게 여유 있게 소감을 밝힌 마르타가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대망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FIFA 올해의 남자선수상입니다. 지금 제 손에는 수상자의 이름이 들어 있는 봉투가 있습니다. 이 봉투를 블라터 회장님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나대지 마, 심장아.
어떤 결과가 나와도, 쿨해야 한다 백강아.
블라터가 ‘리오넬 메시’ 하는 순간 웃으면서 박수를 보내는 거야.
안 그러면 캡처돼서 평생 굴욕으로 남을 게 뻔하니까.
“하하하. 올해의 주인공은 바로 이 선수군요.”
봉투 속을 슬쩍 열어본 블라터 회장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좀 빨리 말해요.
“축하합니다, 정백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