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내 이름인데도 낯설게 느껴진다.
“축하하네, 정말 축하해, 백강.”
내 손을 부여잡는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의 체온과,
“어서 나가야지. 전 세계의 팬들이 기다리잖나.”
무리뉴 감독의 조금은 격앙된 듯한 목소리가 말해주고 있다.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그리고 불현듯 이런 생각도 든다.
‘어젯밤에 수상소감 쓰지 말고 일찍 잘걸.’
내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서 단 한 글자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트로피인데, 방금 받은 건 유독 무겁게 느껴진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걸 축하하네.”
제프 블라터 회장과 악수하고 나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소감, 소감을 말해야지.
“감사합니다.”
일단 입을 떼야 할 것 같아 가장 무난한 스타트를 끊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정말 감사합니다. 휘유, 여기 난방이 너무 센 거 아닌가요? 땀이 다 나네요.”
여기저기서 자그맣게 웃음이 터졌다.
그래, 자신있게 말하자.
오늘은 너의 날이야.
“감사할 사람이 참 많습니다. 우선 우리 팀 얘기를 안 할 수 없겠죠. 다 언급하다 보면 여러분들이 도망갈 것 같아서 오늘 같이 온 두 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선수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와, 세계 최고의 감독 주제 무리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호명된 두 사람이 살짝 일어나며 청중들에게 인사했다.
“신문에서 본 이야깁니다만, 1995년의 조지 웨아를 제외하면, 유럽과 남미의 선수들이 이 상을 모두 가져갔다고 합니다. 웨아 이후에 14년이란 세월이 걸렸는데, 이 다음엔 그 텀이 좀 짧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축구는, 전 세계인의 스포츠니까요.”
다시 터지는 함성.
“끝으로 제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어머니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 말만큼은 한국어로 해야겠네요. ‘엄마, 나 엄청 큰 상 받았어요!’ 모두들 감사합니다.”
행사장을 메운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오래도록 박수를 보냈다.
정말, 환상적인 밤이었다.
* * *
[정백강, FIFA 올해의 선수 선정... 아시아 최초]
[대통령, 정백강에게 축전... 정부, 체육훈장 수여 검토]
[한국 축구 대부 차범건, “믿을 수 없는 일... 정백강은 정말 자랑스러운 후배”]
[축구계 양대 상 메시와 양분하며 라이벌 구도 구체화]
- 정백강 이름 나오는 순간 울었다 ㅠㅠ
- 믿을 수가 없다 정말 ㅋㅋㅋㅋ
- 2002 월드컵 4강급 감동!!!
-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ㅋㅋㅋㅋ
- 2009년 12월 21일, 정백강이 상 받은 날, 그리고 나한테 여자친구 생긴 날 ㄷㄷ
- 두 번째 건 니 망상이고 ㅋㅋㅋㅋ 어쨌든 대박이다 진짜
- 챔스에서 인터밀란이랑 바르샤랑 만나면 진짜 개재밌겠다
- 나도 그것만 기대하고 있음 ㅇㅇ 진검승부 한 번 해야지
- 인테르가 첼시한테 깨지면?
- 근데 느낌이 왠지 인터밀란이 트레블할 듯
- ㅋㅋㅋㅋㅋ 트레블이 매년 나오는 줄 아나 ㅋㅋㅋ 절대 못함 ㅋㅋㅋ
- 두고 보자고! 가능한지 안한지 ㅡㅡ
나의 수상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이었지만 국가적인 대사건이기도 했다.
대통령까지 축하를 보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뭐.
핸드폰은 거의 불이 날 지경.
한국, 이탈리아, 잉글랜드 등 발신처도 다양했다.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물론이고,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포츠머스 시절 동료들도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해왔다.
쏟아지는 축하들 중에서도 가장 기다렸던 건 역시 엄마의 전화.
“고생했어, 아들.”
과장되지 않은, 그러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담담한 목소리에 참았던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엄마도 나 키우느라 정말 고생했어요.
* * *
꿈만 같은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수상 기념 파티며 행사에 여기저기 불려가다 보니 어느새 2010년 새해가 밝았다.
그 얘기인즉슨, 겨울 이적시장이 열렸다는 뜻.
지난해 우리 팀은 정말 조용한 겨울을 보냈었지만,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에투는 장기 부상을 끊었고, 발로텔리는 어째 믿음직스럽지 못했으니.
트레블을 노리는 입장인 우리로서는 공격진 보강이 절실했다.
문제는 재정 상황.
지난 시즌 나의 영입부터 해서 적잖은 돈을 써온지라 쓸 수 있는 이적료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노릴 수 있는 건 자유계약이었는데...
땡전 한 푼 안 들이고 괜찮은 선수를 데려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인테르, 라치오 공격수 고란 판데브 영입]
[‘멘탈 이슈’ 불구하고 감행한 결정, 효과 있을까?]
[무리뉴, “판데브는 뛰어난 선수, 팀에 큰 보탬 될 것”]
[격분한 라치오 팬들, 길거리에서 판데브 유니폼 태우며 시위]
우리 프런트의 최종적인 선택은 판데브였다.
지난 시즌 라치오에서 37경기 출전, 15골을 기록했던 판데브.
워낙 다재다능해서 미드필더로 출전한 경기도 꽤 있었음을 감안하면 훌륭한 득점력을 보여줬다.
그런데 왜 판데브의 영입이 ‘모험’ 소리를 들었느냐?
이번 시즌 출전한 경기 수가 ‘0’이었기 때문이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뛰기 싫어서’ 안 뛰었다.
- 라치오를 위해 뛰지 않겠다. 이적시켜달라.
이적 요청은 흔한 일이었지만 판데브의 경우에는 이걸 공개적으로 언론에 밝힌 것이 문제가 되었다.
유럽대항전 진출을 목표로 하던 라치오에게, 핵심 선수의 폭탄 발언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분노한 라치오의 수뇌부와 다비데 발라르디니 감독과은 판데브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판데브에게 들어온 모든 오퍼를 거절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시즌이 개막하자 ‘본인의 바람대로’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 라치오의 처사는 부당하다!
정신 못 차린 판데브는 계속해서 언론플레이를 시도했으나, 전반적인 여론은 판데브에게 불리한 쪽으로 돌아갔다.
프로선수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을 했으니 비난받는 건 당연했다.
2009년 12월을 끝으로 마침내 계약이 만료된 판데브에게 남은 건 땅에 떨어진 이미지, 그리고 의문부호가 붙는 경기 감각이었다.
[무리뉴가 쓰레기를 주워 왔다!]
친(親) 밀란 쪽 인물로 유명한 모 기자는 위와 같이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작성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우리 팀 유니폼을 입게 된 판데브.
그의 시즌 첫 경기는 공교롭게도 밀라노 더비였다.
* * *
“고란 판데브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판데브 합류 후 첫 팀 훈련.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일까.
운동을 오래 쉬면 자연스레 몸이 불기 마련인데, 판데브는 오히려 살이 빠져 있었다.
안 그래도 심했던 M자 탈모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고.
“인테르에 온 걸 환영해.”
사네티 주장이 예의 온화한 미소로 따뜻한 인사를 건넸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영 별로였다.
‘프로정신이 결여된 녀석은 싫다’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서였다.
“그런 거지 같은 새끼가 내 자리를 대체한다고? 빨리 나아야 할 이유가 더 생겼네.”
직설적인 성격의 에투는 판데브 이적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을 정도.
신입이 들어오면 통과의례처럼 거치는 주장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도 대부분이 핑계를 대며 빠졌다.
그리하여 모인 최종 멤버는 딱 넷.
나와 문타리만 주장의 초대에 응했다.
정확히 말하면 문타리도 거절하려는 걸 내가 억지로 끌고 온 거지만.
“오붓하고 좋네.”
어색함을 풀려는 주장의 무리수에 그만 울상이 되고 만 판데브.
“동료들이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보니 뭐가 문제였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제가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어요.”
회귀 전의 나도 겪었던 그 병.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바로 그 병.
‘슈퍼스타병’이 만악의 근원이었다.
“지난 시즌 라치오에서 수행한 거의 모든 공격 전술에는 제 이름이 들어가 있었어요. 슈팅이든 패스든 결정적인 역할은 항상 제 몫이었죠. 소속팀에서나 국가대표에나 핵심으로 불리다 보니 교만한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판데브의 국적은 유럽 축구계의 변방 오브 변방, 북마케도니아.
판데브는 최다 출장, 최다 득점 등 대표팀의 모든 기록을 갖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브레이크를 걸어줄 사람이 없었던 거네.”
나의 말에 판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지적이야, 백강. 인테르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어.”
“이유라니?”
“여기서는 내가 스타가 아니잖아. 네가 있고, 사무엘 에투도 있으니까. 마리오 발로텔리도 굉장히 뛰어나고 말이야.”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아무리 평판이 떨어졌다지만 판데브는 판데브.
우리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한 곳이 분명 있었을 터.
돈을 포기하고 왜 우리 팀을 택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보니 본인 스스로가 겸손해지기 위해 족쇄를 채운 거였다.
“감독님은 뭐라고 하셨어? 특별 면담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 주장.
구단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
“허심탄회하게 다 말씀해주셨어요. 결국 영입 승인을 하긴 했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엄청나게 컸고. 선수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많다고요. 심지어 ‘나도 널 별로 좋아하진 않아’라고 하셨죠.”
헐,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거 아닙니까.
나와 문타리가 서로 마주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워낙 노골적으로 말씀하셔서 살짝 상처받을 뻔 했지만, 그다음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하도록 만들어봐. 플레이로 말이지.’라구요. 저, 정말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거참, 동기부여하는 방법도 참 무리뉴스럽다.
일단 성공한 것 같으니 그걸로 된 거겠지.
과정보단 결과가 중요하니까.
* * *
2009년 1월 16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언제나 그렇듯 밀라노 더비는 살벌하다.
- 근본 없는 클럽에 근본 없는 선수.
- 인테르는 폐기물 매립지!
- 다음에 올 쓰레기는 대체 누굴까?
건수 하나 잡은 밀란 팬들은 판데브와 팀을 묶어서 조롱하는 현수막을 잔뜩 준비해 왔다.
“이런 거 익숙해, 괜찮아.”
짐짓 대범한 척 하지만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인다.
오늘 우리 팀의 포메이션은 부활한 4-3-1-2.
나와 판데브의 뒤는 간만에 주전으로 복귀한 스네이더가 받친다.
불륜남, 아마추어, 그리고 FIFA 올해의 선수라는 신박한 조합의 공격진.
뭔가 빌런이 된 느낌이다.
“긴장 풀고 해.”
“알았어.”
국가대표 경기 몇 번 뛴 게 전부라, 당연히 데뷔전은 후보로 나설 줄 알았는데 무리뉴 감독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첫 경기, 그것도 밀라노 더비부터 주전.
용장 밑에는 약졸이 없는 법.
내 밑에서 뛰려면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듯하다.
킥오프.
밀란의 선축으로 판데브의 가혹한 도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