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밀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선수는 ‘돌아온 외계인’ 호나우지뉴였다.
2010년 들어 밀란이 치른 3경기에서 4골을 몰아치며 뜨거운 발끝을 자랑하고 있었다.
덕분에 팀도 3연승 휘파람.
전성기 때의 민첩함이나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원체 탁월한 킥력과 우월한 축구 지능을 십분 발휘하며 한층 원숙해진 플레이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186cm의 장신 스트라이커 마르코 보리엘로가 최전방에서 버텨주고, 1.5선에서 호나우지뉴가 마무리하는 패턴이 요즘 밀란의 밥줄.
뻐엉-
물론 호나우지뉴 혼자 잘해서 성적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전방으로의 볼 배급을 책임지는 두 명의 패스 마스터.
안드레아 피를로와 데이비드 베컴의 존재감 역시 상당했다.
레오나르도 감독은 늙어버린 스쿼드와, 그에 따른 기동력 부족 현상을 쿨하게 받아들이고 대신 강점을 극대화하는 롱볼 축구를 구사했다.
밀란의 ‘영광의 시절’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요즘의 경기력이 좀 아쉬울 수도 있을 터.
허나 이런 실리적인 선택이 없었다면 리그 3위라는 현재 성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뻐엉-
계속되는 롱패스의 향연.
그런데 오늘만큼은 상대가 영 좋지 않았다.
마이콘-루시우-왈테르 사무엘-다비데 산톤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4백 라인은, 피지컬이란 측면에서 이탈리아 최강이었다.
속도와 높이, 양쪽에서 압도하니 아무리 예리한 패스로 경합을 붙여도 수비진의 백전백승.
특히 괴물 같은 신체능력의 루시우에게 일대일로 마크당하는 보리엘로는 완벽한 클로킹 모드였다.
한편 우리 팀의 문제는 공격에 있었다.
오늘 미드필더들의 컨디션이 영 별로라 전방으로의 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
각자의 사정에 따라 전반 15분이 지나도록 슈팅 한 번 나오지 않는 지루한 전개가 이어졌다.
“웨슬리!”
루시우가 또 한 번 헤더로 걷어낸 공.
루즈볼을 차지한 사네티 주장이 스네이더에게 다음 플레이를 맡겼다.
가정사로 인한 슬럼프를 완전히 극복했음을 보여줘야 하는 스네이더.
“여기!”
고란 판데브가 오른쪽 측면으로 크게 돌아나갔다.
젠나로 가투소의 거친 압박을 이겨내며 스네이더가 스루패스를 찔러주었다.
“냅둬! 아웃이야!”
힘이 들어간 탓일까.
상대 센터백 주세페 파발리의 말마따나 패스가 너무 강했다.
“으아아아아!”
누가 봐도 나가는 공이었지만 판데브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촤아악-
마지막엔 슬라이딩 태클까지.
이런저런 대회에서 많이 만났었지만, 판데브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이 광경을 라치오 팬들이 보면 또 분노할지도 모르겠는걸.
“이런 젠장!”
끝내 공을 살리진 못했으나, 많이 늦은 본인의 ‘개막전’을 어떤 각오로 임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느껴졌다.
“좋아! 바로 그거다!”
무리뉴 감독이 허슬을 보여준 판데브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포지션을 불문하고 많이 뛰는 하드워커를 싫어할 감독이 어디 있으랴.
데브 형, 아무래도 방금 플레이로 호감도 1스택 정도는 쌓은 것 같네.
“천천히 하나 가자! 서두를 필요 없어! 잘하고 있어!”
1973년생으로 ‘밀란 노인정’ 중에서도 최고령인 디다 골키퍼가 동료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고참의 이런 파이팅은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뭐, 후배라고 해도 대부분 30줄을 넘긴 베테랑들이라는 건 함정.
투웅-
제공권에서는 완벽하게 밀리는 상황.
디다는 실속 없는 긴 골킥 대신 피를로에게 짧게 연결하는 쪽을 택했다.
“백강! 내가 붙을게!”
원래 우리 팀에서 ‘최전방 수비수’ 자리는 나의 전유물.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것 같다.
“판데브! 너무 오버페이스 아냐?”
“괜찮아. 반년 동안이나 푹 쉬었으니까.”
오오, 고란갓.
초심(初心)을 언제까지 유지할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프런트의 모험은 성공을 거둔 것 같다.
툭-
수비 마인드는 100점 만점에 100점.
하지만 수비 스킬은 10점.
판데브의 의욕은 상당히 좋았지만 ‘축구도사’의 탈압박은 역시 클래스가 달랐다.
킥 페이크 한 방으로 판데브를 따돌린 피를로가 이번에는 직접 공을 몰고 전진했다.
칼 같은 패스를 뿌려줘 봐야 성과가 없으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이젠 후방 플레이메이커로 이미지가 굳어졌고, 그 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젊은 시절의 피를로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도 곧잘 수행했던 선수였다.
피를로의 단독 드리블 돌파는 우리 팀 선수들의 머릿속에 없던 그림.
순식간에 하프라인을 넘어선 피를로가 루시우를 등지고 선 보리엘로에게 땅볼 패스를 깔아 주었다.
모처럼 포스트 플레이를 성공시킨 후 침투하는 호나우지뉴에게 공을 연결하는 보리엘로.
콰앙-
최근 물오른 득점 감각을 뽐내고 있는 호나우지뉴의 슈팅이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날아갔다.
아아아-
밀란 서포터들의 장탄식.
호나우지뉴가 3경기 연속골이라고?
세자르 형님은 7경기 연속 무실점이다, 이 말이야.
절정의 폼을 자랑이라도 하듯, 꽤나 힘이 실린 슈팅이었는데도 깔끔하게 잡아냈다.
“달려!”
상대가 기습을 했으니 우리도 갚아주는 게 인지상정.
피를로의 전진이 워낙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밀란 중원과 수비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세자르 형님이 근육질의 팔뚝을 뽐내며 힘껏 던진 공이 귀여운 문타리의 품에 안겼다.
터엉-
이것은 데자뷔.
오늘 우측면에 엄청난 히트맵을 찍고 있는 판데브에게 문타리의 로빙 패스가 날아갔는데, 딱 봐도 길었다.
“끄아아아아악!”
처절한 슬라이딩 태클까지 데칼코마니.
하지만 이번엔... 기어이 살리고 말았다.
“백강!”
동료가 피똥 싸며 만들어준 찬스다.
이런 걸 놓치면 2009년도 FIFA 올해의 선수라고 할 수 없지.
* * *
[인테르, 밀라노 더비 2-0으로 승리... 리그 6연승 질주]
[이적생 고란 판데브, 1골 1어시스트로 만점짜리 활약 펼치며 우려 불식]
경기 종료 후 기자들 앞에 선 판데브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테르 이적이 결정된 후에도 언론 노출을 극도로 피했던 그다.
- 환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질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이 말부터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라치오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 감독님, 코치님들, 구단 관계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팬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프로선수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경기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대로 ‘환상적’이라는 말이 적당한 표현인 것 같다. 이렇게 좋은 결과는 미처 예상 못 했다.”
- 특히 정백강과의 호흡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시스트를 배달하며 2골을 합작했는데?
“호흡이라고 말하는 게 적절할지 잘 모르겠다. 첫 골 장면은 전력 질주에 태클까지 한 직후라 크로스가 썩 좋지 않았는데, 백강이 말도 안 되는 점프력으로 만든 골이다. 내가 넣은 골도 백강이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내게 밀어준 것이다. 20년 가까이 축구를 해왔지만, 그렇게 정교한 헤더 패스는 처음 봤다. 오늘 경기에서는 ‘호흡’보다는 백강의 ‘배려’가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 마지막으로 인테르 팬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린다.
“이 팀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내가 더 얹을 말이 없을 것 같다. 트레블을 노리는 구단에 온 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뛰겠다.”
인간은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법.
철부지에 개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판데브는 오히려 사고치기 전보다 더 겸손한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나를 띄워준 것도 마음에 들었고.
벌써부터 튼튼한 동아줄을 타는 걸 보니 정치적 감각도 꽤 있는 친구인 것 같다.
“고생했다. 잘했고.”
인터뷰를 마치고 내려온 판데브를 무리뉴 감독이 꼭 안아주었다.
데브 형, 다시 한 번, 인테르에 온 걸 환영해.
* * *
“으이그... 결국 갔네.”
“무슨 소리야?”
“방금 기사 떴어. 유벤투스 말아먹은 페라라 감독, 결국 잘렸어.”
“그렇구나. 그런 김에 너도 가면 안 될까?”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 때가 되면 갈 거니까. 가끔은 나만의 시간도 좀 필요하단 말이야.”
유난히 피곤했던 훈련을 마치고 푹 쉬려고 했는데, 집까지 쫓아온 문타리 녀석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다.
“너만의 시간이 필요하면 혼자 있을 곳을 찾아야지.”
“혼자는 또 외로워서...”
거참, 까다로운 성격이다.
“달링, 다알링 하며 염장이란 염장은 다 지르더니, 무슨 일 있어?”
“있지. 아주 큰일.”
“뭔데?”
“달링이 아이를 갖재.”
크흠.
별일 아닌 걸로 호들갑 떠는 거겠지 싶었는데, 확실히 큰일이긴 하다.
“그렇구나...”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문타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계속 응시한다.
이 신호는?
“설마 내 조언을 듣고 싶은 거야?”
“정답.”
어렵네.
방년 23세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풍부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문타리의 멘토 역할을 해온 나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나도 경험이 없다.
“흠... 돈코르 씨에 대한 마음에 변함은 없겠지?”
“물론. 달링이랑은 평생 함께 할 거야. 너도 알다시피 달링은 내 운명의 여ㅈ...”
“아, 됐고. 그러면 문제없는 거 아냐?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억 인구가 하는 일이잖아.”
“좀 창피한 얘기긴 한데... 사실은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어.”
참으로 문타리스러운 고민이다.
이렇게 소심한 양반이 미국에서 그 미친 프로포즈는 어떻게 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래서 자꾸 운명이라고 하는 거겠지만.
그나저나 뭐라고 얘길 해야 우리 귀여운 타리 형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니 한 줄기 길이 보였다.
이윽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나의 혓바닥.
“엄마 혼자 나를 키운 건 알지?”
“그럼, 물론이지.”
“그래서 나는 좋은 아빠라는 게 뭔지 사실 잘 모르겠어. 좋은 아빠란 뭘까?”
“음... 역시 아빠라면 강인해야겠지. 어떤 난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는 그런 남자 말이야. 근데 아무래도 나랑은 거리가 먼 것 같아.”
예상대로다.
문타리의 걱정 포인트는 본인의 다소 여린 성격이었다.
원인을 정확히 알면 처방도 쉬워진다.
“자, 그렇다면 내가 하나 물어볼게. 굉장히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야. 근데 수틀리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해. 이 사람은 좋은 아빠일까?”
“그건 당연히 아니지만...”
“또 있어. 강인하고 가족들에게 손도 안 대지만, 사업 감각이 없어서 하는 일마다 말아먹는 아빠가 있다고 쳐. 과연 좋은 아빠일까?”
“...”
자꾸 자신의 결핍을 이야기하는 문타리 녀석에게 본인이 뭘 갖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
그게 내가 찾아낸 방법이었다.
“너한테 좀 여리고 나약해 보이는 구석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선수고, 아이를 축구팀만큼 낳아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내를 사랑하는 스윗한 남자지. 너는 ‘좋은 아빠’라고 뭉뚱그려 얘기했지만, 정답은 없는 거야.”
문타리는 어느새 입을 헤 벌린 채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지금이 결정타를 날릴 타이밍이다.
“그리고 너는 지금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어.”
“어떤 거?”
“돈코르 씨 말이야. 너의 피앙세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물론이지. 달링은 완벽한 여자니까. 분명 환상적인 엄마가 될 거야. 200% 확신해.”
“그렇게 훌륭한 돈코르 씨가 아이의 아빠로 선택한 남자가 바로 너란 말이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돈코르 씨가 그런 중요한 결정을 잘못할 사람이야?”
“아니지!”
“오케이! 고민 해결!”
“그래!”
문타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너한테 상담하길 잘했어, 백강. 나, 지금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아기를 만들러 말이지.”
그거, 10년 후의 한국 사람들은 ‘TMI’라고 부르는 거야.
어쨌든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