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유벤투스, 치로 페라라 후임으로 알베르토 자케로니 선임]
[4개월짜리 단기 계약, 이번 시즌 성적에 모든 게 달렸다]
페라라 감독의 경질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리그에서 6위, 챔피언스리그 32강 탈락.
‘유벤투스’라는 팀의 명성을 생각하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성적이었으니.
이제 유벤투스가 노려볼 수 있는 트로피는 단 두 개.
코파이탈리아와 유로파리그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케로니의 취임 일성.
“무관으로 시즌이 끝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개차반인 팀 성적과 침체된 팀 분위기를 생각하면 아주 과감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자케로니의 폭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취임 이튿날 삭발을 감행한 것이다.
삭발의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자케로니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머리를 밀었다고 해서 당장 무언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마음이 좀 과하게 전해진 것일까.
유벤투스에 갑자기 삭발 열풍이 불었다.
처음으로 자케로니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은 인물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팀의 주장으로서 시즌 실패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
이어서 잔루이지 부폰과 파비오 그로소, 아마우리,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 등 주요 선수들도 동참했다.
원래 민머리였던 선수들까지 더해 순식간에 ‘빡빡이 군단’으로 탈바꿈한 유벤투스는, 난적 로마를 원정에서 1-0으로 잡아내며 그 효과를 제대로 봤다.
승리에 고무된 자케로니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엄청난 도발을 시전했다.
“똘똘 뭉친 우리는 이탈리아 최강이다. 앞으로 우리를 만나는 모든 상대는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착각은 자유고, 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워딩인 것도 알겠지만, 이번에는 선을 제대로 넘었다.
‘자칭 최강’이라는 유벤투스의 다음 상대가 ‘진짜 최강’인 우리 팀이었으니.
그것도 단판 승부인 코파이탈리아 8강전이었다.
가만있다가 저격을 당한 무리뉴 감독.
조용히 넘어갈 인물이 아니지.
“만약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우리가 패한다면 나도 머리를 밀어버리겠다.”
유럽 4대 리그의 컵대회 중 가장 인기 없기로 유명한 코파이탈리아가, 때아닌 삭발 논쟁으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2010년 1월 28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희대의 ‘삭발빵’을 지켜보기 위해 구름 관중이 들어찼다.
“감독님 말야, 정말 밀어버릴 생각이실까?”
어째 매우 피곤해 보이는 문타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런 걸 왜 걱정해? 이기면 되는걸. 그리고 경기 전엔 좀 참았어야지.”
“티 나? 요즘 노력 중이다 보니...”
“엄청 나. 하여간에 경기 중에 비실대는 모습만 보여 봐. 내가 감독님한테 바로 교체 요청할 거니까.”
“에이, 축구할 체력은 또 따로 있지.”
사진으로는 이미 봤지만 막상 마주하니 느낌이 또 다르다.
주전 라인업 중 태반이 머리를 민 이색 풍경.
막상 경기 들어가서 급박한 상황을 마주하면 누가 누군지 헷갈릴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그 와중에 마르키시오는 나를 또 화나게 만들었다.
저런 머리를 해도 잘 생겼다니...
축구라도 내가 더 잘해서 다행이다.
오늘 경기는 4-3-1-2 대 4-3-1-2의 데칼코마니 대결.
유벤투스 부동의 오른쪽 윙어인 마우로 카모라네시가 부상으로 출전을 못 하게 되자, 대체자가 마땅찮았던 자케로니 감독은 아싸리 윙 없는 전술을 들고나왔다.
덕분에 중앙에서의 힘싸움은 볼만할 예정.
메시, 호날두, 리베리, 로벤...
월드클래스 윙어들은 왜 죄다 다른 리그에 있는지.
이번 시즌 유독 심각한 측면 자원 고갈 현상을 보이고 있는 세리에다.
“자! 감독님 머리를 지켜드리자!”
“푸하하핫!”
“주장, 미쳤어요? 크크큭.”
사네티 주장이 센스 있게 외친 파이팅에 동료들이 다 빵 터졌다.
성적이 워낙 좋다 보니 팀 분위기는 최고조.
밀라노 더비를 통해 이미지 반전에 성공한 고란 판데브도 점점 적응해 가고 있고.
올해야말로 트레블을 해야 하는데, 겨우 8강전에서 유벤투스 같은 중위권 팀에게 발목을 잡힐 순 없지.
킥오프.
“어우 야, 얘네 뭐야?”
경기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타리가 짜증을 내뱉었다.
유벤투스의 오늘 콘셉트는 확실해 보였다.
무지무지하게 거친 축구.
자케로니 감독이 이탈리아 최강을 운운하며 헛소리를 했지만, 이번 시즌 유벤투스가 완전히 망가진 팀이라는 건 팩트였다.
골을 못 넣는 공격진, 영향력이 부족한 중원, 불안한 수비까지 3박자를 고루 갖췄으니 말이다.
부족한 실력을 악과 깡으로 메우겠다는 뜻 같은데...
“으아악!”
펠리피 멜루의 거친 보디체크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티아고 모타.
킥오프 6분 만에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너 이 개 같은 새끼! 일부러 그랬지?”
정말 간만에 선발로 나온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이 ‘원조 욕쟁이’ 면모를 과시하며 멜루에게 달려들었다.
“마르코, 하지 마!”
주장이 말리지 않았다면 주먹다짐까지 갈 수 있었던 분위기.
그 와중에 살짝 쫀 듯한 멜루의 표정은 꿀잼이었다.
안토니오 다마토 주심이 일단 멜루에게 경고를 준 후, 양 팀 주장을 호출했다.
“너무 거칠어요. 특히 유벤투스 쪽. 도를 넘는 파울이 나오면 바로 레드카드 꺼낼 겁니다. 주의하세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 경기 재개.
늘 그렇듯 심판의 당부는 큰 효험이 없었고, 제2호 피해자가 발생했다.
오버래핑 과정에서 조르조 키엘리니와 맞부딪친 마이콘이었다.
드리블 돌파 저지에 실패하자 뒤쪽에서 발목을 걷어찬 악의적인 파울.
휘슬이 울리고, 쓰러졌다 일어난 마이콘이 키엘리니를 밀쳐 버렸다.
나도 처음 보는 마이콘의 극대노한 모습.
다마토 주심은 두 선수 모두에게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10분 만에 벌써 노란 거 3장.
이런 개싸움 모드는 전력상 우위에 있는 우리에게 절대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
뻐어엉-
봐봐, 이렇게 된다니까.
30m 거리에서 시도한 스네이더의 무리한 중거리슛이 골문을 훌쩍 넘어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플레이.
흥분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그렇게 되면 이상행동이 나오기 마련이다.
아마우리 쪽을 겨냥한 부폰의 긴 골킥.
이번 시즌 모든 대회 통틀어 4골에 그치며 좀 다른 의미의 역대급 시즌을 보내고 있는 아마우리.
본인도 느낀 바가 있었는지, 삭발 대열에 바로 합류했었다.
삐빅- 삑-
아이고야.
‘말렸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리라.
아마우리와 경합했던 루시우가 쓸데없는 파울로 프리킥 기회를 헌납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위치에서는 절대 주면 안 되는데...
알레- 알레- 알레산드로-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시끌시끌해지는 원정팀 응원석.
서른다섯 나이에 팀 득점 선두로 ‘중년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델 피에로가 키커로 나섰다.
프리킥 능력만 따지면 전 유럽을 통틀어도 델 피에로 위에 놓일 선수가 거의 없었다.
여기에 불안 요소 하나 더.
오늘 우리 팀의 주전 골리는 세자르 형님이 아닌 프란체스코 톨도 형님이었다.
컵대회에서는 서브 골키퍼를 쓰는 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엄습하는 불안감은 어쩔 수...
이예에!!!
그림 같은 궤적의 프리킥을 성공시킨 델 피에로가 혓바닥을 내민 채 팬들을 향해 달려갔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 * *
무적 포스의 인테르, 무관 포스의 유벤투스.
장소는 주세페 메아차.
모두가 우리의 승리를 점쳤던 경기였지만, 공이 참 둥글긴 했다.
상대 육탄 공세에 말리고, 선제골까지 내준 우리 팀은 전반전 45분 동안 정말 형편없는 게임을 펼쳤다.
‘범인 찾기’가 의미 없을 정도로 11명 전부 다 최악 오브 최악.
유벤투스의 골 결정력이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면 아마 점수 차는 더 벌어졌을 거다.
하프타임.
라커룸으로 돌아온 선수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무리뉴 감독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지금 페이스라면, 무리뉴 감독의 민머리를 보게 될 공산이 컸다.
“내게 망신을 주고 싶은 생각은 잘 알겠는데 말이지.”
무리뉴 감독은 딱히 화를 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축구는 승부고, 승부에선 질 수도 있지. 하지만 모든 패배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너희들은 지금 유벤투스에게 밀리는 상황을 납득할 수 있나?”
그럴 리가 있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여러분들과 내가 함께 만든 인테르라는 팀은 절대 이렇게 무력하지 않다. 끝끝내 져도 좋다. 내가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경기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일장 연설을 마친 무리뉴 감독이 한 템포 쉬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완벽한 완급조절.
“지금 내가 한 말이, 혹시 어려운 부탁인가?”
“아닙니다!”
무리뉴 감독의 말이 옳았다.
전반전 결과는 유벤투스가 잘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더럽게 못 했을 뿐.
이런 식의 패배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저 버러지 같은 새끼들. 박살 내러 가자!”
마테라치 형님의 걸걸한 한 마디에 사기충천한 네라주리.
후반전엔 다를 거다, 기대해라.
* * *
양 팀 모두 선수 교체 없이 후반전을 맞이했다.
퍼억-
이기고 있긴 하지만 유벤투스의 거친 축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뀐 것은 우리의 대응.
파울을 당하면 당하는 대로 그냥 벌떡 일어나 태연하게 프리킥을 연결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우리가 같이 흥분해주지 않으면, 상대의 거친 파울은 심리전이 아닌 더티플레이가 될 뿐이었다.
필드 플레이어 10명 중 5명이나 경고를 받았다는 것도 유벤투스의 불안 요소.
4-3-1-2가 원래 메인 전술인 우리의 팀워크는 유벤투스를 압도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반코트 게임.
일단 중원에서 먹고 들어가자 마이콘이 날뛸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미 경고를 하나 안고 있는 키엘리니는 심장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는데, 소극적인 수비로는 마이콘을 제어할 수 없었다.
경기 흐름을 제대로 읽은 스네이더는 마이콘 쪽으로 대놓고 볼을 몰아주었다.
그리고 후반 10분.
완전 탄력 받은 마이콘의 단독 돌파에 유벤투스의 측면이 허물어졌다.
키엘리니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 간 후, 백업 들어온 왕년의 발롱도르 위너 파비오 칸나바로까지 농락한 마이콘이 골문 좌측 상단을 노리고 대포알 슈팅을 날렸다.
동시에 몸을 날리는 부폰.
까앙-
작정하고 때린 마이콘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강타하며 튀어나왔다.
“끄으아아앗!”
인테르 합류 이후, 루즈볼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난치병에 걸린 판데브가 기합을 내지르며 공을 따냈다.
부폰은 아직 미처 일어나지 못한 상황.
먼 포스트로 감아 차면 충분히 득점을 노릴 수 있었지만, 겸손한 판데브는 이럴 때의 모범답안을 알고 있는 남자였다.
“백강!”
독야청청(獨也靑靑).
수많은 완삭과 반삭들 사이에서 홀로 불쑥 솟아오른 나의 머리에 판데브의 크로스가 예쁘게 안겼다.
Grande- Testa!
Grande- Testa!
수만 명의 ‘정백강 신도’가 이마를 두드리는 가운데 전광판의 숫자가 1-1로 바뀌었다.
감독님의 머리,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