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인테르, 유벤투스 3-1로 꺾고 코파이탈리아 4강 진출]
[‘2명 퇴장’ 유벤투스, 경기도 지고 매너도 지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이미 밑천이 다 드러난 유벤투스.
동점골이 터진 순간 사실상 게임 오버였다.
마이콘에게 줄곧 털리던 조르조 키엘리니가 기어이 두 번째 옐로카드를 받으며 퇴장당한 게 결정타.
후반 23분에는 나의 헤더 패스를 받은 스네이더의 중거리포가 골문을 가르며 역전.
이후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유벤투스 녀석들은 변변한 공격 한 번 못 해본 채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펠리피 멜루의 퇴장과 나의 쐐기골은 보너스.
“승리한 것, 그리고 내 머리카락을 지킨 것에 만족한다. 사실 아내가 걱정을 많이 했었다. 가뜩이나 좋은 인상이 아닌데, 삭발을 하면 더 무서워 보일 것 같다고 말이지.”
하프타임의 ‘헤어드라이어’가 제대로 작동하며 승리를 거머쥔 무리뉴 감독이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짓궂은 기자들은 패장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에게 며칠 전 했던 ‘이탈리아 최강’ 드립에 대한 질문을 던져댔다.
“경솔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참한 패배에 면목이 없어진 자케로니 감독이 씁쓸히 고개를 숙였다.
8강전에서 유벤투스를 꺾은 우리는, 5일 뒤 열린 피오렌티나와의 4강 1차전에서도 1-0 승리를 거두며 결승 진출을 목전에 뒀다.
트레블을 향한 여정은 그렇게 착실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 * *
“아니, 정말 괜찮은 거 맞어?”
“그러게. 팀닥터가 뭘 잘못 본 게 아닐까?”
“크하핫, 이 몸은 너희 같은 일반인들하곤 차원이 다르다고!”
이 오만한 남자, 사무엘 에투가 돌아왔다.
작년 11월 로마전에서 발목 인대 파열로 4개월 진단을 받았었는데, 불과 3개월 만에 팀 훈련에 복귀했다.
정말 짐승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의 회복력.
“너, 잘하더라. 열심히 뛰는 게 눈에 딱 보이던데?”
그렇게 욕했던 판데브와의 첫인사도 무난히 마친 에투.
“중요한 때에 잘 돌아와 줬다.”
무리뉴 감독의 말처럼 에투의 복귀 타이밍은 환상적이었다.
앞으로 세 번의 리그 경기를 더 치르고 나면, 대망의 챔피언스리그 16강전.
난적 첼시와의 승부를 앞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장 주전 출장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감독님!”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단은 교체로 뛰면서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
칼리아리전에서 15분, 나폴리전에서 30분.
그리고 마지막 경기인 삼프도리아전에서 후반 45분을 통으로 뛴 에투는 복귀골까지 신고하며 컨디션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했다.
“솔직한 심정? 반가운 소식이 아님은 분명하다.”
바다 건너 런던에서 이 소식을 들은 첼시 감독 카를로 안첼로티는 에투의 복귀에 대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잔뜩 신이 난 에투는 기자들 앞에서 호기롭게 선언했다.
“난 첼시와의 1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으면 혹시 몰라.
* * *
2010년 2월 24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두 명의 특급 공격수, 에투와 디디에 드록바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에투 VS 드록바’는 한국팬들 사이에서도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는 떡밥.
예전에 이에 대해 에투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대답은 들어보나 마나였다.
“당연히 나지! 시발. 디디에도 괜찮게 하는 녀석이지만, 역시 내가 한 수 위라고.”
유독 반응이 격한 걸 보니 본인 스스로도 꽤나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너무나도 중요한 경기.
양 팀 모두 뚜렷한 전력 누수 없이 베스트 일레븐을 출동시켰다.
구멍이 안 보이는 철의 4백 라인.
활동량이 돋보이는 탄탄한 중원.
거기에 선 굵은 축구 스타일까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닮은 부분이 많은 두 팀 간의 매치업이다.
축구계에서 손꼽히는 명장인 무리뉴와 안첼로티의 맞대결이라는 점도 큰 관심거리.
사이가 절대 좋다고는 볼 수 없는 두 사람이었는데, 이번 경기를 앞두고 별다른 설전은 없었다.
말로 떠들기보다, 실력으로 보여주겠다는 의지인 걸까.
“아자! 가보자! 시발!”
에투가 파이팅 넘치게 소리를 질러댔다.
해트트릭하겠다고 질러 놓은 것도 있고, 드록바와의 라이벌리도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거기다가 2010년 들어 첫 선발 출전이었으니.
여러모로 동기 부여가 잘 되어 있는 에투였다.
킥오프.
뻐엉-
미리 준비된 패턴이 있는 듯, 미하엘 발락이 공을 잡자마자 왼쪽 측면으로 장거리 패스를 시도했다.
택배 수신자는 플로랑 말루다.
한국의 첼시팬들이 ‘말루 다 할 수 없는 플레이를 펼치는 말루다’라며 극찬하는 선수였다.
이번 시즌 폼으로만 보면 충분히 EPL 톱클래스 윙어라고 불릴 만했다.
공을 받은 말루다는 곧바로 드록바를 겨냥해 얼리 크로스.
루시우의 끈덕진 방해를 뚫고 머리에 공을 맞춘 드록바에게서 오늘 경기 첫 슈팅이 나왔다.
비록 크게 빗나가긴 했지만 단 두 번의 킥과 한 번의 헤더로 공격 작업을 마무리한 첼시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역시 강팀은 다르네.
하지만 우리도 질 수 없지.
이번에는 세자르 형님이 힘껏 내지른 골킥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백강! 여기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며 첼시의 뒷공간으로 파고드는 에투.
나의 정밀한 헤더 패스가 좋은 타이밍에 전달되었다.
첼시 입장에선 아찔한 순간, 그러나 한발 앞서 나와 있던 페트르 체흐 골키퍼가 몸을 날리며 공을 낚아챘다.
나에게서 에투로 이어지는 침투 패턴은 우리 팀의 주요 득점 루트 중 하나.
분석이 충분히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상대도 호락호락 당해주진 않을 터.
“나이스! 페트르!”
주장 존 테리가 신명나는 박수로 동료의 파인 플레이에 찬사를 보냈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좋은 득점 기회를 한 번씩 주고받으며 뜨겁게 달아오른 경기장 분위기.
발락이 다시 한 번 공을 잡고 전방을 살폈다.
오늘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선 발락인데, 안첼로티 감독에게 ‘피를로 롤’, 즉 후방 플레이 메이킹을 지시받은 것 같다.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로 오른쪽 측면으로 볼을 전개.
니콜라스 아넬카가 오른발을 높이 들어 고난도 트래핑을 선보였다.
첼시 부임 이후 다양한 공격 전술을 실험했던 안첼로티 감독은, 최종적으로 말루다-드록바-아넬카의 3톱에 정착(?)했다.
파괴력 넘치는 피지컬과 연계 능력을 갖춘 드록바, 폭발적인 드리블로 돌격대장 역할을 수행하는 말루다, 타고난 센스와 다재다능함으로 공격진 어디에서나 제 몫을 하는 아넬카.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명의 조합은, 이번 시즌 모든 대회 통틀어 51골을 합작하며 그 위력을 뽐내고 있었다.
아넬카는 단독 플레이 대신 마이클 에시앙과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야금야금 전진.
“자리 지켜! 자리! 너무 나서지 말고!”
중앙 미드필더로 나선 사네티 주장이 다비데 산톤에게 끊임없이 콜을 하며 수비 위치를 지정해 주었다.
지난 시즌만 하더라도 ‘공격엔 발로텔리, 수비엔 산톤’이라고 할 정도로 초특급 유망주로 인정받았던 산톤.
그러나 이번 시즌에는 오히려 퇴보한 듯한 모습으로 팬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었다.
발로텔리의 문제가 사생활 관리 실패라면, 산톤은 거듭되는 무릎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중요한 경기에 선발로 나선 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게 산톤의 숙제.
이를 지나치게 의식한 탓일까.
주장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공을 빼앗기 위해 아넬카에게 달려들었는데 이게 큰 실수였다.
터엉-
앞의 패스들은 일종의 미끼.
수비가 붙자마자 드리블 돌파를 시도한 아넬카가 놀라운 스피드로 순식간에 산톤을 따돌리며 질주했다.
우와... 아넬카가 저렇게 빨랐나?
“젠장!”
산톤이 뒤늦게 따라붙었지만 이미 늦은 상황.
루시우는 드록바를 꽉 붙잡아야 했기 때문에, 대신 사무엘 형님이 측면 쪽으로 백업을 들어갔다.
덕분에 생긴 페널티박스 안쪽의 공간은 캄비아소가 대신 메워 주고.
빠르게 잘 대처했네... 라고 생각했는데.
첼시에 있는 또 한 명의 득점 머신이 골 냄새를 맡고 등장했다.
이번 시즌 드록바 다음으로 많은 골을 집어넣고 있는 사나이.
‘세계 최고의 미들라이커’ 프랭크 램파드가 그 주인공이었다.
“컷백 조심해요!”
캄비아소의 위치 변경으로 인해 생긴 공간을 절묘하게 파고든 램파드의 발 앞에 아넬카의 땅볼 패스가 연결되었다.
오른발을 뒤로 쭉 빼며 다이렉트 슈팅 모션을 가져가는 램파드.
캄비아소가 아차 싶었는지 몸을 날리며 슈팅 경로를 막았다.
그러나 이건 페이크.
캄비아소를 농락하며 한 번 접은 램파드가 왼발로 공을 옮겼다.
램파드는 오른발이 주발이지만, 왼발 슈팅에도 일가견이 있는 선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퍼억-
삐빅- 삐비비빅-
* * *
우우우- 우우우-
주세페 메아차가 삽시간에 엄청난 야유의 도가니로 변모했다.
홈팀 원정팀 응원석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이 야유에 합류.
잔디 위에 물병을 집어 던지는 관중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전반 9분, 램파드가 페널티박스 바로 앞에서 슈팅 찬스를 잡은 바로 그때, 수비에 가담한 티아고 모타의 아주 깊은 백태클이 작렬했다.
당연히 파울이었는데, 이게 단순한 파울 한 개로 끝나지 않았다.
즉각 휘슬을 불며 달려온 마누엘 곤살레스 주심이 꺼내든 카드 색깔은 놀랍게도 빨강.
경고까지는 각오했지만 퇴장은 생각도 못했던 모타가 거의 눈물을 흘릴 듯한 기세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니까 홈팬들의 야유는 곤살레스 주심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비극이 더 있었으니.
“크악! 크아아악!”
세계 축구계에서 손꼽히는 ‘철강왕’인 천하의 램파드가 발목을 부여잡은 채 좀처럼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신속하게 의료진이 투입되었고, 상태를 확인한 첼시의 팀닥터는 안첼로티 감독에게 교체 사인을 주었다.
너무도 때 이른 퇴장과, 핵심 선수의 부상 이탈.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만 그라운드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격분한 첼시 선수들은 모타에게 달려들며 위협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우리는 우리대로 모타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접촉이 발생했다.
경기 전만 해도 서로 껴안으며 훈훈함을 과시하던 에투와 드록바는 서로 쌍욕을 퍼부으며 옐로카드를 사이좋게 나눠 받았고, 사무엘 형님과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도 노란 딱지의 희생양이 되었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면 바로 퇴장입니다!”
곤살레스 주심의 최후통첩이 떨어지고야 비로소 상황이 일단락됐지만, 여전히 선수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감독들의 움직임도 다급해졌다.
허무하게 에이스를 잃은 안첼로티 감독이 내민 카드는 조 콜 투입.
뛰어난 기술과 창의력을 겸비한 콜이라면 수적 우위를 살리며 골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리라.
모타의 공백을 해결해야 하는 무리뉴 감독의 선택도 주목되는 상황.
선수 교체냐, 전술 변화냐.
“나, 벌써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아직 몸도 안 풀렸다고! 시발!”
에투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리뉴 감독이 교체를 택한다면 1순위는 단연 에투.
11 대 10이 된 순간 현실적 목표는 무승부라 할 수 있었고, 버티려면 공격수를 빼는 게 이치에 맞았다.
차마 2009년도 피파 올해의 선수를 빼진 못할 테니, 에투의 근심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무리뉴 감독의 판단은...
“백강! 포지션 변경이다! 미드필더로 내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