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무리뉴 감독은 에투를 경기장 위에 남겨두는 대신 나의 포지션을 변경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태클 한 방으로 쿨하게 떠난 티아고 모타의 자리는 이제 내 몫이 되었다.
까짓거, 한 번 해봅시다.
에투만 최전방에서 역습을 노리고 나머지 9명은 두 줄 수비 대형으로 진을 쳤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무려 80분.
프랭크 램파드의 부상 소식은 뼈아프지만, 첼시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힘들 거라 여겼을 원정 경기에서 수적 우위를 가져가게 됐으니 말이다.
“더 공격적으로 밀어붙여!”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전진을 지시했다.
이윽고 시작된 파상공세.
첼시 선수들은 인원이 밀집된 중앙보다는 측면 쪽에서 활로를 찾았다.
왼쪽의 플로랑 말루다-애슐리 콜, 오른쪽의 니콜라스 아넬카-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 라인이 번갈아 가며 크로스 세례.
페널티박스 바깥에서는 미하엘 발락과 마이클 에시앙이 호시탐탐 중거리슛 찬스를 노렸다.
거기에 램파드 대신 투입된 조 콜의 번뜩이는 드리블과 스루패스도 견제해야 했으니.
한마디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백강! 발락 좀 봐줘!”
“콜 올라오는 거 잡아야 돼!”
“드록바 마크 오케이! 아넬카 침투한다! 조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세 사람의 공이 컸다.
브라질 대표팀의 주장답게 4백 라인을 훌륭히 통솔하는 루시우.
높은 축구 이해도로 미드필더들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는 사네티 주장.
그리고 든든한 수문장 세자르 형님.
‘남미 3인방’을 주축으로 똘똘 뭉친 우리 팀은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마치는 데 성공했다.
하프타임.
“후욱... 후욱...”
“아이고, 죽겠네.”
“힘들긴 하다, 그치?”
“주세페 메아차가 이렇게 넓은지 미처 몰랐네.”
라커룸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렸다.
11명이서 책임지던 공간을 10명이서 커버하다 보니 평소보다 체력 소모가 훨씬 심했다.
“백강, 괜찮나?”
무리뉴 감독은 내 상태가 가장 걱정되는 듯했다.
나만 평소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 없습니다.”
힘든 건 사실이었지만 교체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지간하면 풀타임을 뛴다고 생각해라. 너는 도저히 빼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공중볼 경합에서 승률 100%를 보장해주는 나의 존재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기에서 오히려 빛을 발했다.
첼시처럼 피지컬 좋은 팀을 상대할 때는 더욱 그렇고.
“미처 생각도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후반전은 아마 더욱 힘든 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부디 버텨다오. 우리는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
물론이죠.
올해 빅 이어는 누가 뭐래도 우리 겁니다.
* * *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첼시의 선수 교체가 있었다.
수비수 이바노비치를 빼고, 살로몬 칼루를 투입하는 안첼로티 감독.
스트라이커와 양쪽 윙어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 포워드 칼루는 드록바와 같은 코트디부아르 출신이었다.
소속팀에서나 국가대표에서나 늘 같이 뛰니, 드록바와의 호흡은 검증된 선수.
우리 수비진이 신경 써야 할 대상이 한 명 늘어난 셈이었다.
첼시가 페널티박스 안쪽에 인원 배치를 늘리면서, 우리 전술에도 변화가 생겼다.
“백강! 센터백 자리까지 내려가!”
EPL 득점왕, 세리에 득점왕,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빛나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정백강의 센터백 전격 복귀.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터엉-
파아앙-
“공중으로 오는 건 제가 잡을게요! 땅볼 패스만 막아 주세요!”
루시우와 사무엘 형님이 밑에서 버텨주고 공중볼은 내가 처리하는 완벽한 분업 체계.
드록바, 칼루, 아넬카, 심지어 헤더로 정평이 난 존 테리까지 올라와 공격 가담을 했지만 우리의 철벽을 뚫지는 못했다.
앞쪽에서 미친 듯 뛰어다니며 패스 경로를 차단해준 캄비아소, 문타리, 사네티 주장의 공헌도 엄청났다.
생각보다 크로스 패턴과 패싱 게임이 잘 풀리지 않자 안첼로티 감독이 말루다의 드리블링 빈도를 확 높였다.
일단 한쪽에서 균열을 만든 후에 빈틈을 파고들겠다는 생각.
그러나 우리의 ‘오른쪽’에는 마이콘이 버티고 있었다.
말루다와 애슐리 콜의 협공을 거의 혼자 몸으로 막아내는 마이콘의 수비력은 경이로울 정도.
평소 뛰어난 공격력 때문에 묻히는 감이 있었는데, 작정하고 수비하니 이렇게 단단할 수가 없었다.
10분... 20분... 그리고 30분.
고지가 가까워 오자 무리뉴 감독은 에투 대신 크리스티안 키부를 투입하면서 아예 공격을 포기해 버렸다.
“조금만 더 버티자!”
정신적 지주 사네티 주장은 끊임없이 파이팅을 외치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0-0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삐익-
세상사는 그렇게 맘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 * *
[첼시, 인테르 1-0으로 누르며 챔피언스리그 16강 서전 장식]
[드록바 페널티킥 결승골... “램파드를 위해 2차전도 반드시 승리할 것”]
[잘 버텼지만... 끝내 빛 바랜 인테르의 분전]
- 진짜 잘했는데... 비기는 줄 알았다 ㅠㅠ
- 그러게. 오늘 산톤은 진짜 역적 of 역적임
- 사실 모타 퇴장도 산톤 삽질부터 시작이지 ㅋㅋ
- ㅇㅈㅇㅈ 혼자 다 말아먹음
- 그래도 정백강 센터백은 진짜 기막힌 전술이었음
- 레알 ㅋㅋㅋ 그냥 벽 하나 세워둔 것 같더라
- 앞으로 꼭 잠가야 되는 경기면 그냥 수비수로 써도 될듯?
- 그게 메시와의 차이임 ㅇㅇ 메시는 혼자 캐리가 되는 선수라 어떻게든 골을 넣었을 거임. 정백강은 그게 안 되니까 수비로 쓴 거지
- 지랄하네 ㅋㅋㅋ 오늘 정백강 아니었으면 3골은 넘게 먹혔다 ㅋㅋㅋ 경기나 좀 보고 댓글 달아라
첼시와의 1차전은 다비데 산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경기였다.
전반전에 아넬카에게 허무하게 뚫리며 램파드에게 기회를 헌납했던 산톤.
이후 무난무난한 수비로 잘 마무리하나 싶었는데, 후반 37분 아넬카의 돌파를 저지하려다가 치명적인 파울을 범하고 말았다.
이제 겨우 열아홉 살.
아직 어린 산톤에게 이 팀 저 팀 옮겨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아넬카는 ‘인간상성’ 그 자체였다.
딱 10분만 버텼으면 됐는데...
말 그대로 통한의 페널티킥.
좋은 선방을 여러 차례 보여준 세자르 형님의 손끝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봤지만, 드록바는 이런 기회를 놓칠 선수가 아니었다.
공물 왼쪽 상단을 노린 대포알 슈팅으로 오늘 경기의 유일한 골을 만들어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산톤이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괜찮아, 괜찮아.”
“크흐으어엉엉. 죄송합니다...”
사네티 주장에 위로에 설움이 복받친 산톤은 부끄러움도 잊고 대성통곡을 했다.
“특정 선수에 대한 비난은 지양해주길 바란다. 모든 책임은 감독인 나에게 있다.”
무리뉴 감독은 모타와 산톤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 후 인터뷰에서 못을 박았지만, 그런다고 조용히 할 언론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두 선수를 비난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37경기 만에 당한 이번 시즌 첫 패배.
그 아픔은 생각보다 깊었다.
* * *
“비행기 탔어?”
“아니, 아직.”
“잘 다녀오고, 디디에한테 꼭 복수해줘. 시발.”
“물론이지.”
에투가 전화를 다 한 걸 보니 매우 분하긴 분했나 보다.
아프리카 최고 선수 자리를 두고 자존심 대결을 펼쳤는데, 공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보고 드록바한테 결승골까지 내줬으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갈 만도 하다.
그나저나 런던은 정말 오랜만이군.
기억을 더듬어 보니 거의 2년 만인 것 같다.
EPL을 떠난 이후 첫 런던행.
인테르에서 내 입지가 워낙 특별하다 보니, 아시아권에서 열리는 경기에서는 나를 거의 부르지 않는 허종무 감독.
하지만 이번 경기는 런던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부담 없이(?) 차출 요청을 했다.
상대는 코트디부아르.
친선경기이긴 하지만 우애와 친목보다는 월드컵 본선 준비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경기다.
허투루 치를 게임은 아니라는 이야기.
거기다 에투의 부탁도 들어줘야 하고 말이지.
* * *
“와우! ‘피올선’께서 등장하셨네.”
“피올선이요? 그게 뭐예요?”
“뭐긴 뭐야. 피파 올해의 선수지.”
국가대표팀 동료들이 나를 부르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좀 민망하긴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자랑스러운 칭호이기도 하다.
“나, 시상식 생중계로 보다가 울었다니까?”
“백강아, 이 형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아니? 이게 다 하나님 덕분이란다.”
“선배님 수상소감도 진짜 멋있었어요.”
“메시가 다 뭐야. 네가 최고지.”
벌써 작년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나의 수상은 여전히 엄청난 화젯거리였다.
“네가 있어 든든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허허허.”
허종무 감독도 말을 보탰다.
이해합니다...
자신이 이끄는 대표팀에 최고의 선수가 있다는 것.
이는 전술을 구상하고 성적을 내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지만, 반대급부로 실패했을 경우의 비난 역시 훨씬 커질 수밖에 없었다.
비유하자면 ‘독이 든 성배’나 ‘양날의 검’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내가 뛰지 않은 A매치에서 비기거나 패할 때마다 허종무 감독에게는 엄청난 양의 악플이 달리곤 했다.
선수빨 감독이라느니, 정백강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내용이 주였다.
비난의 정점을 찍은 게 불과 보름 전에 열렸던 동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과 홍콩까지 4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의 최종 성적은 2위.
첫 경기에서 홍콩을 5-0으로 가볍게 꺾으며 상큼하게 출발했으나, 이어지는 중국전에서 대참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0-3 완패.
중국에게 진 건 1978년 이후 무려 32년 만이었다.
나나 박지승 선배 등 유럽에서 활약하는 해외파들이 모두 빠졌다는 핑곗거리가 있긴 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핑계일 뿐.
월드컵 본선 진출을 시킨 공로는 이 한 방에 싸그리 잊혀졌고, ‘허종무 경질론’이 대두될 정도로 충격적인 패배였다.
마지막 경기인 한일전을 이겼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 졌다면 정말 경질을 당했을지도...
아직 먼 얘기지만, 나중에 내가 은퇴를 한다면 때려죽여도 감독만은 안 할 거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 * *
2010년 3월 3일, 런던 로프터스 로드.
훗날 지승 선배가 뛰게 되는 퀸즈 파크 레인저스, 줄여서 QPR의 홈구장이다.
물론 지금은 지승 선배도, 또 QPR 측에서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만 말이다.
제3국에서 벌어지는 경기라 관중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거의 1만 명 가깝게 들어찼다.
잉글랜드 취재진도 꽤 많이 왔고.
아마 나와 드록바의 재대결을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세리에와 EPL 득점 선두의 조우가 자주 나오는 그림은 아니니까.
몸 푸는 중에 드록바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서 기자들의 손길도 더욱 바빠졌다.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
“그러게나 말이야. 램파드 상태는 어때?”
“그 친구가 원체 강골이잖아. 잘 회복 중이야. 아마 2차전에서도 뛸 수 있을 거야.”
우리 모타는 못 뛰는데.
이러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결과다.
하지만 내색할 순 없지.
“잘됐네. 이왕 이길 거면 진짜배기 첼시를 잡고 싶으니까. 그쪽이 더 재밌잖아?”
나의 허세를 드록바가 여유 있는 미소로 받아쳤다.
“기대할게. 근데 쉽진 않을 거야. 스탬퍼드 브리지의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이거든.”
끄응.
인정할 수밖에 없네.
무리뉴 감독이 이끌던 시절부터 홈에서만큼은 극강이었던 팀이 바로 첼시다.
이번 시즌에도 그 명성은 유효해서, 홈에서 무패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다.
굳이 챔스 얘길 더 할 필요는 없겠어.
“오늘 좋은 경기 하자고.”
“좋아.”
뒤돌아서는 드록바.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쓸데없는 질문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이봐!”
“응?”
“너랑 사무엘 말이야. 둘이 비교하면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해?”
그 순간, 내내 미소를 띠고 있던 드록바의 얼굴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당연히 나지, 백강. 그걸 질문이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