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76화 (77/176)

76화

우리와 코트디부아르의 A매치 역대 전적은 전무했다.

오늘이 첫 대결이라는 이야기.

처음에 버릇을 좀 잘 들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 대표팀의 선축으로 경기 시작.

양 팀 모두 4-4-2 포메이션을 들고나왔다.

나는 원톱에서도 물론 기가 막히지만 투톱일 때 조금 더 잘하고, 팀에 박지승 선배나 이창용 같은 좋은 윙어가 많아서, 월드컵 때 사용할 메인 전술은 4-4-2 굳어져 가는 모양새였다.

도저히 이기기 힘든 상대를 만나면 또 변화를 줘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경기 극초반은 탐색전.

상대가 피지컬의 우위를 앞세워서 가열찬 전방 압박을 가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심스럽게 나왔다.

이러면 우리도 서두를 필요가 없지.

“천천히 가자! 천천히!”

벤치에서 허종무 감독이 내 생각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얼마 전 스코틀랜드 명문 셀틱으로 이적한 미드필더 기성영이 주변 선수들과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기회를 엿봤다.

대표팀 부동의 에이스가 나, 최고의 찬스 메이커가 지승 선배라면 성영은 볼 순환의 핵심.

성영의 컨디션이 나쁘면 점유율 방어나 역습 전개에 문제가 생길 때가 많았다.

오늘은 과연 어떨지...

터엉-

그 척도가 될 성영의 첫 번째 롱패스가 내 머리를 겨냥하고 날아왔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점프하는 그 순간에도 나의 눈은 사방을 스캔.

투톱 파트너인 이건호 선배 쪽을 직접 노리기에는 위치가 좋지 않았다.

이럴 때는 역시 지승 선배지.

“나이스 헤더!”

왼쪽 측면에서 공을 잡은 지승 선배가 타이밍 맞춰 오버래핑한 김정운 선배의 발 앞에 공을 붙여주었다.

“여기!”

동시에 침투를 시도하는 건호 선배.

절묘한 스루패스가 코트디부아르 수비진 사이를 통과했다.

철썩-

전반 5분 만에 예상치 못한 선취 득...

“노우, 노우!”

세리머니하려다가 흥이 뚝 끊긴 건호 선배가 올라간 부심의 깃발을 보며 절규했다.

하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비록 골은 취소됐으나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얘네 수비 조직력 별로인데요?”

방금 오프사이드 장면을 복기해 보면, 일직선을 유지해야 할 코트디부아르의 4백이 지그재그 형태로 서 있었다.

라인 컨트롤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

그렇다면...

“형, 제가 계속 찬스 봐 드릴게요. 뒷공간 노리면 뭔가 될 것 같아요.”

“오케이, 백강아. 너만 믿을게.”

‘피올선’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호 선배.

물론 에투와 비교하면 실력은 많이 아래겠지만, 나와의 호흡만큼은 훌륭하다.

이종국이나 박주연 같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으로 나서고 있는 것도 나와의 궁합이 제일 좋기 때문.

운 좋게 큰 위기를 넘긴 코트디부아르가 반격에 나섰다.

부바카르 바리 골키퍼가 전방으로 길게 골킥 연결.

세비야에서 뛰는 미드필더 로마리크가 가슴 트래핑 후 오른쪽 측면으로 다이렉트 로빙 패스를 시도했다.

코트디부아르가 오른쪽 측면에 힘을 줄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

아스널 소속의 풀백 엠마누엘 에부에와 갈라타사라이의 윙어 카데르 케이타가 콤비를 이룬 상대의 오른쪽 라인은, 스피드와 기술을 두루 갖추고 있어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한 번이라도 뚫린다면 드록바가 저승사자처럼 마무리를 지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거기 대항하는 우리의 왼쪽 라인은 박지승-이형표라는 사실이었다.

실력 좋고 경험까지 풍부한 든든한 선배들이다.

“지승아! 좀 붙어줘! 뒤는 내가 커버할게! 정운아, 너도 좀 내려와!”

형표 선배의 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수비 블록을 형성하는 우리 대표팀.

소속팀에서는 굉장히 저돌적인 플레이를 하는 케이타지만, 대응이 워낙 빠르다 보니 돌파 시도를 하지 못하고 뒤쪽으로 공을 돌렸다.

“Je veux faire de l'argent!”

지켜보던 드록바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거의 하프라인 근처까지 내려왔다.

프랑스어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직접 공을 받아 공격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하는 드록바.

‘답답하니 내가 뛴다’, 뭐 그런 건가.

우오오오-

코트디부아르 응원단 사이에서 탄성이 일었다.

기성영과 김정운 선배가 펼친 협동 수비를 힘으로 뚫어내며 돌진하는 드록바.

아니, 저게 사람이야 들소야?

뻐어엉-

순전히 개인 능력으로 만들어낸 중거리포.

슈팅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이원재 선배가 펀칭으로 쳐냈는데 도로 드록바 앞까지 날아갔다.

재차 시도한 발리슛은 조용헌 선배가 몸으로 막아냈는데...

“끅! 끅!”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용헌 선배.

하필이면 공이 영 좋지 않은 곳에 맞아 버렸다.

덕분에 잠시 경기 중단.

록바 형, 살살 좀 해.

용헌 선배 아직 총각이라구...

* * *

전반 29분.

드디어 첫 골이 터졌다.

기다리던 선취 득점의 주인공은 건호 선배.

나의 촉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상대 4백은 서로 손발을 맞춰 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게 분명했다.

내 머리에서 건호 선배로 이어지는 단순한 패턴만 반복했음에도,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허둥지둥대며 기회를 내주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바리 골키퍼의 미친 선방으로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는 법.

“그라췌!”

골키퍼 다리 사이를 노린 땅볼슛으로 오프사이드의 아픔을 털어낸 건호 선배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것도 놓쳤으면 피올선한테 면목 없을 뻔했네.”

“그러게요. 좀 많이 날리시긴 하더라고요.”

“우리 백강이가 농담을 참 잘한다니까?”

“그게 꼭 농담만은...”

“이 녀석이?”

훈훈한 분위기 속에 찾아온 하프타임.

“생각보다 할 만한데?”

“그러게. 괜히 쫄았네.”

“나이지리아보다 얘네가 세다며? 본선 때도 걱정할 필요 없겠어.”

그렇다.

오늘 경기는 월드컵 32강에서 같은 조에 속한 나이지리아전을 대비하기 위한 시험 무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코트디부아르에게는 ‘가상의 북한’이었다.

사실 북한과 우리는 전력 차가 좀 심하게 나긴 하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게다가 저긴 100% 전력이 아니야.”

들떠 있는 선수단에게 허종무 감독이 한마디 했다.

지당하신 말씀.

아직 ‘투레 형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코트디부아르 공격의 핵심이 드록바라면, 수비와 중원에서는 콜로 투레와 야야 투레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전반전은 테스트였던 것 같고, 후반엔 다 나오겠죠.”

신들린 ‘백강도사’의 예언은 백발백중.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은 후반 시작과 동시에 투레 형제를 동시에 투입했다.

축구에서 흔히 ‘척추 라인’이라고 부르는 센터백-중앙 미드필더-스트라이커에 모두 톱클래스 선수가 투입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라인업이 아주 살벌해졌다.

그리고 실제 효과까지 굉장했다.

개차반이던 수비진은 콜로 투레의 지휘 하에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야야 투레는 말 그대로 중원을 씹어먹었다.

“야! 뭐해? 앞에서 제대로 견제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원재 선배가 고함을 치는 일이 많아진다는 건, 경기가 잘 안 풀린다는 의미다.

후방이 안정되자 비교적 잠잠하던 드록바까지 날뛰기 시작.

오른발, 왼발, 머리 가릴 것 없이 간담 서늘한 슈팅을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우리 입장에서 다행인 점은 드록바의 컨디션이 최상까진 아니라는 것.

평소라면 쉽게 결정지었을 찬스를 번번이 놓쳤다.

실점은 하지 않았지만 모멘텀이 완전히 넘어간 상황.

분위기 쇄신을 위해 허종무 감독이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선제골의 주인공 건호 선배를 불러들이고 김남익 선배를 내보내며 중원을 두텁게 만들었다.

남익 선배는 상대 선수를 쓸어버린다고 해서 ‘빗자루’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수비력이 뛰어난 미드필더.

결과적으로 이 교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지금 장난하나!”

상대가 빗자루든 걸레든 ‘내 갈 길을 가련다’ 식으로 밀어붙이던 야야 투레가 남익 선배의 슬라이딩 태클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이 턴오버는 생각보다 치명적이었다.

동점골을 노리기 위해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이 잔뜩 전진해 있었기 때문.

바야흐로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양쪽 날개가 활약할 시간이 왔다.

“창용아! 뛰어!”

루즈볼을 따낸 기성영이 단짝 친구 이창용에게 명령을(?) 내렸다.

파앙-

자신이 양발을 다 잘 쓴다는 걸 과시라도 하듯, 왼발로 강하게 때려 넣은 스루패스가 완만하게 휘어지며 창용이의 발 앞에 떨어졌다.

이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롄가?

“바로 올려! 창용아!”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듣는 창용이가 페널티박스를 한 번 쓱 보더니 바로 크로스를 시도했다.

근데, 크로스의 상태가?

“짧아요!”

바로 자진 신고하는 창용이.

나도 알아, 임마.

그런데 이런 걸 넣을 줄 알아야 세계 최고 아니겠어?

“으아아아!”

전력 질주를 했음에도 닿지 않는 거리.

“에라 모르겠다!”

일단 뛰었다.

몸의 밸런스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

이 정도면 다이빙 헤더라고 부르는 게 맞겠는데?

콰아앙-

정말 가까스로 닿았다.

머리만 살짝 돌려서 방향을 바꿔놓은 볼.

슈팅을 할 거라곤 전혀 예상 못 했는지, 바리 골키퍼는 손 한 번 뻗지 못한 채 넋 놓고 당했다.

철썩-

경쾌한 소리를 내며 그물을 가르는 공.

“Je vous aime lecteurs!”

어처구니없는 실점 상황에 눈이 똥그래진 바리 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다행히 콜로 투레는 영어를 써주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세상에 이런 정신 나간 슛이 어딨어? 미친!”

* * *

[대한민국, 아프리카 강호 코트디부아르에 3-0 완승]

[FIFA가 선택한 사나이의 위용... 정백강 2골 1어시스트 ‘펄펄’]

[허종무 감독, “자신감 얻은 것이 가장 큰 성과”]

- 솔직히 불안불안했는데 3-0 ㄷㄷㄷ

- 중국한테 3 대 떡 깨지고 드록국을 3 대 0 개박살내는 팀이 있다??

- 짱깨식 논리면 중국>드록국 ㅇㅈ?

- ㅋㅋㅋㅋㅋ 레알 ㅋㅋㅋ 신기하네 ㅋㅋㅋㅋㅋ

- 신기할 게 뭐 있어? 그냥 허종무 선수빨이 오지는 거지

- 종무형 선수빨 ㅇㅈ 근데 풀전력이면 우리 대표팀 무지 센 것도 인정해줘야 된다. 솔직히 코트디도 주요 선수 다 나왔잖아

- 그게 맞다 ㅇㅇ 그리고 정백강은 진짜 괴물이다 ㅋㅋ 솔직히 발롱도르도 받았어야 하는 것 같음

- 여기서 발롱 얘기가 왜 나옴? 또 싸우자고?

- 아 좀 싸우지들 좀 마라 ㅋㅋㅋ 지겹지도 않나

- 또라이들은 냅두고 두 번째 골 얘기나 좀 해보자. 저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거임? 어떻게 헤딩으로 저런 파워가 나옴? 자세도 안 나왔는데

- 이거 계산식이 있는데 ‘E=mc²’라서 가능함

- 오오 ㅋㅋㅋ 님 물리학과?

- 아니 국문관데?

- 진짜 이 사이트에는 ㅂㅅ들뿐이구나

- 그런 말 하는 너도 ㅂㅅ인 건 모르지?

작년 9월 호주전 이후 거의 반년 만에 출전한 A매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역시 정백강’이었다.

0-2으로 끌려가게 된 코트디부아르는 ‘닥공’을 외칠 수밖에 없었고, 두 번째 골과 비슷한 패턴으로 역습을 맞으며 0-3 패배의 희생양이 되었다.

마지막 골의 어시스터는 지승 선배.

이로써 오늘 경기에서 투톱과 양쪽 윙어가 모두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이걸로 1-1이네. 2차전이 이번 시즌 마지막 승부가 되겠군.”

경기 종료 후, 드록바가 유니폼 교환을 요청하며 말했다.

“그러네. 하지만 내가 한 골 더 넣고 있다는 건 잊지 말라고.”

“어련하시겠어.”

씩 웃으며 악수를 나누는 양국의 축구 영웅들.

기자들이 또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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