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77화 (78/176)

77화

“올~ 백강~ 좀 하던데?”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를 마치고 밀라노에 돌아온 나를 가장 반겨준 사람은 에투였다.

“디디에 녀석, 있는 폼 없는 폼은 다 잡더니... 찬스란 찬스는 다 놓치더군.”

내가 두 골 넣어서 기뻐하는 건 아닌 것 같고.

필생의 라이벌(?) 드록바의 부진에 신이 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정말 서로 친하단 말씀이야.

첼시전 패배 이후 우디네세와의 원정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살짝 휘청했던 우리 팀은, 제노아와 카타니아를 제물로 삼으며 정상 궤도에 올랐다.

이런 와중에도 챔피언스리그 일정은 차근차근 진행되어, 8강 진출팀 중 절반인 4팀이 결정되었다.

우선 슈투트가르트를 꺾은 바르셀로나.

대진이 나올 때부터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였다.

다음은 올림피아코스를 돌려보낸 보르도.

조별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2위로 밀어내고 유벤투스를 탈락시켰던 보르도의 돌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까진 뭐, 이미 예상도 했었고 우리랑 크게 상관도 없는 일이었는데 나머지 두 팀이 문제였다.

그 주인공은 맨유와 뮌헨.

올라갈 만한 팀이 올라가지 않았느냐고?

옳으신 말씀.

그런데 두 팀의 진출은 곧 밀란과 피오렌티나의 탈락을 의미했다.

피오렌티나야 그나마 좀 상황이 나았다.

강호 뮌헨을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아깝게 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밀란은...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2-3으로 패하더니, 올드 트래포드 원정에서는 0-4라는 치욕적인 스코어로 두들겨 맞으며 일찌감치 짐을 싸야 했다.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지만 밀란이라는 팀의 명성을 생각하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과.

“참담하다.”

지난 시즌 은퇴한 밀란의 슈퍼 레전드 파올로 말디니는 딱 한 마디로 경기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격분한 일부 밀란 팬들이 팀 버스에 불을 붙이려다가 저지당하는 등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우리 팀에는 이제 몇 가지 수식어가 더 붙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마지막 희망.’

‘세리에의 자존심.’

어떻게 만나도 첼시, 맨유, 뮌헨을 만나냐.

대진운이 심각하긴 했지만, 4강도 아닌 8강에 세리에 팀이 하나도 없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런던으로 떠나는 우리 선수단의 발걸음은, 그래서인지 더욱 비장한 느낌을 주었다.

* * *

16강 2차전에 나서는 양 팀의 선발 명단이 공개되었다.

첼시는 1차전과 완전히 동일한 4-3-3.

드록바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던 듯, 프랭크 램파드의 이름이 떡하니 들어 있었다.

다만 램파드는 이번 경기가 부상 복귀전이라는 변수가 있긴 했다.

한편 우리도 1차전과 마찬가지로 4-3-1-2를 들고나왔지만, 선수 구성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니콜라스 아넬카에게 농락당하며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됐던 다비데 산톤이 빠지고 대신 크리스티안 키부가 들어갔다.

퇴장으로 챔스에서 두 경기 출장 정지를 받은 티아고 모타의 빈자리는 문타리가 메우게 되었고.

키부나 문타리도 거의 주전이나 다름없는 선수들이니 전력 누수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이래서 스쿼드 뎁스가 중요하다니까?

“정백강이 버티는 인테르의 공격력은 유럽 최고 수준이다. 1차전에선 행운이 따랐지만, 솔직히 무실점은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밀라노에서 넣은 한 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정확히 50 대 50의 승부라 생각하고 임하겠다.”

노련한 승부사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나를 콕 집어 언급했다.

하긴, 안첼로티 감독만큼 내 진면목을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

밀란 감독 시절 줄기차게 당했으니...

상당히 조심스러운 안첼로티 감독과는 달리, 무리뉴 감독의 인터뷰는 도발적이었다.

“여러 사정에 의해서 떠나야 했지만 첼시에는 여전히 내가 아끼는 제자들이 많다. 그들에게 탈락의 아픔을 안겨줘야 한다는 게 가슴 아플 뿐이다.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렇지, 이래야 혀리뉴지.

* * *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끼얏! 우훗! 파핫!”

호텔방에서 ‘달링’과 통화를 하던 문타리가 괴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래요. 나도 사랑해요. 이기고 멋지게 돌아갈게요. 나핫! 꺄훗! 요홋!”

친구가 기뻐하는 건 좋은데 저 괴상한 추임새만 좀 바꿔줬으면 좋겠다.

“백강!”

전화를 끊자마자 나를 부르는 문타리.

꽤 오래 문타리를 봐 왔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본 기억은 드물다.

거의 돈코르 씨가 프로포즈 받아들였을 때와 비견될 만하다.

이건...?

“문타리! 지금 그 전화 혹시...”

“응! 맞아! 병원을 가봐야 알겠지만, 요즘 테스트기는 거의 정확하다며?”

“이야! 축하해! 정말 축하해!”

“고마워! 네가 용기를 준 덕분이야!”

문타리가 아빠가 되다니.

이건 정말 대사건이다.

마냥 귀엽고 철없고 여린 줄로만 알았는데.

결혼에 이어 아이까지...

다 컸네, 다 컸어.

“그러면 내일 경기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

“응? 그건 무슨 소리야, 백강?”

“아기가 돈코르 씨 뱃속에서 보고 있을 거 아냐. 아빠가 뛰는 모습을.”

“헛!”

반쯤은 농담처럼 꺼낸 이야기였는데, 문타리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 보다.

“정말 그렇네. 좋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고 말겠어. 난 이제 아빠니까!”

지금 프리저가 문타리의 전투력을 잰다면 아마 스카우터가 터져나갈 거다.

내일 경기, 다른 건 몰라도 활동량 1위는 맡아둔 것 같다.

* * *

2010년 3월 16일, 스탬퍼드 브리지.

이번 시즌 원정팀에게 단 한 번도 승리를 허락하지 않은 첼시의 안방에 도착했다.

숱한 영광을 함께 했던 경기장에 2년 만에 돌아온 무리뉴 감독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끔 냉혈한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격정적인 사람.

감회 역시 남다르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디디에! 오늘에야말로 결판을 내자고.”

에투는 드록바를 보자마자 다가가서 시비를(?) 걸었다.

“좋을 대로. 근데 너희 팀 주인공은 사무엘 네가 아니잖아.”

“뭐얏?”

“우리 감독님도 네 얘긴 하지도 않았어. 백강 수비법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됐어! 거기까지!”

드록바의 자비 없는 팩트 폭력 한 방에 에투의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안첼로티 그 양반... 축구도 잘 모르는 사람이... 흥!”

빅 이어를 두 번이나 들어올린 명장 안첼로티 감독이 에투를 언급하지 않은 중죄로 ‘축알못’이 되는 현장이었다.

워밍업을 마친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경기 시작 전 마지막 미팅을 했다.

“축구 얘기를 하기에 앞서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무리뉴 감독.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문타리의 약혼자가 임신을 했다. 아주 기쁜 일이지. 축하한다.”

“워후!”

“다시 한 번 축하해, 문타리.”

“돌아가면 축하 파티 해야겠네.”

쏟아지는 덕담과 박수 세례.

문타리가 얼굴을 붉혔다.

“헤헤, 감사합니다.”

“자... 축하는 이쯤 해 두고...”

다시 선수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무리뉴 감독.

“나는 패배에 익숙하지 않다. 져 보지 않아서가 아니야. 여러 팀을 거치면서 수많은 패배를 해왔지. 개중에는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완패도 있었고, 정말 아까운 패배도 있었다. 그러나, 과정과 상관없이 패배라는 결과 자체를 나는 용납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너희들도 나와 마찬가지일 거라 믿는다. 오늘 우리는, 무조건 이긴다. 패배라는 선택지는 없다.”

그렇지, 그렇지.

이기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 팀의 목표는?”

“트레블입니다!”

“좋아, 나가서 첼시 녀석들을 무너뜨리자.”

* * *

킥오프.

정말 엄청나게 많은 것이 걸린 16강 2차전의 막이 올랐다.

“우오오오오!”

예상대로 시작부터 날뛰며 필드 위를 미친 듯 누비기 시작하는 문타리.

“쟤 뭐야? 왜 저래?”

영문을 알 리 없는 첼시 녀석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문타리를 피해 다녔다.

그나저나 열심히 뛰는 건 좋은데, 저러다 퍼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

아무래도 한 골의 우위가 있으니 좀 안정적인 축구를 구사하지 않을까 했는데, 안첼로티 감독은 상당히 공격적으로 나왔다.

중앙 3미들의 한 축인 램파드는 거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머무르며 호시탐탐 득점 기회를 노렸고, 양쪽 풀백인 애슐리 콜과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도 활발하게 오버래핑하며 측면에 힘을 실어주었다.

무작정 웅크리다가 동점골 허용하며 후다닥 플랜을 수정하느니, 선제골을 넣고 여유롭게 가겠다는 의미일 터.

Chelsea, Chelsea is our name-

웅장한 응원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1차전의 수훈갑 아넬카가 공을 잡았다.

지난번의 활약 때문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지, 바로 일대일 승부를 걸어가는 아넬카.

스텝오버로 상대를 현혹한 뒤, 갑자기 팍 치고 나가며 수비를 따돌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산톤과 키부는 좀 달랐다.

이미 다 예상했다는 듯 한발 앞서 좋은 자리를 선점한 키부가 먼저 어깨를 집어넣었고, 몸싸움에서 압도하며 가볍게 공을 빼냈다.

이것이 바로 짬밥 차이.

단순 신체 능력은 어리고 힘이 넘치는 산톤이 더 좋을지 몰라도, 경험에서 나오는 예측력은 키부가 넘사벽이었다.

호날두는 잘 막았던 산톤이 아넬카에겐 털리고, 그 아넬카는 키부를 뚫지 못하고.

축구판의 상성이란 참 재밌다.

아예 상성이란 게 없는 나 같은 선수도 있지만 말이다.

크흠.

“천천히 가자! 서두를 필요 없어!”

사네티 주장이 템포 조절을 지시했다.

오히려 지고 있는 우리 쪽이 더 침착한 모습.

주장과 캄비아소, 그리고 문타리가 삼각대형으로 볼을 돌리며 기회를 엿봤다.

“여기! 여기야!”

안첼로티 감독에게 한 번, 드록바에게 한 번 무시당해 몸이 달아 있는 에투가 왼쪽 측면 공간으로 빠지면서 공을 요구했다.

수비에 나선 이바노비치는 노골적으로 에투가 잘 쓰는 오른발을 견제.

상대를 최대한 사이드로 밀어내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일단 돌리고 후일을 도모할 것이냐, 일대일로 승부를 볼 것이냐.

“에라!”

에투는 빠꾸 없는 상남자.

의도적으로 열어준 왼쪽 측면을 시원스럽게 파고들었다.

“백강!”

그리고 왼발 러닝 크로스.

“야! 이걸 어떻게 하라고!”

아무리 오른발잡이라도 그렇지, 크로스가 너무 똥망이다.

원래 왼발을 이렇게 못 쓰진 않는데.

흥분해서 평정심이 흔들린 게 분명하다.

천하의 내가 혼신을 다해 뛰었음에도 머리칼 하나 스치지 않고 깔끔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이 필생의 점프가 생각도 못 한 성과를 가져왔다.

원래대로라면 쉽게 잡아낼 수 있는 공.

하지만 상식을 벗어난 나의 높이 때문에 순간적으로 체흐 골키퍼의 시야가 가렸다.

당황한 체흐는 공을 잡지 못하고 페널티박스 바깥으로 쳐 냈는데...

그곳엔 우리의 로맨틱 가이(?) 스네이더가 기다리고 있었다.

“막아야 돼!”

뻐어엉-

주장 존 테리의 처절한 외침을 BGM으로 스네이더의 대포알 중거리포가 작렬했다.

아니, 근데 방향이?

투앙-

아아, 별이 보인다.

정신이 몽롱하다.

스네이더의 초강력 슈팅은 엉뚱하게도 골문이 아닌 내게로 날아와 나의 뒤통수를 호쾌하게 가격했다.

이거 뇌진탕 오는 거 아냐?

철썩-

응? 철썩이라고?

우우와아아아악-

잠시 정적에 빠졌던 경기장이 함성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세상 허탈한 표정의 체흐와, 함박웃음을 짓고 내게 달려오는 동료들이 보인다.

뭐야? 골이야?

이거 실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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