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79화 (80/176)

79화

아... 솔직히 정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 리오넬 메시 선수는 수락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만 거절하면 분위기 완전 이상해지잖아.

“소개 멘트 나오면 나란히 입장하시면 됩니다.”

이곳은 스위스 니옹에 위치한 UEFA 본부.

“아주 특별한 게스트를 두 분 모셨습니다. 2009년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선수들이죠. 발롱도르의 주인공 리오넬 메시, 그리고 FIFA 올해의 선수 정백강입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나와 메시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키 차이가 족히 20cm은 나다 보니 좀 미안한 감은 있다.

투샷으로 잡으면 메시가 너무 작아 보이니까...

그나저나 우리가 여기에 왜 왔느냐?

“먼저 정백강 선수와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인사 부탁드릴게요.”

“일단은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긴장되네요. 제 손에 많은 팀들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죠.”

그렇다.

오늘은 챔피언스리그 8강 대진 추첨일.

UEFA에서 ‘공 뽑을 사람’으로 나와 메시를 초청했다.

“혹시 만나고 싶은 팀이 있으실까요?”

아니, 그런 민감한 질문을 하다니?

당연히 있기야 하지.

올림피크 리옹이라든가, 보르도라든가, 모스크바도 괜찮고.

물론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구단 관계자들이니.

자기네 팀 지목하면 얼마나 불쾌하겠는가.

“하하,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만만한 팀은 절대 없다고 봐야겠죠. 그래도 하나만 말씀드린다면 지금 제 옆에 있는 선수는 좀 나중에 만나고 싶네요. 아마 팬 분들도 그걸 원할 것 같고요.”

객석에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음, 방금 답변은 내가 생각해도 괜찮았네.

“지난 시즌에는 12경기에서 15골을 넣었는데, 올해는 8경기를 치른 현재 12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과 1년 만에 본인의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할 기세인데, 가능할까요?”

“골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근데 말씀해주신 내용에서 깨고 싶은 기록은 있네요. 2010년에는 챔피언스리그에서 13경기를 뛰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에는 박수에 더해 휘파람까지 흘러나왔다.

오늘 나 인터뷰 좀 되는데?

“이번에는 메시 선수와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일단 저도 영광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저를 원망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한 유머 하는걸?

“정백강 선수는 답변을 피하셨는데, 혹시 만나고 싶은 팀이 있을까요?”

“글쎄요. 제 의사와 상관없이 저희를 만나고 싶어할 구단이 없을 것 같네요. 디펜딩 챔피언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상대니까 말이죠.”

오우, 스웩.

자부심이 느껴지는 발언이다.

메시의 바르셀로나 사랑이야 워낙 유명하니 뭐.

“마지막 질문입니다. 개편 이후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아직 2연패를 달성한 팀이 없습니다. 바르셀로나가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까요?”

“곤란한 질문이네요. 잘못 대답하면 거만해 보일텐데...”

잠시 뜸을 들이던 메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요.”

브라보-

바르셀로나 관계자가 흡족한 얼굴로 환호성을 질렀다.

메시의 인터뷰가 끝나고, 곧바로 추첨이 시작되었다.

“두 개의 포트에 각각 네 개 팀씩이 들어가게 됩니다. 아시겠지만 서로 다른 포트에 소속되면 결승에 가야 만날 수가 있습니다. 먼저 포트 1부터 추첨하도록 하겠습니다.”

메시가 먼저 뽑으면 내가 그 상대 팀을 고르는 순서로 진행됐다.

첫 번째 공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메시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바이에른 뮌헨.”

그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아직 깨끗한 대진표에 1등으로 새겨지는 ‘F.C. Bayern München’.

메시야, 초장부터 너무 센 팀을 뽑은 거 아니니?

이러면 내가 부담스러운데.

어디 보자...

그래, 이 공이다.

바로 이 감촉이야.

근거는 전혀 없지만 우리 팀은 아닐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자신 있게 공을 꺼내든 후 이름을 확인했다.

이야, 장난 아닌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굉장한 빅매치다.

뮌헨과 맨유의 관계자들이 복잡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메시의 두 번째 픽.

“아스널.”

와우-

이것으로 일단 EPL 팀들끼리의 결승 가능성은 사라졌다.

8강 멤버들 중에서도 강하다고 평가받는 팀들이 대거 포트 1에 몰렸다.

당장 바르셀로나만 안 만난다면, 포트 2로 가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듯하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백강아.

그냥 포트 1로 바르셀로나를 보내버리면 문제 해결이잖아.

강팀들끼리 열심히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여유롭게 구경하다가, 힘 빠진 상대를 결승에서 손쉽게 요리하는 그림.

아주 좋다.

이제 남은 공은 5개.

천지신명이시여, 어느 게 바르셀로나입니까?

하나씩 공을 쓰다듬는데 세 번째 공에서 찌릿하는 느낌이 왔다.

이거다!

“이... 인테르나치오날레.”

썩을.

내가 이래서 추첨 오기 싫었다고.

피구 형님, 그동안 뭐라고 해서 죄송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나쁜 놈이었네요.

사랑합니다.

* * *

역사가, 바뀌었다.

8강 대진까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회귀 전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4강 상대가 분명 바르셀로나였다.

결승전에서는 뮌헨을 만났었고.

이제는 둘 다 불가능해졌다.

추첨에 참여했으니 ‘내 손으로 역사를 바꿨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를 회귀시킨 분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순탄한 우승은 바라시지 않는 듯하다.

어쨌거나 최종 대진은 이렇게 짜였다.

<포트 1>

뮌헨 VS 맨유

인테르 VS 아스널

<포트 2>

리옹 VS 보르도

바르셀로나 VS CSKA 모스크바

흠...

한줄평은 ‘바르셀로나를 위한 대진표’.

난적 중의 난적인 모스크바를 꺾고 올라가면 그 빡세다는 리옹 대 보르도의 승자랑 맞붙어야 한다고?

하... 부럽다...

한국 팬들의 반응을 보니, 내가 우리 팀을 뽑은 순간을 캡처해서 짤로 쓰고 있었다.

쓰읍.

표정 관리를 좀 더 했어야 했는데.

- 자기 팀 뽑아 놓고 나서 정백강 표정 봄? ㅋㅋㅋ

- 레알 나라 잃은 얼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자기 손으로 뽑아서 할말도 없엌ㅋㅋㅋㅋㅋ 조작은 없나 봐 ㅋㅋㅋㅋ

- 근데 진짜 바르샤 챔스 2연패 각이다. 모스크바만 해도 쉬운 상댄데 4강까지 개꿀이잖아?

- ㅇㅇ 일단 결승까진 프리패스라고 봐야지

- 맨유, 인테르, 보르도, 바르샤 4강 본다

- ㄴㄴ 이번엔 뮌헨이 뭔가 보여줄 것 같음

- 아스널 인터는 그래도 인테르가 이기겠지?

- 한 7:3 정도로 인터밀란이 유리하지 않을까

- 정백강이랑 메시가 결승에서 만나면 크... 생각만 해도 설렌당

- 메시는 문제없을 것 같은데 백강이가 문제네 ㅋㅋ 대진이 너무 폭망이라...

물론 사랑하는 동료들로부터 문자메시지도 많이 받았다.

- 고생했어. 근데 그러려고 스위스까지 간 거야?(문타리)

- 아스널은 개박살 내면 그만인데, ‘옛날 팀’이 개꿀 빠는 건 마음에 안 드네.(에투)

- 그래... 그래도 뮌헨 맨유 바르셀로나보단 아스널이 낫지...(세자르 형님)

- ?????????(발로텔리)

야속한 사람들 같으니라구.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건만.

- 괜찮아. 어차피 우승하려면 다 꺾어야 하는 상대들이잖아?

역시 날 위로해주는 건 사네티 주장뿐이다.

주장, 제가 책임지고 우승까지 캐리할게요.

* * *

돈코르의 임신 소식에 이어 팀에 경사가 하나 더 생겼다.

근데 이게 참... ‘경사’란 표현이 맞는 건지는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일단 굳이 따지면 좋은 일이긴 한데...

결론부터 말하면, 인테르 최고의 ‘로맨틱 가이’ 스네이더가 약혼을 했다.

이혼 소송 끝난 지가 얼마 안 됐는데 말이지.

피앙세는 욜란테 카바우.

다행히(?) 제3의 여자는 아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던 시절부터 몰래 만나 왔던 연인이다.

세상의 지탄을 받던 외도의 대상이 당당한 약혼녀가 된 셈.

이런 게 바로 ‘서양 마인드’인가.

해외 진출 이후 벌써 3년.

나름 오픈 마인드가 갖춰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보면 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보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약혼 발표 이후 스네이더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첫 경기인 팔레르모전에서 1골 1어시스트.

리보르노 상대로는 3어시스트로 해트트릭보다 어렵다는 ‘도움 해트트릭’.

만만찮은 상대인 로마를 맞아서도 2골.

불륜 스캔들 이후 찾아왔던 슬럼프를 완벽하게 극복한 모습이었다.

“나의 사랑 욜란테에게 감사를 전한다.”

로마전에서 MOM으로 선정된 스네이더는 약혼녀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인터뷰를 했다가 멋지게 구설수에 올랐다.

제발 그놈의 입 좀 어떻게...

전처에 대한 배려심은 부족하지만 축구 하나만큼은 기깔나게 잘하는 스네이더 덕분에 리그 2위 로마를 쉽게 꺾으면서 승점 차는 12점까지 벌어졌다.

남은 리그 경기는 7게임.

천재지변이나 제2의 칼치오폴리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 팀의 통산 18번째 스쿠데토는 확정적이었다.

아직 EPL에서 치열한 순위 경쟁을 벌이고 있는 아스널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소식.

특히 아르센 벵거 감독은 현재 상황에 대해 짜증이 많이 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날이 선 발언을 했으니까 말이다.

“무리뉴는 참 운이 좋은 감독이다. 비교적 경쟁이 덜한 리그에서 초강팀을 맡아 여유 있게 시즌을 꾸려갈 수 있지 않은가?”

무리뉴 감독의 반응은?

“맞다. 인테르 감독직을 맡게 된 건 내게 커다란 행운이다. 이 운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두 개의 EPL 우승컵이 필요했다. 넓은 아량으로 내게 우승컵을 양보해준 벵거 감독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괜히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벵거 감독이었다.

그러게 무리뉴 감독 상대로 어설프게 언플하지 말라니까...

* * *

“이게 우리 아이야. 예쁘지?”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

옆에 앉은 문타리가 사진 하나를 불쑥 들이밀었다.

“엉? 어. 어어. 아이고 예쁘네...”

태어날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바보’ 한 명은 확정이다.

초음파 사진이 예쁘다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구만...

그나저나 더럽게 지루하네.

“문타리, 지금 몇 시야?”

“1시 20분이네.”

“끄아. 20분밖에 안 지났다고?”

하늘의 풍경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유독 더 지겹게 느껴진다.

코트디부아르와의 친선경기, 첼시 원정, 그리고 이번 아스널 원정까지.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 런던 땅을 밟게 되었으니, 질릴 만도 하지.

“근데 백강, 그거 알아?”

“어떤 거?”

“너랑 나 말이야. 아스널 상대로는 이겨본 적이 없어.”

“뭐? 그럴 리가.”

“진짜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포츠머스에서 뛰던 시절, 아스널을 만났을 때의 전적은 1무 1패.

인테르 이적 이후에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천하의 나를 상대로 전승이라.

썩 유쾌한 기록은 아니다.

“괜찮아. 8강전 끝나면 2승 1무 1패가 돼 있을 테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런던행 비행기는 무심히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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