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80화 (81/176)

80화

2010년 3월 31일.

6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은 이미 만원사례였다.

챔피언스리그 8강에 상대가 인테르라면 그 자체로 이미 대단한 빅매치.

거기에 감독들끼리의 장외 설전까지 더해지면서 양 팀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경기가 되었다.

4-3-3 포메이션을 들고나온 아스널.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선수는 크게 두 명이었다.

1순위는 당연히 에이스 세스크 파브레가스.

미드필더 주제에(?) 이번 시즌 팀 내 득점 1위, 어시스트 1위를 독식하는 중이었으니.

만 22세에 주장 완장까지 단 건 덤.

그야말로 ‘소년가장’이 따로 없었다.

나머지 한 명은 덴마크 출신의 장신 스트라이커 니클라스 벤트너.

리그 기록은 별 볼 일 없었는데, 챔스에서는 희한하게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7경기 출전해서 무려 5골.

나의 8경기 12골에 댈 건 아니었지만, 현격한 클래스 차이를 감안하면 벤트너의 기록도 대단한 것이었다.

첼시에 이은 ‘EPL 도장 깨기’ 2라운드.

아스널과의 8강 1차전이 휘슬과 함께 시작되었다.

“수비부터 착실하게 가자!”

사네티 주장의 리드에 따라 동료들이 자기 위치를 딱딱 찾아 들어갔다.

오늘 경기에 대한 무리뉴 감독의 지시는 명확했다.

상대가 뭘 하든 너무 신경 쓰지 마라. 패스를 돌리든, 압박을 해 오든 말이다. 우리 할 것만 착실하게 하면 된다.

무리뉴 감독이 지금까지 벵거 감독과의 맞대결에서 거둔 성적은 8전 4승 4무.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벵거 전문 킬러’.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니 신뢰해도 되겠지.

툭- 탁- 틱- 톡-

티에리 앙리도 없고, 데니스 베르캄프도 없고, 로베르 피레스도 없지만 벵거 감독의 축구 철학은 아직 유효했다.

파브레가스를 축으로 짧은 패스를 계속 주고받으며 기회를 엿보는 아스널.

그러다가, 상대가 갑자기 템포를 높이며 전진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가 우리의 찬스다.

퍼엉-

오른쪽 윙어로 나선 사미르 나스리가 중앙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이, 그 공간으로 풀백 바카리 사냐가 쾌속 전진.

안전한 패스 위주로 볼 점유를 유지하던 파브레가스가 별안간 사냐를 향해 긴 스루패스를 찔러 넣었다.

느낌 온다.

이게 무리뉴 감독이 말한 그 타이밍이다.

타악-

첼시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인 덕분에 오늘도 선발 출전한 크리스티안 키부가 한발 앞서 패스를 끊어냈다.

예측력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힌다.

“빨리 줘! 빨리!”

에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키부가 내준 패스를 받고 빠르게 역습에 나서는 에투.

흑표범의 질주가 시작됐다.

짧은 패스 위주로 게임을 풀어가는 팀의 고질적인 약점이 무엇이냐?

수적 우위 유지를 위해 라인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처럼 아예 상대가 공도 못 잡게 하는 수준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못하다면 카운터어택 한 방에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무리뉴는 역습에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감독 중 하나였으니.

벵거 감독 입장에서는 궁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웨슬리!”

거의 30m 가량을 혼자 드리블한 에투가 요즘 절정의 폼을 보이고 있는 스네이더에게 공을 넘겼다.

토옥-

와우.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진짜 미쳤다.

마누엘 알무니아 골키퍼가 나오기엔 너무 멀고, 토마스 베르마엘렌이 건들기엔 너무 높은 바로 그 위치를 정확히 타격하는 로빙 패스.

기계로 쏴도 이 정도로 정밀하진 못할 것 같다.

패스의 행선지는 나의 이마.

콰아앙-

전반 8분 만에 터진 선제골.

Grande- Testa!

Grande- Testa!

잉글랜드까지 원정 온 팬들이 이마를 두드리며 ‘위대한 머리’를 연호했다.

오늘 경기, 어쩐지 느낌이 좋은데?

* * *

객관적인 전력의 열세.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감독 간의 상성.

안 그래도 힘든 싸움인데, 중요한 홈 경기에서 원정골까지 허용했으니.

아스널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킥오프를 준비하는 파브레가스의 어깨가 축 처진 게 어째 안쓰럽다.

하긴, 아직 어린 나이니까.

멘탈이 터진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래서 못 참고 결국 바르셀로나로 이적을... 크흠.

“계속 움직여! 무브! 무브!”

벵거 감독이 처절하게 손짓 발짓을 해가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그게 9번이나 반복되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꼭 잡고 싶었을 텐데 또 지게 생겼으니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갈까.

벤치에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무리뉴 감독의 모습과 대비되어, 한층 불쌍해 보였다.

아스널의 강점이자 약점으로 지적받는 게 바로 선수단의 어린 나이.

특히 공격진에는 25살을 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이런 팀의 특징은 일단 분위기를 타면 신이 나서 몰아붙이지만, 안 풀릴 때는 확 꺾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세스크! 나한테 패스해!”

그래서 중요한 게 바로 맏형 안드레이 아르샤빈의 역할이었다.

한 골 넣고 더욱 단단해진 우리의 수비라인을 부수려면 크랙이 필요했고, 현재 아스날에서 크랙이라고 부를 만한 선수는 아르샤빈뿐이었으니.

투웅-

캄비아소와의 몸싸움을 가까스로 이겨낸 파브레가스가 왼쪽 측면으로 볼을 뿌렸다.

오늘 무리뉴 감독으로부터 파브레가스 봉쇄를 명 받은 캄비아소는 지금까지 그 역할을 120% 수행하는 중.

원래 칼날 스루패스와 중거리포로 유명한 파브레가스인데, 아직까지 유의미한 찬스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크 오케이!”

아르샤빈을 상대하게 된 선수는 언제나 든든한 마이콘.

공격에선 나, 수비에선 루시우가 하드캐리 중인 우리 팀의 챔스 여정에서, 공수 양쪽에서 밸런스 있게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선수가 있다면 역시 마이콘이었다.

“나이스 태클!”

일대일에 나선 아르샤빈이 순간 스피드를 살려 마이콘을 벗겨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슬라이딩 태클에 깔끔하게 막히며 아스널의 스로인 선언.

조별리그에서 호날두와 벤 아르파, 그리고 16강에서는 말루다까지.

뛰어난 윙어들을 멋지게 막아 왔던 마이콘이 그리 쉽게 뚫릴 리가 없었다.

쫄래쫄래 올라온 왼쪽 풀백 가엘 클리시가 롱 스로인을 준비.

안 풀리는 게임일수록 이런 세트피스 기회를 어떻게든 부여잡아야 했다.

“끄아아악!”

얼마나 빡세게 힘을 줬는지 비명까지 내지르며 던진 스로인이 194cm의 신장을 자랑하는 벤트너의 머리로 날아갔다.

하지만 루시우가 놀라운 점프력을 과시하며 가볍게 클리어.

“달려!”

이미 어시스트 1개를 기록한 스네이더의 플레이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번엔 에투 쪽을 보고 장거리 스루패스 시도.

상대편인 파브레가스한테 ‘네가 그렇게 패스를 잘해?’ 하며 물어보는 듯한 플레이였다.

“시발! 패스 한 번 개쩌네!”

아드레날린이 치솟는지, 시원한 욕설을 날리며 왼발을 번쩍 들어 트래핑하는 에투.

“받아라!”

당연히 직접 돌파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간결하게 얼리크로스를 선택했다.

어디 보자... 직접 슈팅하기엔 좀 먼 거린데?

“백강!”

헐,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르샤빈을 꽁꽁 묶고 있던 마이콘이 어느새 하프라인을 훌쩍 넘어 달려오고 있었다.

스로인을 던졌던 클리시는 낭패라는 표정으로 헐레벌떡 쫓아오는 중.

파앙-

마이콘이 가속을 한껏 살릴 수 있도록 몇 발짝 앞을 겨냥한 헤더 패스가 맛깔나게 떨어졌다.

“커버 좀 해줘!”

베르마엘렌의 처절한 외침.

센터백 파트너인 윌리엄 갈라스가 황급히 마이콘을 잡으러 뛰어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크로스가 막히지 않고 올라온 순간 상황 종료.

나와 눈이 마주친 알무니아 골키퍼가 비명을 질렀다.

“안돼!”

안되긴 뭐가 안 돼.

철썩-

선제골 이후 채 5분이 지나지 않은 시점.

나의 무자비한 헤더슛이 아스널 팬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 * *

거의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의 벵거 감독이 등장하자 매정한 기자들이 신이 나서 셔터를 눌러댔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 그냥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날 기자회견이라니, 너무 가혹한 처사야...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조절하는 벵거 감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무려 다섯 골 차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는데?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고, 매우 당황스러운 상태다.”

- 패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알다시피 주세페 메아차에서 득점을 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오늘 꼭 골을 넣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다. 상대가 우리의 공격적인 운영을 예상하고 역습 위주의 전술을 택한 것이 주효했다.”

- 오늘은 정백강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해서 뭐 하겠나? 아무리 전술을 잘 준비해 왔어도 결국 실제로 플레이를 하는 건 선수들이다. 4골이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포츠머스 시절부터 봤지만, 이탈리아로 떠난 이후 더 성장한 것 같다. 정백강이 없었다면 이 정도로 일방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아직 2차전이 남았다. 어떻게 준비할 생각인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게 축구라고 생각한다. 절대 맥없이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벵거 감독이 빠른 걸음으로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이어서 단상에 오르는 무리뉴 감독.

- 대승을 축하한다.

“이길 거라곤 생각했지만 5-0이란 스코어가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어쨌든 아주 기분 좋은 승리임엔 틀림없다.”

- 잘 정비된 역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아스널의 축구 스타일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지시를 해 놓긴 했다. 그런데 선수들의 컨디션이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웨슬리의 패스, 사무엘의 스피드, 마이콘의 공격 가담 등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 정백강은 어땠나?

“방금 일부러 빼놓고 이야기한 거다. 하하하. 백강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다들 보지 않았나? 그는 세계 최고다.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다.”

- 여유 있게 2차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방심하면 꼭 사고가 난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시즌의 실패를 아직 잊지 않고 있다.”

- 4강 진출 확률을 얼마로 보나?

“글쎄. 한 99.9%?”

마지막 차례는 당연히 오늘의 주인공.

나였다.

- 4골이다, 4골. 개인적으로도 기록 아닌가?

“A매치에서 5골을 넣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인테르에서는 첫 오버 해트트릭이다. 포츠머스 때도 3골이 최다였다.”

- 딱 4번의 헤더슛으로 4골을 넣고 어시스트도 하나 했다. 팀의 5골을 모두 책임졌는데, 오늘 본인의 활약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스포트라이트를 내가 받는 건 자연스럽긴 하지만, 그보단 동료들에게 우선 공을 돌리고 싶다. 나에게 좋은 패스를 해준 덕분에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물론 나도 정말 잘하긴 했다. ‘인생 경기’로 꼽아도 될 듯하다.”

- 지난 시즌에 15골로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벌써 16골이다. 대체 몇 골을 넣을 생각인가?

“힘닿는 데까지 넣어야겠지? 8강 추첨 때도 말했지만 골 기록에 대해선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내 목표는 오직 우승과 트레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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