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2009-2010 시즌 리그 우승은 이미 거의 확정지은 상황.
물론 ‘무패우승’이라는 달성 가능한 기록이 하나 남아 있긴 했다.
지난 시즌에 아깝게 실패했기에 기대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러나 무리뉴 감독의 태도는 단호박 그 자체였따.
“무패우승? 미안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우승 트로피 수집뿐이다. 패점 하나하나에 연연하지 않겠다.”
이에 따라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무리뉴 감독의 ‘특별 관리’가 시작됐다.
런던에서 돌아온 후 바로 펼쳐진 볼로냐와의 홈 경기에 나를 포함한 주전 멤버들을 대거 제외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
간만에 선발로 나선 고란 판데브가 특유의 헌신적인 플레이로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판데브를 이적료 한 푼 없이 데려온 건 신의 한 수.
되는 팀은 뭘 해도 된다는 좋은 예시였다.
이제 관건은 다시 챔피언스리그.
우리가 아스널과의 8강 2차전을 치르기 하루 전날, 4강 멤버 중 두 팀이 정해졌다.
먼저 포트 1의 바이에른 뮌헨.
나에게 4천 유로라는 짭짤한 선물을 안기며 1차전을 2-1로 승리했던 뮌헨은, 2차전에서도 접전 끝에 3-2로 멘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었다.
1차전이 프랑크 리베리의 경기였다면, 2차전은 부상 복귀한 아르연 로벤의 원맨쇼.
2골에 어시스트 1개로 팀의 모든 득점에 관여하며 수준이 다른 축구를 보여주었다.
4년 연속 4강 진출을 노렸던 맨유는 8강 문턱을 넘지 못하고 집으로.
원래는 4강에서 맨유에게 복수를 해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오히려 복수를 노리는 뮌헨의 칼날을 방어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포트 2에서는 모두의 예상대로 바르셀로나가 CSKA 모스크바를 종합 스코어 6-0으로 완파하며 사상 최초의 챔스 2연패를 향해 계속 진격했다.
만만찮기로 소문난 러시아 원정에서 1-0으로 몸을 푼 바르셀로나는, 자신들의 본거지인 캄 노우에서 깔끔하게 5-0으로 승리하며 클래스 차이를 확인시켰다.
이 와중에 리오넬 메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나와의 비교에 더 기름을 부었고 말이다.
* * *
2010년 4월 6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다섯 골의 우위를 가진 채 홈으로 상대를 불러들인 우리 입장에서는 ‘대형사고’만 안 나면 되는 경기였다.
그런 이유로, 무리뉴 감독의 배짱이 다시 한 번 발동되었다.
마이콘, 루시우, 스네이더, 사네티 주장, 캄비아소, 그리고 나까지 모두 벤치 스타트.
전력의 핵심으로 평가받는 선수 중 선발 출전한 사람은 골키퍼인 세자르 형님뿐이었다.
교체 명단의 공격수 TO에서 내게 밀린 에투는 아예 명단 제외였다.
1군은 확실히 아니고, 굳이 따지면 1.8군쯤 되는 라인업.
“괜찮...겠죠?”
어쩐지 느낌이 싸하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매사 신중한 주장이지만 오늘만큼은 어째 심드렁했다.
하긴, 3-0도, 4-0도 아니고 무려 5-0이다.
근데 나는 왜 자꾸 불안한 걸까?
이판사판 공사판인 아르센 벵거 감독은 매우 공격적인 4-4-2 포메이션을 들고나왔다.
사실상 4-2-4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Noi saremo qui-
Nerazzurri-
인테르의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있는 관중석에는 빈자리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어차피 이긴 시리즈, 돈 아꼈다가 4강전을 노리겠다는 이야기겠지.
킥오프.
원정팀 아스널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파앙-
시작하자마자 니클라스 벤트너 쪽으로 로빙 패스르 붙여주는 세스크 파브레가스.
원래 스타일대로 잘게 잘게 썰어가기에 90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
1차전에서 루시우에게 탈탈 털리며 클로킹 모드였던 벤트너가 오늘은 상큼하게 공중볼을 따냈다.
헤더 패스의 행선지는 투톱 파트너 로빈 반 페르시.
부상으로 인해 1차전을 결장했던 반 페르시는 몸 상태가 100%가 아님에도 출전을 강행했다.
아스널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증거.
뻐어엉-
반 페르시가 불안정한 자세로 때린 발리슛이 골대를 크게 벗어났다.
경기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오프닝 블로.
“슈팅까지 너무 쉽게 줬는걸?”
루시우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우리 팀의 센터백 콤비는 코르도바 형님과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
두 사람이 나란히 선발로 나선 건 이번 시즌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호흡에 문제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세자르 형님이 골킥을 길게 연결했으나 전방에 공을 따줄 만한 사람이 딱히 없었다.
손쉽게 넘어간 공격권.
미드필더 알렉스 송이 이번에는 왼쪽 측면의 안드레이 아르샤빈 쪽으로 공을 전개했다.
두려운 상대 마이콘이 오늘은 없다.
자신 있게 전진하는 아르샤빈.
다비데 산톤과 문타리가 합작으로 압박을 들어갔으나 전혀 당황하지 않고 볼을 지켜낸 뒤 반 페르시에게 땅볼 패스를 깔아주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또 흥분한 루시우.
근데 그럴 만했다.
상대 밀집 수비를 2대 1 패스로 뚫어내는 건 아스널의 전매특허 같은 플레이 아니겠는가?
반 페르시에게 패스가 들어가자마자 당연히 아르샤빈의 움직임을 체크해야 했는데, 수비진의 시선이 온통 공에만 쏠렸다.
투욱-
뒷공간을 노리고 빠져 들어가는 아르샤빈을 향해 반 페르시의 원터치 패스가 작렬했다.
올라가지 않는 부심의 깃발.
세자르 형님이 슈팅 각을 좁히기 위해 뛰쳐나갔다.
골키퍼 위치 확인하고 그대로 감아 차는 아르샤빈.
까앙-
아르샤빈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황급히 공을 걷어내는 마테라치 형님.
루즈볼은 파브레가스에게 안겼다.
경기 초반은 완연한 아스널의 페이스.
“살벌하게도 몰아붙이네. 이럴 때 실점하는 게 제일 위험한데.”
이콘이 형, 그런 대사야말로 정말 위험한 거야.
영화 보면 꼭 이럴 때 거짓말처럼...
우와아아아악-
원정팀 응원석이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거봐, 이렇게 된다니까?
* * *
파브레가스는 파브레가스였고, 반 페르시는 반 페르시였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아스널의 선취 득점.
‘스루패스의 달인’답게 파브레가스의 패스는 속도, 방향, 미세하게 걸린 회전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반 페르시의 침투 타이밍과 골 결정력도 엄청났고.
복귀하자마자 골을 터뜨린 반 페르시였지만, 기쁨의 세리머니 같은 건 없었다.
골을 넣은 후 곧바로 공을 주워서 헐레벌떡 센터 서클까지 운반했다.
합산 스코어 1-5.
아스널에게는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
전광판은 전반 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거 어째 좀...”
경험이 풍부한 프란체스코 톨도 형님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른 시간의 실점도 문제이지만, 또 한 가지 불안 요소는 지금 필드 위에 사네티 주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주장의 실력만큼이나 빛나는 게 바로 동료들의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아주는 리더십.
지금 라이업 중에는 딱히 그런 역할을 해줄 만한 선수가 없었다.
경기 재개.
우리 팀이 정말 간만에 공격에 나섰다.
왼쪽 윙어로 출전한 발로텔리가 바카리 사냐를 상대로 일대일 시도.
현란한 스텝오버 이후 툭 치고 나가며 수비를 따돌리려 했으나 사냐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공만 싹 빼내는 스탠딩 태클로 가볍게 공격을 끊어냈다.
“으아악!”
삐빅- 삑삑-
아오, 저 화상이 진짜!
휘슬을 불면서 달려온 마시모 부사카 주심이 발로텔리를 향해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너무 쉽게 공을 뺏긴 발로텔리가 울컥한 마음에 사냐의 발목을 걷어찬 게 딱 걸려버렸다.
“마리오! 퇴장은 절대 안 돼! 알겠지?”
발로텔리가 간절히 소리치는 나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하... 쟤는 언제쯤 철이 들려나.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왼쪽과 중앙 다 써먹은 아스널이 이번에는 오른쪽의 시오 월콧에게 기대를 걸어봤다.
요리조리 공을 돌리며 경기장을 넓게 쓰는 꼬라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기는 우리 안방인데 말이지.
“이야, 더럽게 빠르네.”
톨도 형님의 감탄사.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니콜라스 아넬카를 참교육했던 크리스타인 키부가 월콧의 ‘치달’ 한 방에 그냥 뻥 뚫려 버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스피드.
뒤늦게 따라간 키부가 발을 뻗었지만 크로스를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까아앙-
벤트너가 작정하고 내리찍은 헤더슛이 또 한 번 크로스바를 맞추고 튀어나왔다.
아직 10분도 안 지났는데 1골에 2골대.
얘네가 우리한테 5-0으로 깨진 그 팀이란 말이야?
오늘의 아스널은 확실히 뭔가가 달랐다.
생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그리고 애초에 아스널은 그렇게 약한 팀도 아니었다.
“집중해! 집중!”
한 골을 먹혔을 때만 해도 여유가 있어 보이던 무리뉴 감독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벵거 감독 입장에선 좀 억울할 지도 모르겠네.
홈에서 진작 좀 이렇게 했으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텐데 말이지.
치열한 볼 다툼.
승자는 또 아스널이었다.
공은 티아고 모타가 먼저 잡았으나, 송이 과감한 슬라이딩 태클로 탈취에 성공.
오늘 송이 중원에서 보여주는 투쟁심과 활동량은 어마어마했다.
축구게임으로 치면 아스널의 베스트 일레븐 전원이 빨간색으로 발딱 선 상황이라고나 할까?
며칠 동안 실력이 확 늘었을 리는 없고, 역시 정신 무장의 힘은 참 대단하다고 할 밖에.
이번에는 공격 가담한 가엘 클리시의 얼리크로스가 벤트너를 향해 날아갔다.
공중볼에 유독 강한 마테라치 형님이건만, 오늘의 벤트너는 거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의 정백강.
압도적인 높이를 과시하며 공에 먼저 머리를 갖다 댔다.
툭 떨궈준 볼에 벼락같이 달려드는 파브레가스.
EPL에서 중거리포로 수없이 많은 득점을 기록했던 바로 그 위치였다.
퍼억-
위기감을 느낀 문타리가 무리하게 몸을 날리며 파울로 끊었다.
발로텔리에 이어 두 번째 옐로카드.
“잘했다. 저건 어쩔 수가 없었어.”
주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아직 위기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약 24m 거리의 프리킥.
무리뉴 감독의 지시에 따라 우리 팀의 모든 선수가 수비에 가담했다.
왼발과 오른발이 둘 다 가능한 위치.
대기하는 키커는 반 페르시와 파브레가스, 그리고 송이었다.
아... 좋지 않아.
원인을 알 수 없는 한기(寒氣)에 몸이 떨렸다.
수비벽 위치를 조정해준 부사카 주심이 수신호를 보내자 아스널이 준비한 세트피스가 시작되었다.
공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송이 옆으로 툭 치며 굴렸다.
여기까진 예상한 플레이.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반 페르시냐, 파브레가스냐.
터엉-
으응?
슈팅이 아니었어?
당연히 골문을 직접 노릴 거라 생각하고 일제히 튀어 나갔던 우리 수비진이 벙찐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완전히 허를 찌른 파브레가스의 로빙 패스.
오프사이드 트랩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 있던 아르샤빈이 넓게 열린 뒷공간으로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아까와 거의 같은 위치에서 감아 찬 아르샤빈의 슈팅이 이번에는 실수 없이 골네트에 꽂혔다.
전반 13분 터진 추가골.
합산 스코어는 5-2.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시리즈가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