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와... 진짜 끔찍한 45분이었어.”
톨도 형님이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정말 그랬다.
‘끔찍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전반전이었다.
전반 종료 직전 니클라스 벤트너에게 헤더골을 허용하며 기어이 0-3.
스코어도 스코어지만, 경기 내용은 더욱 처참했다.
슈팅 하나 제대로 못 때려본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으니...
볼 점유율은 무려 81% 대 19%.
바르셀로나랑 2부리그 팀이 붙어도 나오기 힘든 수치가, 그것도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등장했다.
아무리 주축 선수들이 대거 빠졌다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경기력이었다.
무리뉴 감독이 엄청나게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이런 한심한 정신 상태로 트레블을 운운했다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응원하러 온 홈팬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나? 너희가 그러고도 프로라고 할 수 있나?”
라커룸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아스널 녀석들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느꼈을 감정을 이번엔 우리가 경험하고 있었다.
“백강.”
“네, 감독님.”
“후반전에 투입된다. 몸을 미리 풀어둬.”
“알겠습니다.”
수비 안정을 위해 루시우나 사네티 주장 카드를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무리뉴 감독의 선택은 나였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 뭐 그런 이야기겠지.
오늘도 아무 존재감이 없었던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나와 교체되면서 판데브-발로텔리-정백강으로 이어지는 3톱이 완성되었다.
“이대로 끝난다면 4강에 진출하더라도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인테르가 어떤 팀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와라.”
* * *
“우린 4강으로 간다!”
후반 시작 전, 파브레가스가 동료들을 한데 모아 파이팅을 외쳤다.
나이는 어려도 주장은 주장이라 이건가.
열정만큼은 인정해 줄게.
그런데 너희가 4강 갈 일은 없을 거야.
후반전은 우리의 선공.
“네가 나온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상대 센터백 윌리엄 갈라스가 내 신경을 긁으려고 입을 털었다.
형편없이 지고 있어서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왜 가만있는 사람을 건드리니?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이런 뻔한 심리전에 맞상대해줄 필요가 없지.
뻐엉-
4백 라인 바로 앞에서 공을 잡은 티아고 모타가 최전방으로 한 번에 연결되는 로빙 패스를 시도했다.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득점 기록만 가지고 열광하지만, ‘축잘알’들은 다르다.
결정력 못지않게 나의 전술적 가치에 주목하곤 하는데 이게 바로 그런 케이스.
오늘처럼 중원 싸움에 어려움을 겪는 경기에서도 롱패스 한 방에 찬스 메이킹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떻게 할까.
좀 안정적으로 볼을 돌릴까?
아니다, 일단 분위기부터 좀 바꾸자.
콰아앙-
기습적으로 시도한 중거리 헤더슛을 마누엘 알무니아 골키퍼가 겨우 쳐냈다.
까비.
들어갔으면 후반 흐름을 완전히 가져올 수 있었는데...
우리 팀의 첫 번째 슈팅이 마침내 터졌다.
“집중해! 집중! 상대는 정백강이야!”
방금 수비가 영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아르센 벵거 감독이 벤치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하긴 홈에서 무려 4골을 얻어맞았으니.
‘정백강 공포증’이 생길 만도 하다.
데얀 스탄코비치가 코너킥 키커로 나섰다.
코너킥 역시 이게 처음.
전반전이 얼마나 심하게 반코트 게임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툭-
스탄코비치는 골문 쪽으로 바로 붙이는 대신 문타리에게 짧게 연결해주는 쪽을 택했다.
“정백강부터 잡아!”
알무니아의 새된 목소리.
왜 이렇게 나를 찾는 사람이 많은 거야?
벤트너와 갈라스에게 집중 마크당해 발이 묶인 나 대신 마테라치 형님 쪽으로 크로스를 붙여주는 문타리.
까아앙-
회심의 헤더슛이 오른쪽 골포스트를 강타한 뒤 라인을 벗어났다.
“이런 시발! 개 같네 진짜!”
마테라치 형님이 허탈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럴 땐 또 바로 기분 풀어드리는 게 인지상정.
“진짜 아까웠어요, 형님. 수비부터 차근차근 가죠.”
아깝게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확실히 경기장의 공기는 바뀌었다.
이게 바로 ‘정백강 효과’.
아스널 녀석들도 전반전처럼 노빠꾸로 ‘닥공’만 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무니아의 골킥으로 경기 재개.
“아직 시간 충분해! 천천히 하자!”
공을 잡은 파브레가스가 템포를 조절했다.
앞으로의 40분은 정말 집중력 싸움.
딱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터엉-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 * *
이예에에에에에!!!
원정팀 응원석이 아주 난리가 났다.
로빈 반 페르시도 일어나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반 페르시의 침투와 파브레가스의 과감한 스루패스.
첫 번째 실점과 완전히 똑같은 패턴에, 우리 수비진이 또 한 번 궤멸했다.
범인을 찾자면 마테라치 형님.
골대 맞춘 여운이 가시질 않았는지, 무리하게 패스를 끊으려고 슬라이딩 태클을 했던 게 치명적인 판단 미스였다.
태클은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고, 덕분에 반 페르시는 공짜로 1:1 상황을 맞았다.
이반 코르도바 형님이 급하게 백업을 들어갔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파울뿐이었다.
그 결과는 옐로카드와 페널티킥.
너무 티 나게 유니폼을 잡아채서 변변히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키커는 오늘 경기 두 번째 골을 노리는 반 페르시.
세자르 형님, 제발 한 번만 막...
아...
“크아아아아아!”
첫 골 때는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던 반 페르시가 이번에는 잔디 위를 멋들어지게 미끄러지며 기쁨을 만끽했다.
아스널이 드디어 한 골 차까지 따라붙는 순간이었다.
* * *
무리뉴 감독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발로텔리를 빼고 루시우를 투입하며 5-4-1 포메이션으로 전환.
요즘 절정의 폼을 보여주고 있는 루시우가 들어왔으니, 이제 수비는 좀 안정될 공산이 컸다.
문제는 공격.
미쳐 날뛰는 아스널에게 찬물을 끼얹을 한 골이 정말 간절했다.
벤치에 에투가 있었다면 운신의 폭이 좀 더 넓어졌을 텐데 말이지.
아니지 아니지, 백강아.
다른 선수를 왜 찾아.
약한 소리 말고 네가 해결해보자.
“저한테 공을 몰아주세요!”
겸손한 판데브가 내 말을 듣고 바로 롱패스를 시도했따.
또 슈팅을 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제 한 골만 먹으면 동점이다.
그러니 볼을 계속 우리가 갖고 있는 것도 지금 상황에선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서 판데브에게 일단 리턴 헤더 패스.
공을 잡은 판데브는 다시 나에게 공을 띄워 주었고, 나도 리턴으로 화답했다.
오, 이거 느낌 있는데?
퉁- 펑- 퉁- 펑-
마치 테니스의 랠리처럼 계속되는 볼 주고받기.
참으로 보기 힘든 기이한 광경이었다.
“뭐야 이거? 뭐 이런 게 다 있어?”
“일단 라인 유지해! 라인!”
얼핏 장난 같은 우리의 티키타카에(?) 수비하는 아스널 선수들도 당황한 기색을 표출했다.
진격 속도로만 보면 매우 비효율적이지만, 공을 지키는 데는 또 이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프라인 아래에서 출발한 판데브였는데, 야금야금 앞으로 나오더니 슬슬 위험지역까지 진출했다.
함께 전진한 나의 위치도 어느새 페널티박스 근처.
토마스 베르마엘렌이 드디어 파훼법을 찾았다.
“판데브를 덮쳐!”
어차피 공중볼은 너무 높아서 나 외에는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볼 공급책인 판데브를 틀어막는 게 최선의 방책.
베르마엘렌의 지령을 받은 가엘 클리시가 이제 막 일곱 번째 헤더 패스를 받은 판데브를 거칠게 압박해갔다.
그런데 말이지.
인테르 이적 이후에는 고개를 숙인 채 살고 있지만, 판데브도 라치오 시절에는 잘나가던 에이스 출신이었다.
너무 바짝 붙어 막으면,
투욱-
이렇게 뚫릴 수도 있다니까?
클리시의 다리 사이로 재치 있게 공을 빼낸 판데브가 기어를 확 끌어 올리며 질주했다.
순식간에 허물어진 아스널의 측면.
완전히 탄력받은 판데브는 도움 수비를 간 베르마엘렌까지 헛다리 한 방으로 넘어뜨려 버렸다.
뭐야.
‘힘숨찐’ 뭐 그런 거야?
“백강!”
여유 있게 박스 안쪽을 살핀 판데브가 지루했던 티키타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크로스를 올렸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콰아아아앙-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을 빡 준 헤더슛이 그대로 그물을 직격했다.
“정백강 좀 잡으라고 했잖아! 시발!”
이번 시리즈에서 5골째를 허용한 알무니아의 절규.
좀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승부란 원래 이런 것이니.
경기 시작 60분 만에 터진 가뭄의 단비 같은 골.
이럴 때는 간만에 지휘 한 번 해줘야지.
팬들 앞으로 달려가 목청껏 소리쳤다.
“Grande!”
Testa!!!!!
“Grande!”
Testa!!!!!
여기에 이마 세리머니까지.
너무 흥분한 아저씨 팬 한 분은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기쁜 건 알겠는데, 그러면 뇌세포 죽어요.
아, 용건이 하나 더 남았지.
아까 나를 도발했던 갈라스에게 다가가 한마디 했다.
“어때? 이제 좀 달라졌지?”
* * *
루시우 투입은 신의 한 수 그 자체였다.
수비수 숫자가 하나 늘어난 영향도 물론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문제를 노출하던 라인 컨트롤이 제대로 되기 시작했다.
스루패스 경로가 막히자 불을 뿜던 파브레가스의 오른발도 멈칫.
벤트너의 머리를 겨냥한 크로스 플레이도 담당 일진인 루시우가 모조리 끊어냈다.
후반 25분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무리뉴 감독은 판데브 대신 마이콘을 투입하며 노골적인 잠그기 작전으로 나왔다.
전문 수비수만 6명.
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아르샤빈도 마이콘에게 완전히 지워졌다.
한 골이 아니라 두 골이 필요하다는 게 아스널의 비극.
역습의 위험성을 감수하고 전원 공격 체제로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말은 참혹했다.
체력이 넘쳐서 주체가 안 되는 마이콘은 그야말로 괴물.
공수 모두에 참여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클리시는 ‘오른쪽’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어김없이 등장한 ‘마이콘-정백강’ 공식.
아스널의 희망을 완전히 빼앗는 데는 딱 두 번의 크로스면 충분했다.
삑- 삑- 삑--
경기 종료.
최종 스코어 3-4.
1, 2차전 합산 스코어는 8-4.
드디어 09-10 챔피언스리그의 세 번째 4강 진출팀이 결정되었다.
* * *
[인테르, 골득실 우위로 아스널 꺾으며 2년 연속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
[졌지만 빛났던 아스널의 투혼... 벵거, ‘천적’ 무리뉴 상대로 첫 승]
[정백강 또 해트트릭... 1차전 4골, 2차전 3골]
[챔스 10경기서 19골... 정백강이 곧 역사다]
1차전 패배 후와 비교하면 벵거 감독의 표정은 한결 평온해 보였다.
뭐랄까, 달관한 것 같기도 하고.
- 대단한 경기였다.
“정말 그렇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조건에서 시작한 게임이었지만 우리는 끝까지 멋지게 투쟁했다. 4-0을 만들었을 때는 정말 이기는가 싶었으니까. 하지만... 인테르엔 정백강이 있었다.”
- 두 경기에서 일곱 골이다.
“30년 가까이 감독 생활을 해오고 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1차전에서 그렇게 당한 후 우리 선수들에게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백강은 막을 수 없다.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비교 대상이 없는 세계 최고의 선수다.”
- 리오넬 메시가 있는데도?
“그렇다. 나는 정백강이 더 뛰어나다고 본다.”
벵거 감독의 폭탄 발언에 기자들의 손길이 확 바빠졌다.
아니 감독님, 칭찬은 정말 감사한데요.
쪼오금 시끄러워질 것 같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