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2010년 4월 20일.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에는 7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이탈리아 최강의 팀 인테르와 독일의 자존심 뮌헨.
지난번엔 8강전에서 마주쳤었는데, 올해는 더 높은 무대인 준결승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드디어 본때를 보여줄 때가 됐네.”
친정팀을 만난 루시우가 이를 갈았다.
그동안의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재계약 제의조차 받지 못한 채 팀을 떠났던 루시우였다.
특히 루이스 판 할 감독과의 사이는 최악 오브 최악.
뭐, 덕분에 우리 팀은 세상 든든한 센터백을 공짜로 얻게 됐지만 말이다.
이번 매치업을 두고 세간의 예상은 우리 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수비-중원-공격 모두 우리가 더 짜임새 있다는 게 중론.
그러나 뮌헨의 전력은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변수를 갖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우리가 7 대 3 정도로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만, 뮌헨의 윙어 라인만큼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오만의 화신’ 무리뉴 감독이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니.
‘좌베리 우로벤’ 라인은 아무리 불리한 경기라도 혼자 힘으로 뒤집어버릴 수 있는 괴력을 갖고 있었다.
반면 판 할 감독이 지목한 위협 요인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다. 역시 정백강이 가장 신경 쓰인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어쩌다 보니 ‘정백강 VS 로베리’ 구도가 되어버린 4강전.
주심의 휘슬과 함께 1차전의 막이 올랐다.
* * *
경기 첫 슈팅은 에투의 발에서 나왔다.
스네이더의 로빙 패스가 내 머리를 거쳐 침투하는 에투에게 전달되는 3박자 콤보.
“아오, 시발!”
마무리 슈팅이 골문을 살짝 벗어나긴 했지만 뮌헨 입장에서는 간담이 서늘한 장면이었다.
“좋아! 계속 그렇게만 해!”
경기 시작 전 무리뉴 감독은 내게 에투 쪽을 많이 봐줄 것을 주문했다.
뮌헨 4백 라인 중 오른쪽 풀백 필립 람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무지막지하게 느린 편이었기 때문.
에투가 자신의 장기를 살리기에 최적의 환경인 셈이었다.
한스외르크 부트 골키퍼가 람 쪽으로 짧게 골킥은 연결했다.
람은 다시 로벤에게 땅볼 패스.
“온다!”
사네티 주장이 비상 경보를 발동했다.
이번 시즌 얼마나 많은 팀들이 로벤의 왼발을 막지 못해 무너졌던가.
작년 우리에게 쓴 패배를 안겼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8강 2차전에서 로벤에게 멀티골을 허용하며 탈락했었다.
이 ‘노안의 암살자’에 대한 무리뉴 감독의 대비책은?
그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두줄 수비였다.
어차피 원정 경기인만큼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제아무리 로벤이라고 해도 키부와 사네티 주장이 버티고 있는 우리 왼쪽 라인을 단독 돌파로 뚫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
슬쩍 간만 보다가 뒤쪽에 서 있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티이거에게 볼을 돌렸다.
지난 시즌만 하더라도 윙어로 주로 출장했던 슈바인슈타이거는, 이번 시즌 중앙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하면서 포텐이 빵 터져 버렸다.
루시우를 놓친 게 판 할 감독의 실수라면, 슈바인슈타이거의 재발견은 업적이라고나 할까.
로벤 영입으로 낙동강 오리알이 될 뻔했다가 순식간의 팀의 핵심 선수로 발돋움했다.
터엉-
슈바인슈타이거가 촘촘한 수비망 사이로 스루패스를 꽂아 넣었다.
패스의 수취인은 토마스 뮐러.
루시우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잘한다’고 평가했던 바로 그 녀석이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올해 월드컵 이후 순식간에 월드 스타로 떠오를 예정.
“수비 아주 좋아요!”
공간 이해도 만렙답게 귀신같이 빈 공간을 찾은 뮐러의 움직임도 훌륭했지만, 왈테르 사무엘 형님의 수비 또한 기가 막혔다.
즉각적으로 붙어주며 뮐러가 돌아서지 못하게 방해.
짬에서 나오는 노련함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결국 뮐러도 아무것도 못 한 채 백패스를 선택.
무대가 무대라 그런지, 에투의 슈팅 말고는 거의 15분째 이렇다 할 하이라이트가 없었음에도 긴장감이 어마어마했다.
마치 폭풍전야 같은 느낌.
이번에는 마르크 반 봄멜이 이번엔 리베리 쪽으로 공을 뿌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뮌헨은 측면에서 승부를 보는 게 맞았다.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가 그거였으니.
드디어 성사된 ‘마이콘 VS 리베리(Feat. 티아고 모타)’.
리베리가 두 명이 쌓고 있는 블록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밀어내! 가운데로 못 오게 해!”
루시우의 지휘에 따라 마이콘과 모타는 리베리의 전진 방향을 사이드라인 쪽으로 한정시키는 움직임을 가져갔다.
중앙 진출이 막힌 리베리는 어쩔 수 없이 직선 돌파 후 크로스를 시도했으나 사무엘 형님이 가볍게 헤더로 끊어냈다.
리베리가 동료들과 연계해서 뭘 하기 시작하면 아주 골치 아파지기 때문에, 지금 같은 수비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어설프게 공을 뺏으려 들었다간 오히려 뻥 뚫릴 수도 있으니 주의 요망.
그나저나 공격권을 일단 찾아오긴 했는데...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뮌헨 녀석들의 수비 복귀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얘네도 두줄 수비 형태.
우리를 기다리는 상대의 결연한 눈빛이, 도합 12골이 터졌던 아스널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시리즈를 예고했다.
* * *
“이야, 쟤네 수비 정말 독하다.”
“아마 상대도 똑같이 생각할걸요?”
사무엘 형님의 엄살에 내가 촌철살인의 멘트를 날렸다.
결국 전반전은 양 팀 모두 득점에 실패한 채 0-0으로 끝났다.
직접 뛴 선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팬들이 보기엔 정말 더럽게 지루한 경기였다.
에투한테 뒷공간을 자꾸 헌납하자 판 할 감독은 아예 수비라인을 극단적으로 내려 버렸고, 나한테는 더블팀을 붙였다.
원정골이 엄청나게 중요한 대회가 바로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공격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홈에서의 실점은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한편 조심스러운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니.
‘로베리’가 못 날뛰게 하는 게 지상과제다 보니 소극적인 경기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훅은커녕 잽조차도 소심하게 내뻗는 양 팀.
내가 만약 오늘 경기 표를 샀다면 아마 환불 요청을 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축구가 더 재밌지 않나?”
그 와중에 무리뉴 감독이 자신의 변태적인 취향을 은근슬쩍 드러냈다.
“흐름은 나쁘지 않다. 골을 넣으면 좋겠지만, 원정 무승부도 괜찮은 성과지.”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왕이면 이기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아스널한테 한 번 크게 데여서 그런가?
“그러나... 역시 승리가 더 달콤하겠지? 후반전엔 득점을 노려보자.”
역시 주제 무리뉴는 반전이 있는 남자였다.
* * *
후반전에 뮌헨은 별다른 변화 없이 동일한 라인업으로 출격했다.
우리는 교체카드를 한 장 사용했는데, 이게 아주 의외였다.
모타를 빼고 발로텔리를 투입한 것이다.
그것도 스트라이커도, 윙어도 아닌 중앙 미드필더로!
“지시받은 대로만 해. 이상한 거 하지 말고. 그리고, 돌발행동은 절대 금지야.”
“백강, 난 어린애가 아냐.”
아냐, 축구만 잘했지 아직 충분히 어려.
신신당부를 했지만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뭔가 보여줄게.”
오우, 더 불안해졌다.
경기 재개.
후반전은 우리의 선공이었다.
“천천히 하나 가자!”
사네티 주장의 파이팅.
아무 의미 없는 의례적인 이야기 같았지만, 사실은 무리뉴 감독의 지시사항을 한 번 더 상기하는 것이었다.
- 일단은 볼을 돌려라. 상대를 조금이라도 끌어내는 게 1단계다.
이야, 확실히 텔리가 재능은 재능이다.
축구 게임에서야 능력치만 좋으면 아무 포지션에 놔도 상관없지만, 그건 말 그대로 게임이기에 가능한 일.
실제로는 플레이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헤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발로텔리는 중앙 미드필더 롤을 소화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원래 좋은 개인기와 적절한 오프더볼 무브로 뮌헨의 압박을 털어내며 볼 점유율 올리는 데 공헌하는 모습.
우우우우우-
공격 의사가 없다는 듯 줄창 패스만 돌려대자 뮌헨 팬들로부터 엄청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사실 이 야유는 자기네 팀 선수들에게 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가서 뺏어야 할 거 아냐?’
해석하자면 이런 느낌이랄까?
홈팬들이 저렇게 재촉하고 있잖니.
어서 달려들어라, 어서.
“올라가! 더 압박해!”
그렇지.
어차피 뮌헨도 한 번은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경기.
드디어 판 할 감독이 움직였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뮌헨 선수들이 슬금슬금 우리 진영 쪽으로 올라오기 시작.
여기부터가 2단계인데, 이걸 실행하기 위해서는 아주 출중한 개인 능력을 가진 선수가 한 명 필요했다.
그게 바로 나...는 아니고.
뻐엉-
기다렸다는 듯 오른쪽 측면으로 뿌려지는 캄비아소의 스루패스.
무리뉴 감독이 찍은 2단계의 주연 배우는 우리 팀에서 나 다음으로 클래스가 높다고 볼 수 있는 마이콘이었다.
터엉-
마이콘이 본인의 상징과도 같은 ‘황소 드리블’을 시전하며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갑작스런 역습이야 뮌헨도 충분히 예상한 범위일 터.
뮌헨의 주장 반 봄멜이 전진해 있는 리베리의 공백을 메우며 마이콘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악-
앞서 내가 뭐랬는가.
‘아주 출중한 선수’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반 봄멜이 시도한 회심의 슬라이딩 태클.
마이콘의 발이 깊은 태클에 걸렸으나 끝끝내 넘어지지 않았다.
입이 떡 벌어지는 놀라운 균형감각.
충돌 순간을 지켜보던 하워드 웹 주심이 휘슬을 입에 가져갔다가 내리면서 어드밴티지 수신호를 내렸다.
“공 살아 있어!”
1차 저지에 실패한 반 봄멜이 넘어진 채로 소리를 빽 질렀다.
왔구나.
이제 3단계 발동이다.
“바로 올려! 마이콘!”
“시발! 나도 간다!”
마이콘의 위험 지역 진입과 동시에 나와 에투가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다 들어와! 정백강부터 잡아! 정백강!”
부트 골키퍼의 절규에 따라 나한테 순간적으로 4명의 수비수가 붙었다.
4명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판 할 감독이 ‘위험도 1위’라고 콕 찍어줘서 그런지 과잉대응이 장난 아니었다.
이제 대망의 마지막 4단계.
아비규환인 페널티박스 상황을 슬쩍 확인한 마이콘이 중앙으로 땅볼 패스를 날렸다.
“이런 젠장!”
내게 붙어 있던 센터백 마르틴 데미첼리스가 혀를 차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당연히 나를 향한 크로스를 예상했던 뮌헨 수비진은 이제야 무리뉴 감독의 시커먼 속내를 간파했다.
그렇다.
이번 작전에서 나는 미끼.
무려 4마리의 고기를 낚으며 내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마이콘의 패스를 잡은 선수는 스네이더.
양발에 대포를 장착하고 있는 세계 최고급의 중거리 슈터.
위기감을 느낀 데미첼리스가 스네어디를 향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었는데...
투욱-
그 스네이더마저 미끼였다.
길고 길었던 작전을 끝내러 등장한 남자는?
“패스 좋고!”
마리오 발로텔리였다.
오른발 킥력 하면 스네이더에게 절대 꿀리지 않는 녀석이 발로텔리다.
거기다가 달려오던 가속까지 제대로 공에 실렸으니.
공의 진로를 방해할 만한 장애물은 나와 스네이더가 죄다 치워버려, 전방 시야가 아주 깨끗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이런 소리가 축구공에서 날 수 있다니.
철썩-
“막아요! 막아! 일단 끌어안아요!”
선제골의 기쁨을 나누기 전에 일단 옷부터 못 벗게 막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도 잘했다, 텔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