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후반 15분 터진 발로텔리의 선제골.
지난 60분 동안 ‘원정골 0’을 위해 달려왔던 루이스 판 할 감독의 게임 플랜은 여기서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무리뉴 감독의 필살기가 완벽하게 통한 모습이었다.
“끄아아아아아!”
에투의 발 빠른 밀착 마크(?) 속에 상의 탈의에 실패한 발로텔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사자후를 토해냈다.
뮌헨 벤치가 바빠졌다.
오늘 뭘 해볼 것인가, 아니면 추가 실점만 막고 2차전을 노려볼 것인가.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
판 할 감독이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미드필더 마르크 반 봄멜을 빼고 스트라이커 마리오 고메즈를 투입.
그러면 그렇지.
아스널을 상대로 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는 이번 시즌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원정팀의 무덤 중 하나였다.
결승 진출 확률을 0.1%라도 높이려면 오늘 승부를 거는 게 합당했다.
선수 교체에 따른 포메이션 변화도 있었다.
반 봄멜로부터 주장 완장을 건네받은 필립 람이 거의 윙어 자리까지 전진하며 아르연 로벤의 측면 공격을 지원.
이비차 올리치와 투톱을 형성했던 토마스 뮐러는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로 이동해서 올리치와 고메즈의 뒤를 봐주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했던 듯 즉각적인 대처가 돋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약스를 이끌고 챔스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판 할 감독 아니겠는가.
확실히 명장은 명장이었다.
전술이 바뀌어서인지 아니면 실점 이후 각성한 건지, 두줄 수비에 고전하던 ‘로베리’ 라인이 슬슬 힘을 내기 시작했다.
시작은 로벤.
람이 오버래핑하며 키부를 현혹하는 사이, 중앙 쪽으로 파고들며 전매특허인 왼발 감아 차기 슈팅을 시도했다.
멋진 호를 그리며 날아간 공을 세자르 형님이 몸을 날리며 막아 냈는데...
교체 투입된 고메즈가 튕겨 나온 볼을 다이빙 헤더로 연결하며 골문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이렇게 쉽게 동점골?
판 할 감독의 미친 용병술 성공?
“말도 안 돼!”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고메즈.
어림도 없지.
부심의 깃발이 어여쁘게도 올라가 있었다.
의욕이 넘친 탓일까.
고메즈의 쇄도 타이밍이 지나치게 빨랐다.
“집중해! 집중!”
비록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리긴 했지만 위험한 장면임엔 분명했다.
선수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무리뉴 감독.
뮌헨의 파상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리베리 쪽에서 사고(?)가 터졌다.
툭-
시작은 뮐러에게 짧게 내준 패스.
뮐러는 즉각 리턴 패스를 내주면서 리베리와 자연스럽게 스위칭, 측면으로 빠지면서 우리 수비진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순간적으로 자유로워진 리베리는 올리치에게 절묘한 스루패스를 연결했다.
까앙-
올리치의 마무리 슈팅은 왼쪽 골포스트 바깥쪽을 맞힌 후 라인을 벗어났다.
세자르 형님이 각도를 좁히며 나오지 않았다면 실점할 수도 있었던 상황.
제대로 각 잡고 공격에 나서니 뮌헨의 화력이 장난 아니었다.
뮌헨의 선전과 함께 열광적이기로 소문난 알리안츠 아레나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Stern des Südens-
du wirst niemals untergehn-
7만 명 가까운 인파가 한목소리로 부르는 응원가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
우리 팀 응원단도 열심히 뭘 하긴 하는 것 같은데 데시벨 차이가 너무 커서 죄다 묻혀 버렸다.
독일 사람들 점잖다는 거,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니까?
* * *
[인테르,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1-0 진땀승... 발로텔리 결승골]
[‘무리뉴다웠던’ 승리... 되살아난 인테르의 철벽]
[아쉬운 결정력에 고개 떨군 뮌헨, 2차전 반격할까?]
올리치의 아까운 슈팅 이후의 20분은 오롯이 ‘뮌헨의 시간’이었다.
로베리를 필두로 좌우에서 두드리며 정신없이 몰아쳤다.
그러나 아스널전 패배를 통해 커다란 교훈을 얻은 우리 수비진은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막판 10분 동안 가동된 무리뉴 감독의 또 다른 필살기, ‘정백강 시프트’는 보너스였다.
내가 센터백 자리에 위치하면서 공중볼을 이용한 공격이 완전히 차단된 뮌헨은, 우리 밀집 수비 파훼에 애를 먹었다.
좁은 공간에서 패스 돌리기에 이골이 난 바르셀로나라면 혹시 모를까.
올리치나 고메즈는 그런 패싱 플레이를 하기엔 너무나 투박한 선수들.
로벤과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가 간담 서늘한 중거리포 몇 개를 날린 게 그나마 의미 있는 공격으로 남았다.
한편 깜짝 놀랄 만한 멋진 골로 이번 시즌 챔스 1호 득점을 신고한 발로텔리는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동료들을 한 번 더 경악하게 만들었다.
“정백강과 스네이더가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저 마무리를 했을 뿐이다.”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문제가 생긴 거라는데.
텔리야, 솔직히 말해봐.
혹시 집안에 우환이라도 생긴 거야?
* * *
“으어어어억!”
“푸훗, 무슨 귀신 봤어?”
오늘도 평범 그 자체인 날이었다.
팀 훈련에 나섰고, 자체 청백전에서 언제나처럼 또 해트트릭을 했다.
나를 막던 사무엘 형님은 ‘늙으면 죽어야지’ 하고 우는 소리를 했고.
훈련이 끝난 후 또 언제나처럼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된 거야?”
나연이 갑자기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못 보면 얼굴 잊어버릴까봐 휴가 내고 왔어. 자기가 워낙 바쁘니까 내가 와야지 어쩌겠어.”
끄응, 입이 열 개 스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작년 9월 서울에서 열린 호주와의 친선경기 때가 마지막 데이트였으니.
물론 연락이야 매일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사귀기 시작할 때 나연이 가장 걱정했던 게 장거리 연애의 어려움이었는데...
우려를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에투처럼 편지라도 써볼 걸 그랬나?
“온다고 연락이라도 미리 주지.”
“서프라이즈가 더 재밌잖아? 들어가자.”
“캐리어 이리 줘.”
“무거울 텐데?”
“이거 왜 이래. 나 ‘피올선’이야. 그 봉지에 든 것들은 뭐야?”
“이따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 혼자 살기엔 쓸데없이 넓기만 한 집.
나연이 와준 덕분에 간만에 훈기가 돌았다.
“흐음, 이렇게 해 놓고 사는구나. 생각보다 깔끔한데?”
하늘이 보우하사 어제 집안일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왔다 가셨다.
스네이더의 스루패스만큼이나 날카로운 절대 타이밍.
기분 탓인진 모르겠는데, 회귀 후의 나는 뭘 해도 신의 가호를 받는 느낌이다.
“주방 써도 되지?”
“엇, 우리 자기 요리도 할 줄 알아?”
“그럼. 자취 경력이 몇 년인데.”
“뭐 할 거야? 도와줄게. 나도 요리 잘해. 이래봬도 식당집 아들이잖아.”
“안 돼. 이건 나 혼자 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가서 TV를 보든, 게임을 하든 하고 있어. 주방엔 얼씬도 하지 마.
“구경만 하는 것도 안 돼?”
“응, 안 돼.”
나연이 이처럼 단호하게 말할 땐 얌전히 들어주는 게 상책이다.
시키는 대로 물러나서 TV를 켰지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정신은 온통 주방 쪽에 쏠려 있었다.
그 상태로 한 20분쯤 지났을까?
‘나연표’ 스페셜 요리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졌다.
식욕을 자극하는 칼칼한 향...
한국 토박이로서 장담하는데 이건,
“자기야! 혹시 메뉴가 김치찌개야?”
“퍼지는 냄새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네. 맞아!”
얼마만의 한식인가.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고인다.
“다 됐어! 먹으러 와!”
분부대로 합죠.
쪼르르 달려가 보니 2인분 밥상이 정갈한 모습으로 차려져 있었다.
“우와, 밥도둑들만 모아놨네?”
달걀말이에 제육볶음, 그리고 김치찌개 조합이라니.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잘 먹겠습니다!”
기운차게 외친 후 숟가락을 들었다.
일단 찌개부터...
응?
뭔가를 감지한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나연이 싱긋 웃었다.
“다른 것도 먹어 봐.”
반신반의하며 이번에는 제육볶음을 한 점 입에 넣었다.
틀림없다.
“자기야, 이거...”
“맞아. 어머님한테 레시피를 배워 왔어. 김치도 집에서 가져온 거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우리 엄마, 김영순 여사의 맛이다.
“괜찮아? 입에 맞아?”
“아니, 안 괜찮아.”
“그래? 간이 틀렸나? 신경 쓴다고 썼는데 김치가 너무 익었나? 뭐가 문제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고 너무 훌륭해. 엄마가 해준 맛 그대로야. 아니다,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꾸 놀리면 혼나.”
“자기도 얼른 먹어.”
큰 경기가 많은 시즌 막바지.
정신없이 달려오던 레이스에 꿀맛 같은 휴식이 찾아온 기분이다.
이런 게 행복이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와서 이렇게 감동 주기 있어?”
“그러게 말이야. 여자친구 하나는 참 잘 뒀지?”
“정말이야. 이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
“뭘 해줄 수 있는데?”
“일단 오늘 안 재울 수는 있지. 마침 내일 훈련도 없어서.”
“어머, 과연 가능할까나?”
“지금 바로 확인시켜줘?”
“밥부터 얼른 드세요.”
이날 밤, 나는 약속을 훌륭하게 지켰다.
* * *
2010년 4월 28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드디어 첫 번째 챔스 결승 진출팀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이만하면 전술 지시는 다 끝났고...”
좌중을 한 번 둘러본 무리뉴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하비에르가 한마디 하지.”
“제가요?”
“그래. 인테르의 위대한 주장으로서.”
“위대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무리뉴 감독이 살짝 물러난 자리에 사네티 주장이 섰다.
약간은 얼어 있는 듯한 표정.
주장이 긴장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다.
감정이 복받치는 듯 잠시 인상을 찡그린 주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난 1년 동안, 그러니까 맨유와의 그 대결 이후로, 줄곧 오늘만을 생각해 왔던 것 같아. 아니, 어쩌면 훨씬 오래 그랬는지도 모르지. 인테르 유니폼을 입고 리그, 코파, UEFA컵까지 모두 우승해봤지만, 바로 이 대회, 챔피언스리그만큼은 녹록지 않았거든.”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훌륭한 감독님, 그리고 동료들이 팀에 합류하면서 원대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기 직전까지 갔지만 나의 부족함 때문에 실패했었지. 그건 정말 괴로운 경험이었어.”
그건 주장 잘못이 아니죠.
“똑같은 실패를 두 번 반복하지 않도록, 나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물론 알아서 잘하겠지만, 너희들도 그래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
“아, 할 말은 여기까지야.”
“시이발, 좋았어! 거지발싸개 같은 뮌헨 놈들 박살 내러 가자!”
갑자기 벌떡 일어난 에투를 시작으로 저마다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
“3-0, 아니 5-0이닷!”
“결승 가서 바르셀로나까지 뭉개버리는 거야!”
역시 분위기 띄우는 데는 에투의 차진 욕설만 한 게 없지.
팀 분위기는 최고조.
게다가 관중석에는 나연도 와 있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 이렇게 동기부여가 완벽하게 된 경기가 있었던가.
아드레날린이 폭발 직전이다.
대체 오늘 내가 몇 골을 넣을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