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나의 선취 득점은 뮌헨 입장에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절대 허용하면 안 됐던 골이었다.
이제 승부차기 가능성은 사라졌고, 뮌헨에게는 최소 두 골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된 시점에서 승부는 사실상 기울었다.
이탈리아, 아니 세계 최고의 역습 팀을 상대로 ‘닥공’을 외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뮌헨의 공격은 루시우가 이끄는 우리 팀의 철벽을 뚫지 못했다.
산발적으로 나오는 중거리포는 세자르 형님이 든든하게 막아냈고.
뮌헨이 공격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장면은 우리 쪽에서 훨씬 많이 나왔다.
그리고 전반 31분.
마이콘이 배달한 택배 크로스가 내 머리를 통해 득점으로 연결되었다.
197cm의 거구 다니엘 반 부이텐을 높이에서 완벽히 제압한 골이었다.
후반 8분에는 기어이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정신을 놓아버린 뮌헨 수비진은 에투도 아닌 나에게 오프사이드 트랩이 뚫리는 굴욕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스네이더의 칼날 스루패스.
‘우리 할머니도 넣을 수 있는’ 골을 마무리하며 세 골을 채웠다.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만 다섯 번째 해트트릭.
하지만 나의 질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후반 20분에는 에투의 득점을 도우며 어시스트까지 추가했다.
뮌헨은 아르연 로벤이 경기 막판 혼을 담은 ‘매크로 감아 차기’로 한 골을 넣으며 영패는 면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삑- 삑- 삑--
휘슬이 울리는 순간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른 건 사네티 주장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결승 진출의 기쁨과, 인테르에서 보낸 지난 15년간의 회한이 담긴 절규였다.
“시이이이이이발! 졸라 신나!”
에투는 ‘옛날 팀’에 이어 2년 연속으로 결승 무대를 밟게 되었다.
정말 커리어 하나는 환상이다.
“좋군.”
목석같은 스네이더의 얼굴에도 간만에 웃음이 가득했다.
주변에 여자도 없는데 말이지.
“결승이다! 결승!”
문타리는 잔디 위에서 폴짝거리며 자신의 귀여움을 한껏 어필했다.
7만 명이 넘는 관중들도 한동안 경기장에 남아 응원가를 메들리로 부르며 벅찬 환희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리뉴 감독은...
“고생했다, 백강.”
가장 먼저 나를 찾아와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시작입니다, 감독님.”
“동감이다. 이래서 널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같은 꿈을 꾸는 남자들의 뜨거운 포옹.
나연이 본다면 질투할 만한 장면이었다.
* * *
[2009-2010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대진 확정! 인테르 VS 바르셀로나]
[전 세계를 뒤흔들 빅매치, 정백강 VS 리오넬 메시 성사]
우리가 뮌헨을 꺾은 다음 날, 바르셀로나는 프랑스 원정길에 올랐다.
1차전을 3-0으로 마무리했기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
하지만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게임 플랜에 ‘적당히’라는 단어는 없었다.
원정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라인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티키타카를 그대로 들고나왔다.
그리고 올림피크 리옹의 클로드 퓌엘 감독은 끝끝내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또 한 번의 3-0 경기.
1차전에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던 메시는, 이번엔 3어시스트를 올리며 ‘도움 해트트릭’이라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 크... 드디어...
- 국뽕충 VS 꾸레충 둘 중 하나는 박멸 예정
- 어디가 이기든 커뮤니티 멸망 각 ㅋㅋㅋㅋ
- 축구 스타일이 완전 상극이라 더 꿀잼일 듯
- 제발 한국인이면 인터밀란 응원합시다!!
- 한국인 이 ㅈㄹ ㅋㅋㅋㅋ 정백강이 너한테 뭘 해줬다고 ㅋㅋㅋㅋ 바르샤 2연패 가자 ㅋㅋㅋㅋㅋ
- 그럼 바르샤는 뭘 해줬는데 이 꾸레충아 ㅋㅋㅋ
- 아오 이제 연차 다 써서 없는데... 그래도 이 경기는 놓칠 수가 없다 ㅠㅠ
피파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 위너의 만남에 한국의 축구 커뮤니티는 폭발 직전.
마음 같아서는 바로 결승전을 위해 스페인으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 * *
“어쩐지 좀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문타리가 내게 푸념했다.
“뭐가?”
“결승전 장소 말이야. 왜 항상 여기냐구.”
흠,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혹시 지금 쫀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좀...”
“에이 쫄았네.”
“아니라니까!”
세리에 제패에 이은 트레블의 두 번째 관문.
코파이탈리아 결승전을 앞둔 풍경이었다.
문타리의 우는 소리도 약간은 이해가 가는 게, 맞대결 상대가 다름 아닌 로마였다.
작년에는 라치오였는데 말이지.
로마와 라치오의 공통점은 둘 다 결승 장소, 스타디오 올림피코를 홈구장으로 쓰는 팀이라는 것.
어쩌다 보니 두 시즌 연속으로 원정 결승을 치르게 된 셈이었다.
“우리가 확실한 ‘언더독(Underdog)’임에는 분명하다. 상대는 리그 챔피언이자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팀이니까. 그러나 축구에는 가끔 예상 못 할 일들이 벌어진다.”
로마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기본적으로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다.
시즌 초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의 사임 이후 흔들리던 로마를 부여잡고 리그 2위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둔 라니에리 감독.
이미 충분히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고 평가받고 있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을 것이다.
모 프로게이머가 한 말처럼, ‘2등도 잘한 거’긴 하지만, 축구판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인 것도 팩트니까.
주장 프란체스코 토티 역시 한마디를 보탰다.
“역사는 아무 이유 없이 쓰이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보여드리겠다.”
토티가 말한 ‘역사’란 역대 우승 기록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유벤투스와 함께 각각 9번씩의 코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통산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팀.
스쿠데토가 고작 3개임을 감안하면 코파에서 이상할 정도로 강한 면모를 보여 온 로마였다.
특히 비교적 최근인 2007년과 2008년에는 2연패를 달성하기도.
이런 배경이 있으니 토티의 자신감이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인테르에 합류하기 전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양 팀 선수단이 90분 동안 혈투가 벌어질 경기장에 나란히 입장했다.
5만 5천여 관중이 내지르는 환호성 속에 간간이 욕설도 섞여 들렸다.
- 빌어먹을 인테르 놈들, 꺼져라!
우리만 아니었다면 리그 우승도 가능했던 시즌.
적개심을 표출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 더러운 동양인 새끼가 여기는 왜 온 거야?
근데 이건 좀 선 넘었다야.
2010년도에 모양 빠지게 인종차별이 뭐냐, 인종차별이.
그 동양인 새끼가 어떤 선순지 좀 보여줄게.
* * *
결승전을 앞두고 양 팀 모두 전력 누수가 좀 있었다.
우리 팀에서는 루시우가 경미한 무릎 통증 때문에 아예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본인은 그래도 뛰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코파보다 ‘훠어어어얼씬’ 중요한 챔스 결승이 남아 있는 마당에 무리뉴 감독이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번 시즌 팀 내 최다 득점자인 토티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발목이 안 좋다는 소식이었는데, 여차하면 뛸 수는 있다는 건지, 아니면 사기 진작 차원에서 앉혀 놓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연막작전일지도?
어쨌든 킥오프.
로마의 선축으로 63번째 코파 우승팀을 가릴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오늘 라니에리 감독은 아주 흥미로운 전술을 구사했다.
표면적으로 발표한 포메이션은 4-4-2.
왼쪽 윙어 자리에 다니엘레 데 로시를 배치했길래 이게 뭔가 싶었는데, 게임에 들어가니 그 의중을 알 수 있었다.
‘무늬만 윙어’인 데 로시가 실제로는 프리롤을 부여받아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처럼 움직이고, 실질적인 측면 공격은 풀백인 욘 아르네 리세가 담당하는 시스템.
마땅한 윙어 자원이 없는 로마의 스쿼드 상황에 맞춰서 고심 끝에 만들어낸 작품으로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홈 경기는 홈 경기.
초반 분위기는 일단 로마가 주도했다.
일등 공신은 단연 데 로시.
육각형 미드필더의 의미가 무엇인지 눈으로 보여주며 미드필드를 완전히 지배했다.
‘토없데왕’이라고 해야 하나.
토티가 없는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 평소보다도 훨씬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뻐어어엉-
슈팅을 날리는 걸로는 성에 안 차서 게임을 날리려고 드는 공격진에게 있었다.
미르코 부치니치는 컨디션이 안 좋은 건지 움직임 자체가 좀 굼떴고, 토티 대신 나온 루카 토니는 마테라치 형님의 강력한 대인마크에 막혀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토티 공백 > 루시우 공백’인 분위기.
우리 입장에선 호재다.
“자자! 집중! 집중 좀 합시다!”
코르도바 형님을 등진 채 시도한 부치니치의 터닝 슈팅이 또 한 번 어이없이 빗나가자 데 로시가 있는 힘껏 박수를 치며 팀원들을 독려했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허무한 실수가 많이 나오는 판에서 더 멘탈이 나가기 쉬웠다.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데 로시의 어깨.
로마의 주장단은 사나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
자, 감상은 접어두고 이제 골을 넣으러 가보실까?
* * *
슬슬 몸이 풀리면서 드디어 그 남자, 마이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수비수인 리세가 위험지역까지 올라와서 날뛴다면 다분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이례적으로 스네이더에게 강력하게 공을 요구하는 마이콘이었다.
“웨슬리! 여기!”
데 로시의 밀착 수비에 고전하던 스네이더가 가까스로 공을 지켜내며 땅볼 패스 연결.
앞에 충분한 공간이 주어진 마이콘의 무서움을 잘 아는 로마 선수들이 하프라인 부근에서 진을 쳤다.
그 순간,
파앙-
상대 수비진의 허점을 완벽하게 찌르는 스루패스가 대지를 가르며 에투에게 전달되었다.
와우, 크로스만 좋은 줄 알았더니 이런 플레이도 기가 막히네.
줄리우 세르지우 골키퍼가 슈팅 각도를 좁히며 나와봤지만 이미 늦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 짓는 힘이야말로 에투의 최대 장기 아니겠는가.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얄밉게 툭 차 넣으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시발! 이거지!”
어라?
“시발! 뭐야?”
부심이 우뚝 선 채 깃발을 팔랑거리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니지!”
오우, 에투도 독심술을 쓰네.
“내가 라인 다 확인하고 들어갔다니까? 이게 어떻게 오프사이드예요?”
에투는 정말 화가 많이 난 듯싶었다.
근데 조심해야 한다.
오늘 주심은 ‘꼰대’로 소문난 니콜라 리촐리니까.
“사무엘, 됐어. 그만해.”
느린 발을 이끌고 얼른 달려가서 에투를 뜯어말렸다.
“나 참, 진짜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하지만 역시 내 발은 느렸다.
기어이 한마디를 더 한 에투는 안 받아도 됐을 첫 번째 옐로카드의 주인공이 되었다.
- 어이! 아프리카에서 온 검둥아, 그냥 레드카드 받고 꺼져라!
아니, 진짜.
오늘 관중들 수준이 왜 이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면 로마에 있는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도 상처받는 거 모르나?
음...
생각해 보니 로마 스쿼드에는 아프리카 출신이 없긴 하다.
하여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진짜 무지무지하게 열받았다.
이제부터 참교육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