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에투가 조금은 억울하게 경고를 받은 이후 경기 분위기가 한층 뜨겁게 달아올랐다.
태클은 조금 더 깊어졌고, 몸싸움도 한층 거칠어졌다.
이후 겨우 10분 동안, 양 팀 통틀어 4명의 선수가 추가로 옐로카드를 받아들었다.
우리 팀에서는 마테라치 형님과 키부, 로마에선 필립 멕세와 옛 동료 니콜라스 부르디소.
넷 다 수비수들이었다.
수비하는 입장에서 옐로카드는 일종의 족쇄 같은 것.
농구에서 파울 트러블에 걸린 상대를 집중 공략하듯, 축구에서도 카드 한 장 있는 선수를 좀 노려줄 필요가 있었다.
오늘 부르디소는 풀백으로 나왔으니, 맥세랑 좀 친하게 지내볼까?
마침 타이밍 좋게 문타리가 중원에서 상대 패스를 끊어냈다.
“바로 줘!”
몸을 멕세에게 노골적으로 밀착하면서 외쳤다.
뻐엉-
문타리가 높게 띄워준 볼.
멕세가 함께 점프하며 헤더 경합을 했는데, 높이에서 밀리니까 팔을 과도하게 사용하며 나를 밀쳤다.
“으억!”
아주 약간 과장해서 비명을 지르며 착지.
삑-
니콜라 리촐리 주심이 휘슬을 불며 달려왔다.
바로 작전 성공?
“말로 하는 건 이번까집니다. 다음엔엔 바로 카드 꺼낼 거예요.”
까비.
보내버릴 수 있었는데.
그래도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기회를 만들어냈다.
키커는 당연히 스네이더.
직접 슈팅도 충분히 가능한 거리다.
스네이더의 킥력을 워낙 잘 알기 때문에, 로마 수비벽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더 형, 하나 보여줘.
콰앙-
오우.
무회전으로 때려 버리네.
벽을 살짝 넘긴 공이 너클볼처럼 흔들렸다.
줄리우 세르지우 골키퍼의 어깨도 공을 따라 출렁출렁.
그래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펀칭에 성공했다.
“공 살았어!”
쳐낸 공이 공중에 높이 뜨며 페널티박스 안쪽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최초로 머리를 댄 건 마테라치 형님.
그러나 임팩트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다음으로는 부르디소가 루즈볼을 걷어내려고 했는데 마음이 너무 급했는지 그만 헛발질을 해버렸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에투가 슬라이딩 태클 비슷하게 몸을 던지며 슈팅.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날린 세르지우가 또 한 번 기막힌 선방을 보여주었으나 공을 잡아내진 못했다.
“다 비켜!”
욘 아르네 리세가 거칠게 소리치며 공을 뻥 찼는데 하필 주발이 아닌 오른발에 걸렸다.
멀리 뻗지 못한 공이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무한 대기 중이던 나에게 날아왔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 머리에 꽂혔다.
* * *
철썩-
전반 33분.
스타디오 올림피코를 침묵에 빠트리는 선제골이 터졌다.
“시발! 시발! 시이이이이발!”
도둑맞은(?) 한 골을 도로 찾아온 에투가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사실 숨길 생각도 없겠지만) 걸쭉한 욕설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러곤 나를 가리키며 활짝 웃어보였다.
“야, 백강! 방금 패스 진짜 개쩔었다. 인정한다, 인정해.”
칭찬에 인색한 에투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대단했다는 이야긴데...
사실 좀 그렇긴 했다.
방금 전 상황을 되돌려 보면, 로마 녀석들뿐만 아니라 우리 팀 동료들까지도 내가 당연히 슈팅을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 중거리 헤더로 넣은 골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난 끝까지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았고, 어느새 몸을 일으켜 완벽한 노마크 찬스를 잡은 에투를 발견했다.
박스 안에 수많은 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나의 초정밀 헤더 패스는 거침없이 날아가 에투의 발 앞에 툭 떨어졌다.
음식물을 믹서로 갈아서 식도에 직접 부어준 수준의 환상적인 어시스트.
에투는 그냥 가만히 서서 골을 주운 셈이었다.
자, 보셨습니까?
이게 바로 동양인 새끼와 아프리카 검둥이랍니다.
* * *
0-1로 뒤진 채 맞이한 후반전.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더 버티지 못하고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최악의 플레이를 선보였던 루카 토니를 불러들이고, 프란체스코 토티를 투입.
관중들이 한목소리로 토티의 이름을 연호하며 열광했다.
등장만으로도 분위기를 이렇게 바꿔놓다니.
이것이 ‘로마 황제’의 위용인가.
“모두 고개 들어라! 우승컵은 우리 거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토티의 한 마디에 로마 녀석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킥오프.
선제골로 약간의 여유가 생긴 우리 팀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볼을 돌렸다.
로마도 우리 역습을 의식했는지 함부로 공을 뺏으려 달려들기보단 1~3선의 간격을 유지하는 선에서 조금씩 조금씩 전진했다.
여기서 딱 표가 나는 부분이 바로 라니에리 감독의 역량.
11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번 시즌 로마의 리그 2위가 그냥 얻어진 건 아니었어.
상대의 은은하지만 틈이 잘 안 보이는 압박에 계속 뒤로 밀려나던 문타리가 내 머리를 보고 롱패스를 시도했으나 킥이 부정확했다.
센터백 주앙이 볼을 끊어내며 공격권이 로마 쪽으로 넘어갔다.
다니엘레 데 로시가 후방까지 내려가 공을 건네받고는 전방을 주시.
침투하는 미르코 부치니치를 향해 지체없이 로빙 스루패스를 연결했다.
“내가 처리할게!”
세자르 형님이 콜하면서 뛰쳐나갔는데...
어어?
마테라치 형님이 귀가 어두워서 못 들었는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예상 못 한 ‘팀킬’에 자세가 무너진 세자르 형님이 가까스로 공에 손을 갖다 대긴 했는데...
하필이면 볼이 함께 쇄도하던 토티에게 전달되었다.
토옥-
토티의 상징과도 같은 로빙슛이 골문 안으로 예쁘게 빨려 들어갔다.
Francesco-
Totti!!!!!
광분한 로마 팬들이 경기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후반 8분이었다.
* * *
토티의 발목에 문제가 있다는 게 거짓은 아닌 듯했다.
뛰는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고, 스프린트 후에는 약간 절뚝이는 모습까지 확인됐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티를 쓸 수밖에 없었던 로마의 사정이 안쓰럽고, 또 그 와중에 골을 넣은 토티는 대단하다.
코파 우승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
하지만 우리 역시 트레블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품고 있는 팀이다.
이런 데서 꺾일 순 없는 노릇이지.
경기 재개.
토티의 동점골로 사기충천한 상대는 홈 경기의 이점을 살려 압박의 강도를 좀 더 높여 왔다.
아직 끝나지 않은 로마의 페이스.
까아앙-
후반 들어 부치니치의 움직임이 살아나면서 반대급부로 토티에게 슈팅 찬스가 계속 났다.
이번에는 오른발로 감아 찬 중거리포가 크로스바를 강타.
아찔한 순간이었다.
오늘 영 잠잠하던 무리뉴 감독이 분위기 반전을 위해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유독 실수가 잦았던 문타리 아웃.
그 빈 자리는 판데브가 대신했다.
판데브는 워낙 다재다능해서 공격수나 윙어뿐만 아니라 미드필더도 충분히 소화 가능한 선수였으나, 문타리와는 확실히 다른 유형이었다.
조금 밀리는 흐름이지만 수비보다 공격을 통해 해법을 찾겠다는 무리뉴 감독.
일종의 정면돌파 선언이랄까?
십 년 감수한 세자르 형님의 골킥이 최전방으로 길게 뻗어나갔다.
“마이 볼!”
멕세는 리촐리 주심에게 구두 경고를 받은 이후 나와의 경합을 완전히 포기했다.
덕분에 안락하게 공을 따낸 내가 판데브에게 헤더 패스를 연결.
로마 미드필더진은 문타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직적인 압박으로 공을 탈취하려 했는데...
판데브는 이런 압박에 대처하는 자세가 문타리와 좀 달랐다.
타악-
오른쪽 측면으로 돌아 나가는 에투에게 스루패스를 날릴 것처럼 킥 페이크를 준 뒤, 오히려 왼쪽으로 직접 치고 나가며 시모네 페로타의 수비를 손쉽게 벗겨내 버렸다.
이게 바로 무리뉴 감독의 의도.
혼자 압박을 뚫어낼 만한 기술을 갖춘 판데브를 중원에 배치하면서, 팀의 돌격대장 역할을 맡긴 것이다.
거침없이 시원스러운 판데브의 전진.
꽉 막혀 있던 공격의 혈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라인 유지! 라인 유지!”
데 로시가 헐레벌떡 수비 진영으로 복귀하며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어설프게 대응했다간 에투의 침투 한 방에 숨도 못 쉬고 실점할 수 있는 상황.
그때 신나게 달리던 판데브가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파앙-
로마 수비진의 무게중심이 우리 투톱을 견제하기 위해 뒤쪽으로 처진 사이, 그 공간을 파고드는 스네이더에게 땅볼 패스가 연결되었다.
이야, 우리 고란!
역시 북마케도니아의 전설다운 시야와 판단력!
터엉-
판데브에게 자극이라도 받은 걸가?
스네이더의 멋들어진 논스톱 패스가 우왕좌왕하는 상대 수비의 틈을 뚫고 에투에게 향했다.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역습.
“백강!”
‘은혜 갚은 흑표범’을 노리는 에투가 그대로 러닝 크로스 시도.
이런 걸 한국에서는 상부상조라고 하지.
잘 먹겠습니다.
으어억?
* * *
나도 센터백 출신이지만, 기본적으로 수비수는 항상 딜레마를 안고 플레이를 한다.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막을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그렇다.
그래서 나는 에투의 크로스가 올라왔을 때, 맥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냥 놔두면 약 99% 확률로 골.
파울로 끊으면 페널티킥, 성공 확률은 어림잡아 80%.
이렇게만 생각하면 끊는 게 맞지만, 이미 내게 옐로카드 한 장이 있다면?
대체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선택의 기로에서 대부분은 당장의 실점을 두려워하며 파울을 한다.
멕세도 그랬다.
그리고 결과는...
“아까 말로 하는 건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리촐리 주심의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두 번째 옐로카드, 퇴장이었다.
막 분위기 타던 로마에게는 재앙.
토티와 데 로시를 위시한 로마 선수들이 거칠게 항의했으나 이미 내려진 결정이 바뀔 리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 멕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좀 안쓰러운 마음도 들지만, 어쩌겠는가.
“못 넣으면, 알지?”
“나 사무엘 에투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페널티킥은 에투에게 양보했다.
멀티골 달성을 눈앞에 둔 에투가 자신만만한 도움닫기 후 그대로 인스텝 킥.
근데 너무 골키퍼 정면으로 찼다.
파악-
정말 좋은 선방이었으나 공을 잡아내진 못했고, 이어지는 에투의 대처가 너무나도 빨랐다.
세르지우 골키퍼 손 맞고 튀어나온 볼을 도로 밀어 넣으며 기어이 2-1을 만들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냥 PK를 한 방에 넣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쁜 골.
“실수 안 한다며?”
“이왕이면 필드골로 넣으려 그랬지.”
본인도 민망한지 간사하게 웃으며 핑계를 대는 에투의 머리를 한 번 툭 쳐주었다.
이 골로 사실상 승부는 마무리.
내가 한 골을 더 추가하긴 했지만 승패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끝까지 수적 우위를 살리며 무난하게 3-1 승리.
코파이탈리아 2연패에 성공했다.
“이예에에에에!”
우승 확정 후 가장 기뻐한 건 마테라치 형님이었다.
본인의 실수로 동점골을 허용했던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
입은 거칠지만 은근 소심한 구석이 있다니까?
“좋은 게임이었어. 우승 축하한다.”
긴장이 풀리면서 통증이 심해졌는지, 이제는 제법 심하게 절뚝이는 토티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 발목, 멀쩡했으면 오늘 경기 몰랐겠네요.”
“축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립 서비스도 보통이 아닌걸?”
흐흐, 제가 세 치 혀 좀 놀릴 줄 알죠.
“이제 챔피언스리그만 남았네.”
“네, 그렇네요.”
“인테르 녀석한테 이런 말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반드시 이겨라. 이탈리아, 세리에가 만만치 않다는 걸 전 세계에 보여줘. 하비에르가 나보다 먼저 빅 이어를 드는 게 배는 좀 아프지만.”
‘황제’의 명을 어찌 거역하겠는가.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