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2010년 5월 16일.
2009-2010 세리에를 마감하는 38라운드가 열렸다.
우리의 상대는 리그 19위로 처지며 강등이 확정된 시에나.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의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한 시에나 선수들이었지만 챔피언의 벽은 높았다.
나를 비롯한 주전 선수들이 벤치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발로텔리가 자신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1-0 승리를 거뒀다.
“해냈다!”
문타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최종 전적 31승 7무.
지난 시즌 달성하지 못했던 ‘무패 우승’을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무패 우승은 1991-1992 시즌 밀란에 이어 두 번째였다.
작년보다 무승부가 많았던 탓에 승점은 오히려 3점 떨어진 100점에 그친 건 아이러니.
‘최다 승점’과 ‘무패 우승’ 중 뭐가 더 가치 있는 기록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 두 기록 다 우리 인테르가 보유했다는 거고, 대기록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 아니겠는가.
한편 우리와 유럽 최강의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될 바르셀로나는 31승 6무 1패, 승점 99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중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에서 일격을 맞은 게 유일한 오점.
다른 말 필요 없이 리그 성적만 보더라도, 두 팀의 기세가 얼마나 좋은지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만큼 많은 성취를 이뤘던 1년.
이제 마지막 추수만 남았다.
* * *
“으응?”
내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훈련장에 빨리 나온 사람이 있다고?
근데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에투라고?
“어이, 백강! 늦었네.”
에투한테 저런 말 들으니까 어쩐지 자존심이 확 상한다.
“그래도 2등이야. 늦은 건 아니라고. 근데 어쩐 일이야? 이렇게 일찍 나오고.”
지각이야 절대 안 했지만 시간 딱 맞춰서 오던 녀석인데 말이지.
“그냥... 몸도 찌뿌듯하고... 딱히 할 일도 없고...”
얼버무리는 걸 보니 대충 알겠다.
친정팀 만날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해서 저러는 거구만?
지금도 물론 좋은 선수지만, 바르셀로나에서의 에투는 정말 대단했었다.
우승 경력만 라리가 3번, 코파델레이 1번에 빅 이어도 두 번이나 들어 올렸으니...
2005-2006 시즌에는 라리가 득점왕까지 차지했었다.
199경기를 뛰면서 무려 130골.
거의 한 경기에 0.7골에 육박하는 미친 득점력을 보였다.
어떻게 봐도 구단의 레전드로 불리기에 충분한 선수.
하지만 운영진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 결과가 즐라탄과의 스왑딜.
일대일 교환도 아니고 ‘에투+현금=즐라탄’이었다.
우리 콧대 높은 카메룬 흑표범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는가.
결승전을 앞두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뭐, 복수하고 싶은 대상이라도 있는 거야?”
“유치하게 복수는 무슨...”
“솔직히 말해 봐. 우리 둘밖에 없는데.”
“펩. 그 자식한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
이렇게나 빨리 떡밥을 물 줄이야.
“과르디올라랑 잘 안 맞았나 봐?”
“말도 마.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감독은 난생 처음이었어. 날 그렇게 개무시한 감독도 펩밖에 없었지.”
두 사람의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생각보다 더 나빴나 보다.
에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성 강한 녀석.
과르디올라는 덕장(德將)하고는 거리가 먼 스타일에 선수 통제가 심한 걸로 알려져 있다.
생각해 보니 둘이 잘 맞았으면 그게 더 이상했겠네.
“에이, 시발. 기분 나쁜 얘긴 그만하고 훈련이나 하자. 마침 잘됐네. 혼자 하려니 심심했는데.”
“그래, 그러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앞으로 3일.
에투의 임전 상태는 최상으로 보인다.
* * *
- 선배님 정말 너무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반드시 이기시길 바랄게요 사랑합니다♥
- 정백강 파이팅!
- 세상 참 조아졌다? 이렇게 해외에 편하게 메시지도 보내고 ^^ 화이팅하고 골도 넣어라
- 인터 밀란 우승하면 보너스 나오지? 그걸로 한턱쏴 ㅋㅋㅋ 농담이고 잘해라.
- 백강아, 결승도 해트트릭 고고씽!
- 직접 가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선배님 아자아자!
- 이기고 얼른 건너와. 보고싶으니까 ㅋㅋㅋ
‘까톡’이 출시되면서 국가대표팀 동료들에게 응원 메시지가 많이도 왔다.
현재 대표팀은 챔스 결승 이틀 뒤에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다.
일본 녀석들 박살 내러 나도 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좀 있다.
그러고 보니 월드컵이 정말 코앞이구나.
한일전을 치른 대표팀은 바로 오스트리아로 넘어와 벨라루스, 스페인과 마지막 평가전을 치를 예정이다.
그 이후엔 남아공행.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바로 대표팀에 합류한다.
말인즉슨 월드컵 끝날 때까진 한국 땅을 못 밟는다는 이야기.
슈퍼스타로 산다는 게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그나마 나연은 얼마 전에 만났지만 엄마 얼굴은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다.
생각난 김에 전화나 한 번 드려야지.
한국이 지금... 오후 7시쯤 됐겠구나.
따르릉-
“어, 아들.”
언제 들어도 반가운 엄마 목소리... 사이사이로 사내놈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아들이라고요? 이모님, 지금 그거 정백강 선수예요?
- 대박대박! 진짜 대박! 통화 한 번 시켜주시면 안 돼요?
- 팬이에요! 챔스 꼭 이기세요!
- 야, 오늘 밥 먹으러 오길 잘했다.
“손님이 많은가 봐요?”
“말도 마라. 사람 하나 더 고용해야 하나 고민 중이야.”
“쓰시라니까.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네가 준 용돈은 안 쓴다고 했지?”
“쳇, 알았어요. 엄마, 지금 잠깐 스피커폰으로 바꿔 봐요.”
“왜?”
“팬서비스 좀 하려고요.”
“바꿨다.”
크흠, 목을 좀 가다듬고.
“응원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응원해주시고 <백강분식>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 우와아아아악!
- 정백강! 정백강! 정백강!
- 사랑해요! 절 가져요!
이게 바로 조련이라는 거지.
* * *
“이야, 날씨 한 번 죽이네!”
마테라치 형님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진짜 그러네요.”
창밖으로 보이는 마드리드의 하늘은 청명 그 자체.
“약간 덥지 않을까요?”
다비데 산톤의 말에 에투가 반응했다.
“이게 덥다고? 카메룬에선 말이야...”
산톤아, 너 잘못 걸렸다.
저거 최소 20분짜리 연설이거든.
대망의 결승전 장소는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기장 중 하나다.
또 내게는...
“백강, 오늘 설마 또 해트트릭하는 거야?”
문타리가 천진난만하게 물어 왔다.
“에이, 그게 마음대로 되겠어?”
아주 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치른 두 경기에서 무려 여섯 골.
모두 해트트릭을 기록했었다.
심지어 레알 팬들에게 기립박수까지 받았을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으리라.
“왜? 못할 것도 없지.”
“그... 그렇긴 하죠?”
사네티 주장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데 어쩐지 부담스럽다.
해트트릭하라고 압박 주시는 건가.
“오, 쟤네도 왔네.”
공교롭게도 양 팀의 버스가 비슷한 시간대에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오랜만이야.”
“정말이군.”
한때 나와 함께 인테르의 공격을 이끌었던 즐라탄.
그가 바르셀로나의 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제일 바쁜 건 당연히 에투.
옛 동료들과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과르디올라 감독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자, 들어가지.”
과르디올라 감독과 무뚝뚝하게 악수만 나눈 무리뉴 감독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하긴, 지금 친목질할 때가 아니긴 하지.
우린 전쟁을 치르러 왔으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꼼꼼히 몸을 풀어둬라. 경기 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네! 감독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반으로 갈라, 양 팀 선수단이 나란히 경기 전 훈련에 나섰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무래도 우리 쪽이 좀 더 경직되어 보이는 게 사실.
디펜딩 챔피언의 경험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의 몇몇 선수들은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다만 한 사람, 즐라탄만큼은 엄청나게 굳은 표정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즐라탄의 이번 시즌 기록은 44경기 출전 21골.
절대 나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또 이적료나 이름값을 생각하면 좋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트레이드 대상인 에투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에투가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에서 52경기에 나와 36골을 넣었으니...
내구성에서도, 실적 면에서도 많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바르셀로나 팬들이 부진한 즐라탄에게 비난을 퍼부은 것은 당연.
하지만 그 어떤 역적이나 ‘먹튀’도 오늘 하루만 잘하면 얼마든지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이란 그런 무대였다.
* * *
“후우...”
“너무 긴장하지 마, 고란. 잘 될 거야.”
“주전 출장은 미처 예상 못해서...”
“네 능력으로 따낸 자린데 뭘.”
무리뉴 감독이 예상 못 한 깜짝 카드를 꺼내들었다.
코파이탈리아 결승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판데브를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시킨 것이다.
로마보다 훨씬 거세고 조직적일 바르셀로나의 압박을 이겨내려면, 판데브가 필요하다는 판단이겠지.
문타리가 그동안 큰 경기에 조금은 약한 면모를 보였다는 사실도 고려한 듯했다.
“입장하시면 됩니다.”
안내요원의 말에 따라 사네티 주장을 필두로 한 인테르의 전사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진한 보랏빛 융단이 이 한 판의 무게를 다시금 절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와우.”
루시우가 나보다 앞서 걸어가면서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양 팀의 입장 경로 사이에 보란 듯이 세워져 있는 빅 이어.
저 우승 트로피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고 울었던가.
판데브한테는 긴장하지 말라고 했는데, 막상 트로피를 보고 나니 내 몸도 굳어버리는 기분이다.
선수 22명과 심판진 모두 입장 완료.
메인 카메라가 나란히 선 선수들의 모습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 내 앞에 당도했다.
“안녕! 안녕!”
나의 플레이어 에스코트로 나온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깨방정을 떨며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다.
귀여워.
그냥 카메라가 신기해서 그랬겠지만, 덕분에 긴장이 좀 풀렸다.
공식 주제가가 끝나고, 오프닝 공연에 나섰던 단원들도 퇴장했다.
이제 경기 전 마지막 악수 타임.
먼저 주장 카를레스 푸욜.
카탈루냐의 심장이자, 바르셀로나의 절대적인 리더.
178cm의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지만 존재감만은 어마어마했다.
빅토르 발데스 골키퍼를 거쳐 나와 같이 피파 베스트 11에 올랐던 다니 알베스.
설명이 필요없는 사비 에르난데스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바르셀로나의 주전 자리를 꿰찬 엄청난 재능들.
제라르 피케, 세르지오 부스케츠, 그리고 페드로 로드리게스.
프랑스 대표팀의 주축 수비수 에릭 아비달과, 외나무다리에서 다시 만난 옛 동료 즐라탄.
마지막으로...
“잘 부탁해.”
“나야말로.”
리오넬 메시까지.
쉬어갈 타선이 없을 정도로 숨이 턱 막히는 11명이었다.
선수 배치가 모두 끝나자, 관중석 어딘가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휘슬.
2009-2010 시즌 유럽 최강을 가리는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