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드디어 시작됐다.
툭- 탁- 틱- 턱-
바르셀로나의 화려한 패스 쇼가.
이번 시즌 거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극한의 티키타카.
한국의 안티팬들에게는 ‘애무 축구’라는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플레이임은 분명했다.
필드 위에서 제대로 구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물론 바르셀로나는 그럴 만한 능력을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는 팀이었다.
한편 티키타카를 상대하는 우리의 행동 수칙은 명확했다.
- 상대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마라. 굳건히 자리만 제대로 지켜라.
경기 시작 전 무리뉴 감독의 사전 지시.
점유율 같은 건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역습의 첨병인 에투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하프라인 아래쪽에 내려앉아, 각자 맡은 위치에서 수비에 전념하는 중.
솔직히 말하면, 공을 뺏고 싶다고 해서 뺏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르셀로나의 중원에는 특급 오브 특급 미드필더가 둘이나 있지 않은가.
직접 상대해 보니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사비랑 이니에스타가 같이 뛴단 건, 그냥 개사기다.
분명 수비 숫자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턴이나 원투 패스만으로 압박을 이겨내며 볼을 지키는 모습.
비록 적이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게다가 그 밑을 받치는 게 부스케츠면 뭐...
카탈루냐의 ‘세 얼간이’는 명실상부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진이라 불릴 만하다.
터엉-
횡패스 위주로 게임을 전개하며 점유율을 끌어올리던 사비가 기습적인 전진 패스를 시도했다.
수취인은 즐라탄.
평범하게 받고 다음 플레이를 전개하나 했는데, 별안간 공중으로 공을 띄웠다.
그러곤 태권도 풍의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오른쪽 측면을 향해 로빙 스루패스.
안타깝게도 힘이 너무 들어갔다.
메시가 끝까지 뛰어봤지만 라인 아웃.
오랜만에 우리 쪽으로 공 소유권이 넘어왔다.
흠, 즐라탄이 친정팀 상대로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긴 한데...
“즐라탄! 그게 아니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역시는 역시였다.
벤치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이 인상을 팍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겉멋만 잔뜩 든 플레이로 찬스를 허무하게 날렸으니 화를 낼 만도 하지.
에투가 그랬듯, 즐라탄도 과르디올라 감독과는 영 안 맞는 모양새다.
“와서 받아 줘야 돼!”
스로인을 준비하는 사네티 주장.
일단 공격권은 가져왔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바르셀로나의 진짜 무서움은 오히려 수비할 때 나온다.
스로인이 판데브에게 연결되는 순간.
숨도 못 쉴 것 같은 무자비한 압박이 가해졌다.
절묘하게 패스 나갈 구멍만 딱딱 막으며 판데브를 에워싸는 바르셀로나 선수들.
가까스로 공을 지켜낸 판데브가 별 수 없이 루시우 쪽으로 길게 백패스를 했다.
공격하면서 수비하고, 수비하면서 공격하는 팀이 바로 바르셀로나다.
‘경기력만 보면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탈리아 챔피언인 우리가 이렇게 고전할 정도니, 다른 팀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상대 압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독한테 대놓고 혼나며 자존심을 구긴 즐라탄이 루시우에게 거칠게 달려들었다.
황급히 캄비아소에게 패스했으나, 진드기(?)들의 공습은 계속되었다.
“여기!”
제대로 돌아서기조차 버거워 보이는 캄비아소에게 마이콘이 구세주가 되어 주었다.
“사무엘!”
천하의 마이콘도 촘촘한 연합 수비를 혼자서 뚫어낼 자신은 없었는지, 에투 쪽을 향해 원터치로 롱패스를 때려 넣었다.
티키타카의 근간은 극단적으로 좁은 1~3선 간의 간격.
패스 선택지를 늘림으로써 점유율을 확보하는 전략인데 필연적으로 광활한 뒷공간을 노출하게 되어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잘 상대하려면 이 뒷공간 공략이 제대로 되어야만 했다.
“시이이이이발!”
마이콘이 워낙 급하게 주다 보니 힘 조절이 안 되어 패스가 약간 길었으나, ‘펩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에투의 근성이 공을 살렸다.
바로 밀착 마크 들어가는 아비달.
지난 시즌 함께 빅 이어를 들어 올렸던 두 사람이 맞대결을 펼쳤다.
원래 발 빠른 선수를 상대할 때는 거리를 좀 두는 게 정석이었으나, 아비달은 과감하게 바짝 붙었다.
나에 대한 크로스를 다분히 의식한 수비인 듯싶다.
툭 치고 나가며 수비를 따돌리려는 에투와, 죽어도 돌파는 용납할 수 없는 아비달 사이의 치열한 경주.
퍼억-
아비달이 끝끝내 몸을 날리며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끊어냈다.
둘 다 오른손을 번쩍 들었으나 부심은 우리 팀의 스로인을 선언했다.
“다 올라가! 당장! 빨리!”
무리뉴 감독이 손짓을 하며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전진 배치를 지시했다.
상대는 바르셀로나.
어차피 점유율에선 밀릴 게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산발적으로 찾아오는 기회를 소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마이콘이 스로인을 에투에게 짧게 연결한 후 리턴 패스를 받았다.
“백강!”
사비와 페드로가 자신을 덮치기 전에, 재빠르게 얼리크로스를 시도하는 마이콘.
압박이 워낙 거세다 보니 평소보다 플레이가 훨씬 급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마이콘이 이럴 정도였으니,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헤맸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다.
킥이 정교하진 않았지만 어찌 잡을 수는 있는 수준.
흠...
공중에서 경기장을 쓱 둘러보았는데 패스 줄 곳이 영 마땅치 않다.
요소마다 상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한 명씩 진을 치고 있는 상황.
과르디올라 감독의 제자들답게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에라 모르겠다.
콰아앙-
어떻게든 공격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 거리가 많이 멀지만 그냥 슈팅을 해버렸다.
하지만 골키퍼 정면.
발데스가 푸욜에게 공을 슬그머니 굴려 주었다.
다시 시작된 바르셀로나의 시간.
당분간은 또 수비에 전념해야 한다.
앞에서 요리조리 볼을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고역 그 자체.
그래도 흥분은 절대 금물이다.
상대 페이스에 말려드는 순간 게임 오버니까.
체감 점유율은 20 대 80 정도로 밀리곤 있지만, 긍정적인 부분은 메시에게 볼 투입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왼쪽 풀백으로 나선 사네티 주장과 수비형 미드필더 캄비아소가 좋은 견제를 보여주는 중.
세 사람이 모두 아르헨티나 출신이라는 것도 재밌다.
메시가 선배 대접이라도 하는 것일까?
실없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이콘에 대한 바르셀로나의 대답, 알베스가 침묵을 깨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메시가 어그로를 끌며 만들어준 공간으로 기습적인 침투 시도.
파앙-
사비의 칼날 같은 스루패스가 여지없이 날아갔다.
미친 시야, 그리고 더 미친 정확도.
쇄도하는 알베스의 속도를 전혀 죽이지 않는 완벽한 패스였다.
“내가 막을게! 안쪽 커버해!”
주장이 알베스를 잡으러 달려가면서 지시를 내렸지만, 메시의 순간 스피드가 워낙 빨랐다.
순식간에 캄비아소의 마크를 따돌리며 박스 안으로 진입하는 메시.
오오오-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졌다.
알베스가 깔아준 패스를 받은 메시가 무심하게 툭 찍어 찬 공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완전히 깨며 즐라탄에게 전달.
즐라탄은 또 그 패스를 시저스킥으로 마무리했다.
두 천재가 빚어낸 환상적인 장면.
만약 들어갔다면 ‘올해의 골’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파악-
그러나 우리 골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자르 형님이 동물적인 반사신경을 뽐내며 몸을 날려 슈팅을 쳐냈다.
“나이스 플레이!”
주장이 넘어진 세자르 형님을 일으키며 거칠게 하이파이브.
공격 클래스에 걸맞은, 정말 멋진 선방이었다.
이어지는 바르셀로나의 코너킥.
전반적으로 단신 선수가 많은 바르셀로나였지만, 190대 중반의 즐라탄과 피케에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백강! 피케 좀 잡아줘, 즐라탄은 내가 막을게.”
“알았어.”
루시우의 요청에 따라 나의 상대가 결정되었다.
키커인 사비는 공중의 제왕인 나를 피해 즐라탄 쪽을 노렸고, 다행히 루시우가 먼저 머리를 갖다 댔다.
혼전 상황에서 루즈볼을 안전하게 멀리 걷어내는 왈테르 사무엘 형님.
딱히 노리고 찬 건 아닌 것 같았는데, 바르셀로나의 공격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에투가 얼결에 좋은 찬스를 맞았다.
“달려! 계속 달려!”
에투에게 소리치면서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뻥 뚫린 오른쪽 측면 공간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에투.
‘에투 측면 역습-정백강 헤더골’은 이번 시즌 우리 팀의 유명한 득점 공식이다.
위험하겠다 싶었는지, 따라오던 피케가 내 유니폼을 심하게 잡아끌었다.
삐비빅-
다행히 근처에 있던 하워드 웹 주심이 파울 장면을 정확하게 캐치.
오늘 경기 첫 옐로카드가 나왔다.
“네? 저요?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피케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급 연기를 선보였으나 냉정한 웹 주심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이번엔 우리 팀의 세트피스 기회.
키커는 스네이더.
골문과의 거리는 약 35m.
직접 슈팅을 노리기엔 좀 멀었다.
야, 근데 이건 좀...
“마크 오케이!”
내가 4강 2차전에서 터뜨렸던 미친 헤더골이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인상 깊게 남은 것일까?
피케와 즐라탄이 둘 다 내게 붙을 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과잉투자 아닌가.
가뜩이나 평균 신장 차이가 나는데 최고 장신인 두 명이 날 막고 있으면 나머지는 어쩌려고...
게다가 내 위치는 페널티박스 바깥이다.
터어엉-
수비 상태를 확인한 스네이더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공을 띄워 보냈다.
루시우와 아비달이 동시에 점프했으나 둘 다 타이밍이 너무 빨랐다.
누구의 머리도 맞지 않은 채 지나친 공.
아니?
그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자신보다 10cm 가까이 작은 사비를 높이로 제압하며 헤더.
강력하진 않았지만 발데스 골키퍼의 역동작을 유도한 노련미 넘치는 슈팅이었다.
철썩-
전반 24분.
스코어보드에 드디어 ‘1’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우오오오오오오-
인테르 응원석은 거의 지진이 난 것처럼 들끓었다.
선제골의 주인공이 이 사람이 될 거라 누가 예상했을까.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Javier-
Zanetti!!!
Javier-
Zanetti!!!
Javier-----
Zanetti!!!!!!!!!!!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사네티 주장이 이렇게 울부짖는 모습은 처음 본다.
잔디 위로 쭉 미끄러지며 엠블럼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그 뒤를 따라간 9명의 추종자(?)들이 일제히 주장을 덮쳤다.
주장의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1호 골이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터졌다.
바르셀로나의 명백한 수비 실패.
즐라탄이나 피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박스 안쪽에 두었어야 했다.
상대 높이가 워낙 낮다 보니 스네이더가 아무 거리낌 없이 위험지역에 볼을 붙여놓을 수 있었던 것.
나에 대한 지나친 공포심이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괜찮아! 겨우 한 골이다! 얘들아, 정신 차리고 집중하자! 집중!”
주장다운 리더십을 발휘하며 후배들의 멘탈을 부여잡는 푸욜.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몰랐다.
이 한 판에 얼마나 처절한 드라마가 기다리고 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