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92화 (93/176)

92화

경기 재개.

점수판의 숫자는 바뀌었지만 바르셀로나가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다시 시작된 티키타카.

자신들의 축구를 지속하다 보면 언젠간 기회가 올 거라는 믿음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 믿음의 중심에는 ‘메시아’ 메시가 있었다.

터엉-

사비가 메시 쪽으로 패스를 내주면서 슬쩍 전진했다.

축구 교과서에 나올 법한 정석적인 ‘패스 앤 무브’.

사비의 공격 가담을 견제하느라 메시에 대한 압박이 약간, 아주 약간 느슨해졌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메시.

판데브의 스탠딩 태클을 가볍게 회피한 후 캄비아소의 가랑이 사이로 알까기를 시전, 순식간에 두 명을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렸다.

뻐어엉-

완전 탄력 받은 메시가 그대로 중거리슛 시도.

왼발에 제대로 감겨 회전을 잔뜩 먹은 공이 야신 사각지대를 향해 날아갔다.

아아-

벌떡 일어났던 바르셀로나 팬들이 탄식과 함께 다시 주저앉았다.

또 한 번의 슈퍼 세이브.

용수철처럼 몸을 솟구친 세자르 형님이 손끝으로 슈팅을 쳐냈다.

표현이 영 좋진 않지만, 오늘 정말 ‘약 제대로 빨았다’.

이어지는 바르셀로나의 코너킥.

사비가 공중볼 경합으로는 재미를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일단 짧게 연결한 후 후속 플레이를 노렸다.

공을 잡은 선수는 이니에스타.

스피드가 좀 느려서 그렇지, 테크닉만 보면 그 리오넬 메시에게도 꿀리지 않는 크랙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밀집 수비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드리블 돌파를 시도.

한때 바르셀로나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티아고 모타의 스탠딩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은 뒤, 판데브마저 숄더 페이크를 통해 멋지게 제쳤다.

정말 ‘월드클래스’라는 표현이 딱 맞는 유려한 스킬.

하지만 이니에스타의 정말 무서운 점은, 그렇게 정교한 드리블을 하다가도 벼락처럼 페널티박스 안으로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찔러 넣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파앙-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철썩-

사네티 주장의 선제골 이후 불과 5분이 지난 시점에서 동점골이 터졌다.

우리 수비진의 시선이 이니에스타와 메시, 즐라탄에게 고정된 사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페드로의 아주 영리한 침투가 있었다.

빼어난 드리블도, 무지막지한 스피드도 없는 페드로가 바르셀로나의 주전 윙포워드로 뛸 수 있는 이유를 증명하는 순간.

철옹성 같던 세자르 형님이 페드로의 강렬한 오른발 슈팅에 드디어 무너졌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바르셀로나의 모든 선수들이 달려와 페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이 골이 전반전의 마지막 득점이었다.

* * *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다. 리드를 지키지 못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생각한 대로 흘러가고 있어.”

하프타임.

무리뉴 감독은 전반전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볼 점유율은 36% 대 64%로 밀렸지만, 슈팅과 유효 슈팅 개수는 각각 6개와 3개로 동일했다.

득점 찬스 자체는 비슷한 수준으로 가져가고 있다는 이야기.

“결국 집중력과 심장 싸움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 단단히 차리도록.”

“알겠습니다! 감독님!”

특별한 전술적 지시사항이나 선수 교체는 없었다.

무대가 무대고, 상대가 상대인 만큼 빡센 경기가 될 거라는 건 예상했던 터.

과르디올라 감독도 특별한 불만은 없었나 보다.

바르셀로나 역시 전반전과 동일한 라인업으로 후반전에 나섰다.

킥오프.

후반 초반의 기세는 아무래도 최근에 골을 넣은 상대 쪽에서 먼저 잡고 들어갔다.

특히 아주 인상적인 중거리포를 선보였던 메시는 완전히 살아난 모양새.

잘 버티던 사네티 주장-캄비아소 라인이 슬슬 고전하기 시작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오른쪽 풀백인 알베스를 거의 공격수 자리까지 전진 배치한 후, 왼쪽 풀백인 아비달의 오버래핑을 제한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일종의 변형 3백.

오른쪽 측면에서 ‘알베스 막을래? 메시 막을래?’의 2지선다를 끊임없이 강요하며 우리 수비진을 흔드는 바르셀로나.

‘FIFA 베스트 일레븐’ 중 두 명이 작정하고 덤벼드니 그 위력이 정말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후반 10분, 기어이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 * *

마드리드 원정길에 오른 바르셀로나 팬들을 열광시키는 데는 딱 4번의 패스가 필요했다.

주연은 메시였고, 즐라탄이 환상적인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출발점은 알베스.

메시가 중앙 쪽으로 포지셔닝하며 생긴 공간을 계속해서 공략하던 알베스가, 사네티 주장의 수비를 따돌리며 즐라탄의 머리를 겨냥한 크로스를 시도했다.

그러나 좋은 자리를 선점한 사무엘 형님이 헤더 클리어.

여기까진 좋았는데...

앞서 무리뉴 감독이 뭐라고 했나.

‘집중력 싸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캄비아소가 뒤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메시를 인지하지 못하면서 치명적인 턴오버를 저지르고 말았다.

공을 뺏어낸 메시가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즐라탄에게 땅볼 패스.

루시우와의 몸싸움을 이겨낸 즐라탄은 다시 메시에게 리턴.

이 과정이 한 번 더 반복되고 나니, 메시의 앞에는 세자르 형님밖에 남지 않았다.

톡-

골키퍼 위치 확인하고 띄워 찬 로빙슛이 라인 안쪽으로 떨어졌다.

“오프사이드!”

우리 4백 라인이 황급히 손을 들어 봤지만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뒤집힌 경기.

최대 라이벌의 안방에서 챔피언스리그 2연패라는 금자탑에 한 발 더 다가간 바르셀로나였다.

광란의 도가니에 빠진 팬들이 ‘작은 영웅’의 이름을 연호하며 찬사를 보냈다.

관중들에게 인사를 마친 메시는 곧바로 벤치로 달려가 과르디올라 감독의 품에 안겼다.

천재 선수와 천재 감독의 뜨거운 포옹.

분위기만 보면 무슨 골든골이라도 넣은 것 같다.

저기요, 경기 아직 안 끝났거든요?

* * *

흔히 축구 스타일이 상극이라고 평가되는 우리와 바르셀로나지만, 똑 닮은 점이 하나 있다.

바로 한 번 리드를 잡았을 때 승리까지 가지고 가는 힘이 엄청나다는 것.

다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유럽 최고로 평가받는 역습 능력을 바탕으로 추격하는 상대를 철퇴로 내리치는 스타일.

반면 바르셀로나는 본인들이 가장 잘하는 티키타카로 상대에게 공격 기회 자체를 안 주며 말려 죽이는 팀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지옥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아오! 시발 진짜!”

대신 욕해줘서 고맙다, 에투야.

쟤네가 작정하고 볼을 돌리기 시작하니까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마음은 점점 급해지는데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다.

과르디올라, 이 지독한 양반은 페드로를 빼고 중앙 미드필더인 세이두 케이타를 투입하며 중원을 한층 두텁게 만들었다.

철퇴고 나발이고 일단 공을 잡아야 휘두를 거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시원스러운 슬라이딩 태클로 한 명 담가(?) 버리고 싶을 정도.

결승전만 아니었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대도 사람인지라 실수가 아예 안 나오진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쫓기는 탓에 우리의 역습이 평소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티키타카를 감상하는 사이 벌써 후반 35분.

이젠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모두 올라가! 밀어붙여!”

잔뜩 웅크리고 있던 우리 선수단이 무리뉴 감독의 지시에 따라 라인을 바짝 끌어올렸다.

덕분에 추가 실점 위험은 높아졌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냥 앉아서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최후의 10분.

이제는 이판사판이었고, 우리의 목표는 매우 단순해졌다.

1. 어떻게든 공을 뺏을 것.

2. 빼앗은 공을 상대 골대에 집어넣을 것.

삐빅-

무력감 때문에 잔뜩 흥분한 판데브가 이니에스타를 거칠게 밀치면서 푸싱 파울 지적과 함께 옐로카드를 함께 받아들었다.

현시점에서의 퇴장은 곧 패배를 의미.

무리뉴 감독이 만약을 대비해 판데브를 빼고 귀여운 문타리를 투입한 게 바로 이때였다.

인테르 응원단마저 희망을 버린 채 경기 종료를 기다리던 암울한 시간대.

하지만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촤아악-

축구의 신이 아니고서야 절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교체로 들어온 문타리가 그전까지 아무도 빼앗지 못했던 사비의 공을 과감한 슬라이딩 태클로 탈취해버린 것이다.

“파울! 심판! 이거 파울이잖아요!”

졸지에 잔디 위에 나동그라진 사비가 강력하게 어필을 했지만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사비의 탈압박 능력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방심하던 상대 수비진에 비상경보가 울렸다.

‘인테르표 역습’의 시작.

“백강!”

공을 빼앗은 문타리는 반사적으로 나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이제는 나의 선택.

처음엔 다이렉트 슈팅을 생각했으나,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추가시간 포함, 남은 시간은 약 3분가량.

더 확실한 찬스가 필요했다.

문타리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나, 그렇다면 나는?

“마이콘!”

아비달과의 몸싸움에서 승리한 인테르의 ‘오른쪽’이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위풍당당하게 진격하는 중이었다.

상대 오프사이드 트랩은 이미 박살 난 상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파앙-

살짝 밀어서 보낸 공이 마이콘의 오른발 앞에 안착.

직접 슈팅도 가능했지만, 마이콘은 그 와중에 쇄도하는 에투를 발견했다.

옛 동료인 푸욜과 피케가 에투를 향해 동시에 슬라이딩 태클.

“넣어줘! 시발!”

최후의 최후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은 에투가 두 사람의 태클을 절묘하게 피하며 나를 향해 땅볼 크로스를 연결했다.

* * *

바보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골의 예술성에도 점수를 매긴다면 메시와 즐라탄이 합작한 세 번째 골은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을 만한 장면이었다.

극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두 선수의 하모니가 만들어낸, 정말 멋진 득점이었으니까.

이에 비하면 알베스와의 치열한 몸싸움을 겨우 이겨내고, 겨우 공에 발을 갖다 댄 나의 골은 예술적 가치는 전혀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현행 축구 룰은 골문 안으로 들어간 공에 있어서 우열을 설정하지 않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동점골이 터졌다.

나의 이번 시즌 챔스 23번째 득점이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내 축구 인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나를 흥분하게 만든 골은 없었다.

그 어떤 글이나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기분.

그냥, 하늘에 붕 뜬 것 같았다.

“쿠아아아아아앙!”

도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나의 괴성이 그 증거.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녀석들은 단체로 멘붕에 빠졌다.

올해 챔스에서 단 한 골도 없던 사네티 주장이 선제골을 넣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문타리가 게임 체인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단판 승부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

2-2 상황에서 휘슬.

결국 두 팀은 90분 동안 자웅을 겨루지 못했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무리뉴 감독이 다시 한번 교체 카드 사용.

모타를 빼고 발로텔리를 투입하며 4-3-1-2에서 4-3-3 포메이션으로 변화를 꾀했다.

전술도 전술이지만 승부차기까지 생각한 선택이었다.

발로텔리 하면 ‘페널티킥 장인’으로 유명한 선수였으니.

여기까지 오자 오히려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승부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심리적인 착각의 효과.

냉정하게 보면 한 점 앞서던 경기가 따라잡힌 것에 불과했으나, 자기네들이 느끼기엔 마치 이긴 경기를 강탈당한 듯한 불쾌감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머리를 유지해야 하는 결승전.

감정에 사로잡힌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평소 공격진과의 기가 막힌 연계 능력을 자랑하는 알베스가 자기답지 않게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다가 사네티 주장에게 차단당하면서 역습 위기를 자초.

공을 끊어낸 주장은 지체없이 스네이더에게 다음 공격을 맡겼다.

“여기!”

“이쪽! 시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나와 에투가 골 냄새를 맡으며 동시에 질주.

스네이더가 부스케츠의 때늦은 태클을 여유 있게 피하며 공을 높게 띄웠다.

매치업인 피케는 이미 경합을 포기.

콰아아아앙-

내 이마에 정통으로 맞은 공이 발데스 골키퍼가 손 쓸 수 없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