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삑- 삑- 삑--
경기 종료 휘슬이 마치 천상의 음악처럼 울렸다.
최종 스코어 3-2.
숨가쁘게 달려온 2009-2010 시즌.
유럽 최강팀은 인테르로 결정되었다.
“시이이이이이이발!”
‘옛날 팀’을 꺾고 우승에 성공한 에투의 포효.
개인적으로는 챔피언스리그 2년 연속 우승에, 또 2년 연속 트레블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쯤 되면 트로피를 부르는 사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냈다. 해냈어...”
마침내 숙원사업(?)을 이룬 사네티 주장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아유, 왜 또 울고 그러세요. 다 큰 어른이.”
“이 녀석이...”
역시 주장 놀리기가 꿀잼이다.
“흐어어엉...”
여리디여린 문타리는 아예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에이씨, 주변에서 다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나려고 하잖아...
마이콘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커다란 브라질 국기를 몸에 휘감은 채 기쁨을 만끽하는 중.
“그건 또 어디서 났어?”
“구단에서 주던데? 저기 봐, 고란도 마케도니아 국기 휘날리고 있잖아.”
아니, 그런 고급 정보를 왜 이제야?
후다닥 달려가서 직원에게 문의하니 생긋 웃으며 대형 태극기를 건네주었다.
“자! 다들 모여! 인사하러 가자!”
눈이 빨갛게 물든 무리뉴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무려 45년 만의 챔스 우승, 그리고 사상 첫 트레블.
말 그대로 인테르라는 구단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 정도면 밀라노에서 마드리드까지 와준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은 제대로 한 것 같다.
Pazza Inter Amala!!!
Pazza Inter Amala!!!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는 관중들의 얼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눈물 콧물 범벅.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장은 눈물을 또 한 바가지 쏟으며 고맙다는 말을 거듭 반복했다.
이 감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장내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시상식이 바로 거행되었다.
바르셀로나 선수들부터 먼저 메달을 수여 받았다.
비록 우리가 승리하긴 했지만 정말 한 끗 차이.
‘최강의 적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대였다.
준우승 메달을 목에 건 메시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우리 차례.
발롱도르를 3번이나 수상한 프랑스 축구의 전설이자, 현재 UEFA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미셸 플라티니가 시상자로 나섰다.
“50년 가까이 축구를 봐왔지만 자네 같은 선수는 처음일세. 허허허. 고생 많았네, 정말 훌륭했어.”
플라티니가 나와 악수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왔다!”
좀처럼 호들갑을 떠는 일이 없는 발로텔리가 마침내 등장한 빅 이어를 보고 흥분에 차 소리를 질렀다.
녀석에게도 챔스는 특별한 대회인 모양.
주장이 플라티니 회장에게서 건네받은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리자, 마드리드의 하늘에 엄청난 양의 꽃가루가 휘날리며 미친 듯이 폭죽이 터졌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환상적인 순간이었다.
* * *
- 미쳤다 미쳤어 ㅠㅠ
- 결승전에서도 2골 ㄷㄷ 그냥 정백강의 대회였다
- 이제 정메대전 끝!
- 적절한 태극기까지 완벽 그 자체...
- 꾸레놈들 조용한 거 보소 ㅋㅋㅋㅋ 그 많던 꾸레들 다 어디 감??
- 지금 메시 하이라이트 보면서 울고 있답니다, 글 내려주세요.
- 이런 게 바로 슈퍼스타지 ㅋㅋㅋ
- 정백강 골 넣을 때 소리질렀다가 부모님 깨셔서 왕창 혼남 ㅠㅠ 그래도 행ㅋ복ㅋ
- 이 기세 그대로 월드컵까지 고고!
[정백강, 세계 축구의 정점임을 증명하다]
[후반 종료 직전, 그리고 연장전... 빛났던 정백강의 ‘클러치 능력’]
[토너먼트 7경기 14골... 강팀에게 더 강한 ‘몬스터’ 정백강]
이번 결승전은 ‘최강 클럽 결정전’이라는 의미도 물론 있었지만, 그 못지않게 나와 메시의 ‘넘버원 대결’에 많은 포커스가 쏠렸었다.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는 두 선수가 가장 높은 무대에서 만났으니까 당연한 일.
메시 역시 득점을 기록하며 아주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승부를 결정지어버린 나의 포스와 비교하면 조금은 모자랐던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서열 정리’가 되었다고나 할까?
한편 ‘정백강 VS 메시’라는 주제를 다룬 <<포포투>>의 특집기사에서 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던 폴 개스코인은, 짓궂은 기자들의 질문에 항복 선언을 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정백강이 세계 최고의 선수다.”
개스코인 외에도 수많은 축구인들의 찬사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정백강이 나의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깬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는 완벽한 선수다. 바이에른 뮌헨 소속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게르트 뮐러)
“내가 사랑하는 메시의 우승을 간절히 염원했지만 정백강이라는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디에고 마라도나)
“인테르의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가 어느 날 내게 전화해서 이런 말을 했다. ‘자네를 뛰어넘는 선수가 드디어 나왔다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호나우두)
“파워풀하면서도 영리하다. 결점이 없다.”(파올로 말디니)
“그의 머리에는 축구의 신이 자리하고 있다.”(프란체스코 토티)
“내가 함께 뛰었던 선수 중 단연 최고.”(루이스 피구)
그 중에서도 가장 팔불출스러운 발언은 역시 무리뉴 감독에게서 나왔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누구냐고? 우리 모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보지 않았던가?”
* * *
트레블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오스트리아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이제는 ‘인테르의 정백강’이 아닌 ‘대한민국의 정백강’ 모드로 들어가야 할 때.
2010 남아공 월드컵 개막까지 겨우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결국 월드컵에서 뛰게 되는구나...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회귀 전, 포츠머스 이적 이후 출전 기회를 전혀 받지 못했던 나는 떨어진 경기 감각 때문에 평가전에서 엄청난 자동문 수비를 선보였었다.
허종무 감독의 신뢰를 완전히 잃은 건 당연지사였고, 결국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통보받은 날 또 술 엄청나게 마시고 클럽 가서 깽판을...
에휴, 우울한 기억은 그만 떠올리자.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비행기가 목적지인 인스부르크에 도착했다.
와우...
취재진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순간 여기가 인천공항인가 싶었을 정도.
나의 스타성도 물론 있겠지만, 월드컵 시즌이라는 특수성도 작용한 것처럼 보였다.
졸지에 기자회견 진행.
- 환상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즌을 보냈다. 소감이 어떤가?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탈락했을 때는 정말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올해는 정확히 그 반대다. 트레블 달성 순간에는 정말 여한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다음날 깨달았다. ‘아, 월드컵이 남았지?’ 하고 말이다. 하하하.”
- 오늘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는데, 다른 선수들에 비해 많이 늦은 편이다. 호흡에 문제는 없을까?
“활동 무대가 유럽이다 보니, 훈련에 많이 참여 못 한 게 사실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우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같이해온 경험이 있고, 아직 평가전 두 번이 남아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다. 경기장에서 플레이로 보여드리겠다.”
- 앞으로 벨라루스와 스페인을 상대로 평가전을 치르게 된다. 경기를 전망한다면?
“벨라루스는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로 보고 있다. 스페인은... 아시다시피 피파 랭킹 2위의 세계적인 강호 아니겠는가? 승패를 떠나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긴다면 더욱 기쁘겠지만...”
- 대표팀 주장 박지승 선수는 이번 월드컵 목표를 ‘첫 원정 16강’으로 잡았다. 정백강 선수도 이번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을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16강 진출이다. 2006년 독일에서 선배들이 실패했던 미션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다. 팀 성적 외에 개인적으로는 역시 득점이 목표다. 나는 공격수니까.”
- 몇 골 정도 넣을 거라 예상하나?
“이런 거 말하고 못 지키면 욕 많이 먹을 것 같은데... 과감하게 3골 이상을 노려보겠다.”
- 마지막으로 한국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팬들의 열띤 응원만큼 선수들에게 힘이 되는 건 없다. 지던 경기도 비기게 만들고, 팽팽한 경기는 승리로 이끌어주는 게 바로 여러분들의 성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열심히 할 테니,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리겠다.”
* * *
“세계 최고의 선수, 정백강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정백강! 정백강! 정백강!”
대표팀 막내 라인인 기성영-이창용 콤비가 떠들썩하게 나를 맞았다.
나의 합류로 23인 로스터가 비로소 완성.
“이것들이 선배를 놀려? 그나저나 한일전은 잘 봤다. 나 없이도 잘하던데?”
“에이, 저희보단 지승 선배가 쩔었죠.”
“하긴... 그건 그렇다.”
“아니, 그걸 또 그렇게 쉽게 인정하면 좀 서운한데요?”
챔스 결승 때문에 내가 뛰지 못한 한일전.
박지승 선배는 전반 6분 폭풍 드리블 돌파에 이은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멋진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향후 두고두고 회자될 전설의 ‘산책 세리머니’를 시전하며 사이타마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일본 관중들을 깊은 침묵에 빠뜨렸다.
크... 내가 차출됐으면 그 장면을 라이브로 볼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네.
지승 선배의 골로 기세가 오른 우리 대표팀은 시종 유리한 경기를 펼쳤고, 후반전 박주연의 페널티킥 골을 묶어 2-0으로 깔끔한 승리를 거뒀다.
이날이 마침 일본 대표팀의 월드컵 출정식이 열리는 날이라 고소함이 한층 배가되었다.
“근데 성영이 너, 입을 좀 조심해야겠더라?”
“에이, 형. 형까지 왜 그러세요. 사실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요. 크크큭.”
이 경기는 여러모로 화젯거리를 많이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성영이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경기 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변한 것이다.
- 우리 대표팀의 가장 큰 전력인 백강이 형이 안 뛰었는데도 2-0이란 결과가 나왔어요. 이게 지금 한일 양국의 격차라고 볼 수 있겠죠.. 일본이 우리를 이기려면... 음... 한 10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홈에서 무력하게 패해 가뜩이나 기분 나쁜 상황.
성영이의 도발적인 발언은 활활 타는 불에 휘발유를 부은 꼴이었고, 일본의 주요 언론에서는 이 소식을 크게 다루며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네티즌들의 반응이야 훨씬 심했고 말이다.
“성영이 너, 미니홈피에 ‘갑갑하면 여러분이 뛰세요’라고 했다가 탈탈 털렸던 거, 벌써 잊었어?”
“아이, 형. 지금 몇 년 전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저 이제 철들었습니다.”
“하여튼 조심해. SNS도 좀 조심해서 하고. 소통하는 건 좋은데 실수하기 십상이니까. 다 널 위해서 하는 얘기야. 그런 말도 있잖냐.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다.’”
“네? 그런 말이 있어요? 저는 처음 듣는데.”
아... 이 말이 아직 나오기 전이구나.
“사실 내가 만든 말이야.”
“오... 뭔가 있어 보이네요. 명심할게요.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다!”
그래, 사고 좀 치지 말자.
특히 ‘리더’나 ‘묵직’ 어쩌고 하는 얘기는 절대 금지다, 성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