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2010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 위치한 티볼리 노이 슈타디온.
FIFA 랭킹 47위인 대한민국과 2위 스페인이 만났다.
두 팀의 통산 4번째 맞대결.
앞선 3번의 경기 전적은 우리 기준 2무 1패로 아직 ‘판맛’을 보지 못했다.
물론 2002년 월드컵 8강에서는 승부차기로 우리가 승리한 적이 있었지만 공식 기록은 무승부였으니...
앞서 펼쳐진 벨라루스전에서 2-0 완승을 거두면서 분위기가 한껏 오른 우리 대표팀이었지만, 상대는 어디까지나 스페인.
유로 2008 챔피언이자, 이번 월드컵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다.
험난하기로 소문난 유럽 예선을 10전 10승으로 통과했으며, 경기당 평균 2.8골이라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뽐냈다.
객관적 전력에서는 어떻게 들이대기 민망한 수준.
하지만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가 경기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지배’와 ‘승리’가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한국에는 정백강이 있지 않은가? 역습 상황에서 그보다 위력적인 선수는 없다. 방심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흠... 좀 살살 하셔도 될 것 같긴 한데.
우리 팀엔 전력 누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박지승 선배의 무릎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선발 명단에서 빠졌다.
상대가 스페인이 아니라 스페인 할아버지라도 평가전은 평가전일 뿐.
월드컵 본선을 앞둔 때니 관리는 필수다.
“가장 중요한 건 수비 조직력이다.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해. 형표랑 용헌이가 말을 많이 해주고, 미드필더들도 많이 뛰어줘. 알았지?”
허종무 감독의 신신당부.
스페인은 우리에게 ‘가상의 아르헨티나’다.
월드컵 본선에서 우리보다 강한 팀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한 실전 훈련인 셈.
근데 어째 ‘가상 아르헨’이 실제 아르헨보다 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형님, 오늘 크로스 기대하겠습니다.”
“백강아, 알지? 개떡같이 올려도 찰떡같이 넣는 거.”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승 선배의 공백은 ‘왼발의 마술사’ 염기헌 선배가 메우게 되었다.
전반적인 클래스로만 따지면 물론 지승 선배와의 비교는 힘들겠지만, 킥력 하나만큼은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 기헌 선배다.
자신감 있게 하자구요, 선배.
스페인의 공격력을 의식한 우리 대표팀은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 두는 4-2-3-1 포메이션으로 출발.
이에 맞서는 ‘무적함대’는 역시나 점유율 축구에 최적화된 4-3-3이다.
선수 테스트를 하려는 건지 완벽한 1군 멤버는 아니었다.
다비드 비야, 페르난도 토레스, 사비 에르난데스, 카를레스 푸욜 등은 벤치에서 대기 중.
물론 그 대체자가 페르난도 요렌테, 후안 마타, 세스크 파브레가스, 카를로스 마르체나라는 건 함정이었다.
이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스페인의 스쿼드 뎁스는 정말...
2군으로 나와도 월드컵 16강은 거뜬할 것 같다.
“이렇게 빨리 재회할 줄은 몰랐네.”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혈투를 벌였던 상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나 말이야.”
수더분한 인상 때문에 그런진 몰라도, 바르셀로나 선수들 중엔 이니에스타가 가장 호감이다.
“세스크가 너한테 많이 벼르고 있더라고. 오늘 조심해야 할 거야.”
“나한테? 왜?”
“아스널하고 두 번 붙었는데 7골 넣었잖아. 그렇게 무자비하게 나왔으니 악감정이 생길 만도 하지.”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
그런데 약간 걱정은 된다.
많이 화난 파브레가스를 우리 대표팀 중원에서 저지할 수 있으려나?
* * *
킥오프.
우리의 선축으로 월드컵 전 마지막 평가전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
이역만리 오스트리아까지 날아온 붉은 악마의 열띤 응원전.
국가대표 경기는 정말 이 맛에 뛴다.
클럽팀 경기와는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콰앙-
기성영이 곧장 때려 준 장거리 로빙 패스를 헤더슛으로 연결했지만 골문을 벗어났다.
이 플레이는 허종무 감독의 지시.
시작하자마자 한 방 때려서 너무 공격적으로 못 올라오게 하라는 뜻이었다.
‘대한민국엔 정백강이 있음을 기억해라’, 뭐 이런 거지.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인 페페 레이나가 세르히오 라모스에게 볼을 배급하면서 스페인이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골키퍼 라인업도 이케르 카시야스-레이나-빅토르 발데스라니.
해도 해도 너무할 지경이다.
라모스는 하비 마르티네스에게, 마르티네스는 다시 파브레가스에게.
바르셀로나를 상대했던 기억이 데자뷔처럼 확 다가온다.
일단 티키타카가 제대로 발동되기 시작하면, 막는 쪽에서는 무력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퍼엉-
파브레가스가 오른쪽 측면으로 공을 뿌렸다.
잰걸음으로 공을 쫓아 달리는 헤수스 나바스.
세비야 소속인 나바스는, 중앙 지향적인 선수가 많은 스페인 선수단에서 거의 유일하게 클래식 윙어로 분류되는 선수다.
델 보스케 감독이 전술적 다양성을 담보하기 위해 최종 엔트리에 포함시켰다.
빠른 발, 드리블 스킬, 크로스와 슈팅 능력을 모두 갖춰서,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존재.
그런 나바스의 앞을 이형표 선배가 막아섰다.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우리 수비진 중에서는 가장 ‘믿을맨’.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깔끔한 수비로 나바스의 크로스 시도를 차단했다.
스페인의 스로인.
라모스가 부지런히 올라와서 공을 집어 들었다.
원래 라모스-나바스 라인을 박지승-이형표 콤비가 막아내는 그림이 나왔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기헌 선배에게 큰 짐이 지워진 듯하다.
라모스가 스페인답지 않게(?) 페널티박스로 롱 스로인을 시도했다.
193cm의 장신 스트라이커 요렌테를 겨냥한 플레이.
마크맨인 이종수 선배가 힘에서 밀리며 자리를 뺏겼고, 요렌테가 쇄도하는 파브레가스에게 마침맞은 헤더 패스를 떨궈 주었다.
뻐엉- 까아앙-
오늘 독기 품고 나왔다더니,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간담 서늘한 중거리포가 터졌다.
이원재 선배의 손끝을 살짝 스친 공이 크로스바를 강타.
종수 선배가 황급히 공을 걷어냈다.
야... 이거 초장부터 장난 아닌데?
* * *
나름 잘 버티던 우리 수비진이 드디어 무너진 건 전반 23분.
복수심에 불타는 파브레가스가 기어이 사고(?)를 쳤다.
이니에스타와의 2대 1 패스로 성영이와 김정운 선배의 압박을 순식간에 뚫어낸 후 요렌테에게 식도 패스 전달.
요렌테가 원재 선배 나온 것을 확인하고 침착하게 깔아 찬 공이 그물을 갈랐다.
“와... 진짜 개잘하네...”
눈앞에서 월드클래스 미드필더의 플레이에 당한 성영이가 감탄과 짜증이 섞인 반응을 보였다.
비슷한 나이대, 거기에 겹치는 포지션.
이런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야말로 선수의 그릇이 드러나는 법이다.
재능과 환경의 차이를 탓하며 절망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극받아서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덤벼드는 케이스도 있다.
다행히 성영이는 둘 중에선 후자에 속하는 녀석.
“자! 파이팅 외치고 가죠!”
잔디 위에 침을 퉤 뱉더니 오히려 패기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 재개.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던 우리 대표팀이 오랜만에 공격에 나섰다.
선제골 이후 여유가 생긴 스페인이 압박을 잠시 늦추는 사이, 기성영-김정운-금재성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3미들이 힘을 내며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시작.
형표 선배도 오버래핑을 통해 중원에서의 숫자 싸움에 힘을 보탰다.
여기까진 참 좋은데...
막상 시원스러운 전진 패스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라인을 단단히 잡고 기다리는 스페인의 수비진에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
화려한 공격 때문에 가려진 부분이 있지만, 상대는 수비력 역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팀이었다.
유럽 예선 10경기 동안 허용한 게 고작 5골.
웬만큼 날카로운 창이 아니면 흠집 하나 내기도 만만찮을 터였다.
이럴 땐 지승 선배의 공백이 정말 아쉽다.
“백강이 형!”
잘 안 풀릴 땐 에이스부터 찾는 게 국룰.
다각도로 공격 루트를 찾아봤지만 여의치 않자 성영이가 나를 향해 공을 띄워 주었다.
세계의 강호들을 상대할 월드컵 본선에서는 지금처럼 내가 고립될 상황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까 이건 내게도 의미 있는 도전.
점프를 했지만 내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인테르에서 뛸 때는 잘 나오지 않는 상황.
지금 이곳에는 에투도, 마이콘도, 스네이더도 없었다.
툭-
일단 공을 발 앞에 떨어뜨려 놓고 잠시 대기.
마르체나가 뒤쪽에서 공을 빼내기 위해 발을 뻗었다.
하지만 무리뉴 감독 밑에서 지난 2년 동안 연마한 나의 ‘등지고 딱딱’을 쉽게 뚫어낼 순 없었다.
“다들 올라와!”
원터치 플레이가 안 된다면 지금처럼 최전방에서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이런 게 바로 ‘국대 모드 정백강’의 모습.
내가 생각보다 오래 버티자, 수비형 미드필더 마르티네스까지 어그로가 끌려 달려왔다.
“백강아!”
덕분에 생긴 공간을 파고드는 재성 선배.
눈에 확 띄는 개인기나 패싱 능력은 부족하지만, 풍부한 활동량으로 팀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스타일의 미드필더다.
마르티네스의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재성 선배의 발 앞으로 패스를 전달.
그러자 성질 급한 라모스가 놀라운 속도로 튀어 나갔다.
촤아악-
깊숙하고 거친 슬라이딩 태클.
“크아악!”
재성 선배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는데...
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태클 당하기 직전에 이미 왼쪽 측면으로 배달 완료.
주심의 판정은?
그대로 경기 진행.
어드밴티지가 적용되었다.
“나이스 패스!”
끝까지 달린 기헌 선배가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황에서 박스 안쪽에 있는 내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마술사’의 정교한 왼발 크로스가 멋진 호를 그리며 휘어져 들어왔다.
쿠와앙-
언제나 기분 좋은 이 타격감.
철썩-
이마에 제대로 맞은 공이 레이저처럼 날아가 그물 위에 꽂혔다.
천하의 레이나 골키퍼가 손도 제대로 뻗지 못한 완벽한 헤더.
“형님, 크로스를 이렇게 주시면 넣을 수밖에 없잖아요.”
“이번 건 좀 괜찮았지?”
“지승 선배 주전 자리도 위험할 것 같은데요.”
“짜식아, 너무 오버하지 마.”
나의 극찬에 기헌 선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솔직하다니까요?
* * *
삑- 삑- 삑--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었고, 허종무 감독과 델 보스케 감독이 악수를 나누었다.
최종 스코어 1-2.
전반 35분 터진 나의 골로 동점을 만든 우리 대표팀은, 후반 11분 교체로 나온 토레스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하며 패배했다.
하지만 지승 선배는 아예 뛰지 못했고, 나 역시 관리 차원에서 전반전만 소화한 후 빠졌기 때문에 참작의 여지는 충분했다.
게다가 상대는 ‘유럽 챔피언’ 스페인 아니겠는가.
비록 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실보단 득이 많은 평가전이었다.
“이야, 너희 생각보다 훨씬 강한걸?”
경기 종료 후 나와 유니폼을 교환하러 온 이니에스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한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어. ‘병 주고 약 준다.’”
멋들어진 드리블 돌파에 이은 환상적인 스루패스로 무승부의 꿈을 깨버린 장본인이 바로 이니에스타.
누가 ‘천재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교본으로 보여줘도 될 만큼 대단한 어시스트였다.
“하하, 그것 참 재밌는 말이네. 아 맞다. 아까 너희 조 편성을 확인해봤는데, 아르헨티나랑 붙게 되더라?”
“응, 조별리그 두 번째 경기가 아르헨티나전이야.”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리오는 세스크보다도 훨씬 더 벼르고 있거든. 내가 어릴 때부터 봐와서 아는데,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리오만큼 승부욕이 강한 녀석도 없어.”
하긴.
그런 승부욕이 없었다면 애초에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겠지.
복수를 위해 불타오르는 메시라.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는데?
“혹시 메시랑 연락하게 되면 전해줘.”
“응? 뭐라고 말해줄까?”
“나도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다고. 우리의 리턴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