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어우, 생각보다 쌀쌀하네요.”
버스에서 내린 이창용이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여기는 겨울이니까 당연하지. 그리고 넌 몸에 살이 없어서 더 추운 거야.”
단짝 친구 기성영이 곧바로 핀잔을 주었다.
남아공 최대 도시인 요하네스버그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루스텐버그.
인구 10만 남짓 사는 한적한 이 도시에 월드컵 기간 동안 우리 대표팀이 머무를 베이스캠프가 위치해 있다.
이름하야 4성급 호텔 ‘헌터스 레스트(Hunters Rest)’.
우리말로 하면 ‘사냥꾼들의 휴식처’쯤 될까?
괜한 의미 부여일 수도 있겠지만 숙소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축구장에서 상대를 사냥한 뒤 이곳에 와서 푹 쉰다 이거지.
데-하미쿡! 짝짝-짝짝짝
데-하미쿡! 짝짝-짝짝짝
현지 주민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까지 든 채 도열해서 우리 선수단을 환영해 주었다.
취재진들이 잔뜩 깔린 건 말할 것도 없었고.
대회 끝날 때까지는 어딜 가나 기자들이 있다고 생각해야겠지.
“근데 여기 완전 감독님 취향 아니에요?”
툴툴대는 성영이.
산자락에 있는 호텔이라 주변에 있는 거라곤 울창한 숲과 개울뿐이다.
“좋은데, 왜. 딱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잖냐.”
“백강 형은 나이도 어린데 가끔 30대 아저씨 같을 때가 있다니까요?”
“자꾸 까불래?”
근데 성영아, 너 좀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자, 일단 짐부터 풀고 좀 쉰 다음에 집합한다. 딱 30분 줄게.”
“네! 감독님!”
숙소는 단출했다.
침대 2개, TV 1개, 테이블 하나와 의자 2개가 끝.
“아이고고. 좀 눕자!”
룸메이트 곽민수가 침대에 몸을 던지며 기지개를 켰다.
센터백인 민수는 나와 86년생 동갑내기.
원래 선후배를 묶어서 한 방을 쓰게 하는 게 관례인데, 혹시라도 내가 불편할까 봐 코치진에서 배려를 해준 듯하다.
일종의 특혜라면 특혜.
근데 어쩌겠는가.
나의 컨디션에 이번 월드컵 성적이 달려 있으니 뭐...
역시 축구선수는 축구를 잘해야 한다.
“백강아. 너 덕분에 나도 꿀 빠네. 고맙다. 지난번엔 형표 선배랑 같이 썼는데 진짜 힘들었거든.”
“형표 선배가 왜? 이상한 심부름 같은 거 시킬 분은 아닌데.”
“뭐 할 때마다 자꾸 기도하자고 하셔서... 난 교인도 아닌데 말야.”
아... 형표 선배라면 그럴 수 있지.
* * *
“다들 모였으면 시작하지. 정 코치, 일단 자료부터 나눠줘.”
정혜성 수석코치가 허종무 감독의 지시에 따라 얇은 책자를 배부했다.
“협회에서 만든 그리스전 분석 자료다. 보면서 얘기하지.”
어디 보자...
예선에서 6승 2무 2패, 조 2위로 플레이오프 가서 우크라이나 꺾고 본선 진출.
12경기 21득점 10실점.
같은 조에는 스위스, 라트비아, 이스라엘, 룩셈부르크, 몰도바라.
아주 빡센 조는 아니었는데 그만 스위스한테 밀렸네?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최종 스쿼드 중 대다수가 자국 리그 소속 선수들이야. 그중에서도 파나티나이코스 소속 8명으로 아주 많지. 그 외에는 세리에가 셋, 분데스리가가 둘, EPL도 하나 있다. 백강아?”
갑자기 내 이름은 왜 부르시지?
“네, 감독님.”
“너희 팀이 파나티나이코스랑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났었지?”
“그렇습니다. 2008년도에 조별리그에서 두 차례 맞붙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도 지금 명단에 있니?”
“음... 네. 몇 명 보이네요.”
“그래. 그럼 잠깐 앞으로 나와서 선수들 특징을 좀 설명해주면 좋겠다. 파나티나이코스랑, 이탈리아에서 뛰는 애들. 아무래도 실제 같이 뛰어본 사람이 제일 정확하게 아니까 말이야.”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살다 살다 별걸 다 해본다.
“정 선생님, 멋진 강의 부탁드립니다!”
“푸하핫!”
박지승 선배의 농담에 다들 빵 터졌다.
이원재나 안정훈 같은 대선배들 말에 따르면, 지승 선배가 주장이 되고 나서 대표팀 공기가 엄청나게 밝아졌다고 한다.
“따로 준비한 게 없어서... 그럼 부족하나마 한 번 해보겠습니다. 먼저, 수비수인 루카스 빈트라부터 시작할까요? 아마 주전으로 나올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말이죠...”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웃고 떠들던 동료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화기애애하면서도 진지해야 할 땐 확 바뀌는 이 분위기.
딱 좋은 정도의 긴장감이다.
이번 월드컵, 어쩐지 느낌이 좋다.
* * *
2010년 6월 12일, 포트엘리자베스에 위치한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
개막전인 남아공 VS 멕시코, 우루과이 VS 프랑스에 이은 세 번째 경기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2002년 월드컵 4위 대한민국, 그리고 2004년 유로 우승팀 그리스의 격돌.
FIFA 랭킹은 각각 47위와 13위로 그리스 쪽이 높았으나, 역대 전적에서는 1승 1무로 우리가 앞서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가 속한 B조에서는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세 팀은 전력이 고만고만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양 팀 모두 서로 ‘할 만하다’고 보고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꼭 잡아야 하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냥 평가전이라고 생각해, 임마. 네가 긴장하면 수비 전체가 흔들리니까. 너 잘하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평소처럼만 해, 평소처럼.”
이원재 선배가 오늘 주전 골리로 출전하는 전성룡 선배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경험이 풍부한 원재 선배냐, 최근 폼이 좋은 성룡 선배냐를 두고 끝까지 저울질을 했던 허종무 감독은, 끝내 성룡 선배를 낙점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민에 빠진 감독님에게 오히려 원재 선배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대표팀의 세대교체는 차근차근 진행되는 중이다.
“형님, 예언이 반은 맞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주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오늘 선발 라인업에는 스페인전에서 어시스트를 기록했던 염기헌 선배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로 지승 선배를 밀어낸 건 당연히 아니고, 표면적으로는 4-4-2 포메이션의 처진 스트라이커 자리로 배정.
일종의 연막작전이었다.
실제로는 지승 선배가 프리롤로 위치 상관없이 날뛰고, 기헌 선배는 실질적인 왼쪽 윙어 역할을 소화할 예정.
크로스가 뛰어난 기헌 선배야말로 내 공중 장악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게 허종무 감독의 판단이었다.
한편 그리스 역시 4-4-2를 들고나왔다.
주목할 선수라면 역시 스트라이커 테오파니스 게카스.
유럽 예선에서 무려 10골을 몰아치며 득점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거의 약체팀을 상대로 넣은 골이라 액면 그대로 인정하긴 힘들었지만, 물오른 감각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뭐 그렇게 따지면 나도 아시아 예선에서 16골을 넣긴 했지만... 흠흠.
“다들 모여!”
지승 선배가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어깨동무를 한 채 둥글게 선 11명의 태극전사들.
“오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따로 얘기 안 할게. 종료 휘슬 울릴 때까지 미친 듯이 한 번 뛰어보자.”
“네!”
“자, 대한민국 파이팅!”
“파이팅!”
* * *
킥오프.
부부젤라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가운데, B조 1차전이 시작되었다.
회귀 전에 텔레비전으로 봤을 때는 그냥 좀 불편하다 싶을 정도였는데, 실제로 들으니 생각보다 그 소리가 훨씬 크다.
물론 경기에 더 집중하게 되면 안 들리겠지만.
“천천히 갈게요!”
전반적인 템포 조절을 담당하고 있는 성영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스의 축구 스타일은 유럽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2004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단 수비, 그 후 역습, 거기에 강력한 세트피스.
그러니 굳이 상대가 오매불망 기다릴 역습 상황을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공격 숫자를 너무 많이 두지 말고 밸런스를 잡는 게 우리가 지향할 방향.
이럴 땐 수비 지역에서 한 번에 연결되는 롱볼 축구가 오히려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뻐엉-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성영이가 그리스 압박에 막혀 뒤로 내준 볼을 센터백 조용헌 선배가 최전방으로 길게 찼다.
“마이 볼!”
나의 점프 타이밍에 맞춰 공 받기 좋은 위치로 이동하는 지승 선배.
이거지 이거야.
스페인전에는 이런 움직임이 부족해서 영 답답했었다.
터억-
내가 머리로 연결한 공을 받자마자 순식간에 세 명의 그리스 선수들이 블록을 형성하며 지승 선배를 에워쌌다.
어떻게든 막아야 할 두 명의 선수, ‘인테르의 정백강’과 ‘맨유의 박지승’.
모르긴 몰라도 오토 레하겔 감독이 귀에 딱지가 앉게 얘기했을 것이다.
“창용아!”
집중 견제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지승 선배가 당황하지 않고 반대쪽 공간을 봐주었다.
성영이와 함께 막내 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이창용이 쇄도하며 볼을 캐치.
올해 나이 만 21세.
월드컵이라는 무대가 주는 중압감에 눌릴 만도 하건만, 창용이에게 그런 건 없었다.
가속도를 살려 과감한 드리블 돌파 시도.
상대 풀백 유르카스 세이타리디스를 손쉽게 벗겨내며 쾌속 질주를 펼쳤다.
이어지는 크로스!
아이고...
“죄송해요!”
바로 자진납세(?) 들어가는 창용이.
만들어가는 과정은 참 좋았는데, 마무리가 엉망이었다.
회심의 크로스가 라인을 벗어나며 그대로 골킥.
그럴 수도 있지.
이럴 때는 질책보단 격려를 해줘야 한다.
“좋았어! 좋았는데, 조금만 더 침착하게 하자! 어지간한 공은 내가 잡을 수 있거든.”
“넵!”
경기 재개.
알렉산드로스 초르바스 골키퍼가 골킥을 길게 연결했고,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한 동명(同名)의 알렉산드로스 치올리스가 그 공을 따냈다.
시에나 소속인 치올리스는 이번 시즌 나와도 리그에서 두 번 만났었다.
190cm의 훌륭한 피지컬에 패싱력까지 갖춰 묵묵히 제 몫을 해내는, 관중보단 감독이 좋아할 만한 타입의 건실한 선수.
역시나 욕심부리지 않고 오른쪽 측면에 위치한 게오르기오스 사마라스에게 땅볼 패스를 깔아주었다.
셀틱 소속으로 성영이의 클럽팀 동료이기도 한 사마라스는 공을 잡자마자 곧바로 얼리크로스 시도.
게카스가 오프사이드 트랩을 부수며 달려들었지만 성룡 선배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파앙-
멋지게 몸을 날리며 펀칭.
멀리 튄 공이 운 좋게도 성영이의 품에 쏙 안겼다.
“야! 기성영! 이쪽 봐!”
명예 회복을 간절히 원하는 창용이가 손을 번쩍 들었고 베스트 프렌드가 곧바로 반응해 주었다.
‘기라드’의 호쾌한 스루패스.
세이타리디스의 컨디션이 별로인 건지, 아니면 창용이가 ‘발딱 선’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수준 차이가 나는 건지.
오늘 두 사람의 일대일 승부는 완전히 일방적이었다.
마치 농구의 ‘체인지 오브 페이스(Change of Pace)’처럼 잠시 속도를 죽였다가, 갑자기 툭 치고 나가며 수비를 완전히 떨쳐내는 창용이.
이게 바로 ‘볼튼 올해의 선수’의 플레이인가?
“혀엉!”
창용이가 아까보다 한층 신중한 자세로 내 위치를 확인한 뒤 오른발 크로스.
‘볼올선’이 선물을 줬으니 ‘피올선’이 보답을 해야겠지?
콰아앙-
초르바스 골키퍼가 방향은 잘 잡았으나 슈팅이 너무 빠르고 강력했다.
장갑 끝을 스치듯 날아가 그물을 가르는 공.
전반 17분, 역사적인 정백강의 월드컵 첫 득점이 마침내 터졌다.
우우와아아악!!!
열광하는 붉은 악마 앞으로 달려가 나의 상징인 ‘이마 세리머니’를 펼쳤다.
센스 있는 팬들은 내가 이마를 두드리는 타이밍에 맞춰 ‘둥둥’ 북을 울렸고.
“이번 건 괜찮았죠?”
한창 칭찬이 고픈 나이.
창용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어 왔다.
이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구.
“그래, 쩔었다 이눔아. 계속 그렇게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