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그리스는 선제골 허용 이후 오히려 완전히 내려앉아 가드를 단단히 올렸다.
1938년생, 말 그대로 백전노장인 오토 레하겔 감독은 ‘이기는 축구’의 방법론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우리 대표팀의 기세가 한풀 꺾일 때까지, 일단 버티기 모드를 지시했다.
그 결과 전반전은 1-0으로 종료되었다.
점수 차를 더 벌리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결과다.
“쟤네가 피파 랭킹 13위라고요? 이거이거, 완전 거품 아니에요? 우리가 훨씬 잘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생애 처음 출전한 월드컵의 첫 경기에서 멋진 공격포인트를 기록한 이창용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깨방정을 떨었다.
“아주 좋았다, 얘들아. 후반전도 이 분위기 그대로 가자.”
허종무 감독도 경기력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팀 분위기는 최고조다.
후반전 재개.
추격해야 하는 그리스가 선공권을 가졌다.
전반에 비해 한층 끌어올린 수비 라인이 눈에 띈다.
이제 좀 공격적으로 밀고 올라올 심산인가 보군.
“헤이! 뒷공간만 조심해! 뒷공간만!”
경기 내내 박지승 선배의 입은 멈출 줄을 모른다.
공격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하면서도 수비까지 챙기는 모습이다.
그리스가 지금 노출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지공 상황에서의 세밀함과 폭발력 부족이었다.
창용이나 지승 선배처럼 수비를 흔드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가 딱히 없었다.
갑작스럽게 시도되는 롱패스만 주의한다면 우리 수비진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력이었다.
뻐엉-
그래, 바로 이런 거 말이지.
중원에서 공을 잡은 미드필더 치올리스가 지독하게 라인 브레이킹을 노리는 스트라이커 게카스를 향해 로빙 패스를 때려 넣었다.
그러나 이미 조용헌 선배가 완벽하게 마크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카스가 무리하게 몸을 부벼대며 되도 않는 시저스킥을 시도했지만 공이 관중석으로 넘어갔다.
“파울! 파울! 페널티!”
억지 슈팅을 하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진 게카스가 손을 번쩍 들며 어필했지만 주심은 묵묵부답이었다.
우우우우우우-
얼굴에 태극 문양을 페인팅한 붉은 악마들이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주심이 그냥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사실은 게카스가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옐로카드를 받아도 할 말 없는 장면이었다.
“나이스 수비! 좋았어요! 굿굿굿!”
용헌 선배의 파인 플레이에 기성영이 물개 박수를 보냈다.
대표팀의 에이스가 나고, 리더가 지승 선배라면, 분위기 메이커는 성영이가 맡고 있다.
터엉-
전성룡 선배가 골킥을 짧게 연결했다.
우리의 기조는 전반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건 공수 밸런스였다.
약이 바짝 올라 달려드는 게카스를 여유 있게 제친 용헌 선배가 성영이에게 볼을 전달했다.
“창용아!”
전반전에 폼이 가장 좋았던 창용이 쪽을 노리고 장거리 스루패스를 찔러 넣는 성영이.
교체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전반전 내내 털리기 바빴던 풀백 세이타리디스가 간만에 존재감을 보이며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끊어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공을 몰고 전진까지 시도.
“창용아! 바로 붙어 줘야 돼!”
오른쪽 풀백으로 나선 차도리 선배의 조종(?)에 따라 창용이가 득달같이 세이타리디스의 뒤를 잡았다.
애초에 발이 빠른 선수는 아닌지라, 생각보다 금방 따라잡혔다.
“Den boró na grápso!”
허무하게 공을 뺏길 것 같아 불안했는지, 지켜보던 치올리스가 외쳤다.
그 소리에 반응한 세이타리디스가 드리블을 멈춘 후 가운데로 공을 보냈는데...
창용이의 빡센 수비를 의식한 건지 힘 조절이 전혀 되지 않았다.
땅볼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 띄운 것도 아닌 애매한 높이로 날아가는 볼.
이 개똥 같은 패스를 어떻게 받아야 안전할 것인가.
고민 끝에 치올리스가 내린 답은 허벅지 트래핑이었다.
동작으로 봤을 때, 의도는 분명 그것이었다.
결과는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탁-
세이타리디스의 패스는 치올리스의 무릎을 맞고 엉뚱한 위치로 튀었다.
그 순간 주인 잃은 볼을 향해 한 마리의 맹수처럼 달려드는 그림자 하나.
지승 선배였다.
“Eímai tempélis!”
누구 덕분에 조금은 억울한 턴오버를 저지른 치올리스가 왼팔로 지승 선배의 어깨를 감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볍게 튕겨내며 질주를 멈추지 않는 지승 선배.
느닷없이 시작된 역습 상황에 그리스 수비진이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I zoí eínai ypsilí!”
초르바스 골키퍼가 완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리스말은 전혀 모르지만, ‘정백강부터 잡아’ 뭐 그런 뜻이겠지.
내 추측이 맞았는지 나한테 순식간에 3명의 수비수가 들러붙었다.
얘들아, 근데 이거 맞아?
지승 선배는 내 쪽을 보고 있지도 않거든?
거의 30m 가까운 거리를 단독 드리블로 주파한 지승 선배가 어느새 페널티박스 안으로 진입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센터백 빈트라가 잡으러 갔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후반 7분.
빈트라의 슬라이딩 태클을 가볍게 피하며 깔아 찬 왼발 슈팅이 골문 오른쪽 구석을 흔들었다.
* * *
[대한민국, 그리스 3-0으로 꺾고 월드컵 첫승 신고]
[정백강, 멀티골 기록하며 이번 대회 득점 선두 등극]
[한국, 골득실에서 앞서며 B조 1위 차지, 5일 뒤 아르헨티나와 2차전]
상대의 실수를 제대로 응징한 지승 선배의 두 번째 골이 터지면서, 경기는 우리 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었다.
레하겔 감독은 뒤늦게 ‘X맨’이나 다름없었던 세이타리디스를 빼고 공격수를 추가로 투입했다.
점수 차를 좁히기 위한 그리스의 총공세는 눈물겨울 정도였으나, 결국 제대로 된 플레이메이커의 부재가 발목을 잡았다.
단조로운 크로스 일변도의 공격으로는 작정하고 잠그기에 나선 우리 수비진을 공략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반 20분에는 쐐기골까지 헌납했다.
도리 선배가 지승 선배의 원맨쇼에 자극받았는지, 수비 지역부터 무려 40m짜리 폭풍 드리블을 선보인 후 얼리크로스를 날렸고, 내 머리가 또 한 번 불을 뿜었다.
공격 일변도로 나가다가 철퇴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그리스였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가 가장 잘하는 패턴의 공격을 우리가 보여준 셈이었다.
기어이 3-0까지 벌어지자, 허종무 감독은 핵심 전력인 나와 지승 선배를 동시에 불러들이는 여유를 과시했다.
결국 그대로 경기 종료.
“어려운 게임이 될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힘들었다. 정백강은 역시 명불허전이었고 박지승과 이창용도 인상적이었다. 빨리 분위기를 수습하고 다음 경기 준비에 최선을 다하겠다.”
레하겔 감독은 싹싹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한편 우리 조의 두 번째 경기인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의 격돌에서는 아르헨티나가 전반 6분 코너킥 상황에서 터진 가브리엘 에인세의 다이빙 헤더골에 힘입어 1-0 승리를 거뒀다.
비록 이기긴 했지만, 거의 70 대 30 수준이었던 볼 점유율을 생각하면 아르헨티나 입장에서 조금은 아쉬운 결과였다.
상반되는 두 경기 결과를 지켜본 우리 네티즌들은 갑론을박을 벌였다.
- 공격진이 메시, 이과인, 테베즈인데 저것밖에 못하나?
- 아르헨 개거품이었네 ㅋㅋ 우리가 충분히 이길 만함
- 또다시 입증된 정백강>>>메시
- ㄴㄴ 그렇게 비교하면 안되고 이창용>>메시임
- 에이 ㅋㅋ 아무리 그래도 창용이랑 메시 비교는 좀 아니지 않음?
- 팩트 : 이창용 1어시, 메시 노어시
- 짱깨논리 수준 ㅉㅉ...
- 한 경기 가지고 왜 이렇게들 오버하심?
- 이러다가 개발릴수도 있음 ㅋㅋ 이기고 나서 기뻐해도 늦지 않음
- 상대는 어디까지나 아르헨이니까 방심은 절대 금물이지 ㅇㅇ
- 그래도 전력에서 밀리는 건 팩트야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지 않는 한국의 축구팬들에게서 안타까움을 느낀 것일까?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이 악성 꾸레조차 ‘위 아 더 월드’를 외치게 만드는 초대형 떡밥을 투척했다.
“골 결정력 가지고 말들이 많은데, 그냥 다음 경기를 위해서 아껴둔 거다. 한국전은 기대해도 좋다.”
자국 언론에서 하도 쪼아대니까 짜증이 솟아서 실언을 한 건지, 아니면 심리전 효과를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라도나 감독의 발언은 그 파장이 대단히 컸다.
한국을 자극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전 상대팀인 나이지리아 쪽에서 듣기에도 불쾌한 말이었으니.
“한국은 그 어느 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허정무 감독은 지극히 교과서적인 인터뷰로 마라도나 감독의 도발에 대응했으나, 사실은 무지하게 열 받은 게 분명했다.
어떻게 아냐고?
훈련을 지휘하는 눈빛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거든.
물론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씨발, 짜증나게.”
특히 다혈질인 김남익 선배의 분노는 어마어마해서, 만약 아르헨티나전에 나선다면 누군가의 다리를 분질러 놓을 기세였다.
메시가 잔뜩 벼르고 있다던 ‘정메대전 2라운드’는, 이처럼 조금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게 되었다.
* * *
몸을 풀다가 눈이 정통으로 딱 마주쳤다.
좋은 감정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슈퍼 레전드이고 축구계 대선배인데 인사를 하러 가야 되나 고민하던 찰나, 의외로 그쪽에서 내게 먼저 다가왔다.
“오우, 이렇게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워!”
나는 가볍게 악수만 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나를 거칠게 끌어안는 이 남자.
핸드볼, 약물, 탈세 등 온갖 논란을 달고 다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인정하는 바로 그 남자.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하... 하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탈리아어를 너무 잘해서 살짝 놀랐는데 이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마라도나의 여러 별명 중 하나가 바로 ‘나폴리의 신’ 아니겠는가.
“어떻게든 자네를 막으라고 우리 선수들한테 신신당부해 놨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마 어려울 겁니다, 디에고 아저씨.
“백강!”
그러고 보니 아르헨티나에는 인사를 나눠야 할 사람이 참 많았다.
현 동료 왈테르 사무엘 형님과, 전 동료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나란히 걸어왔다.
“여기서 보니 기분이 새롭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오늘 컨디션은 어때?”
“아주 좋습니다. 남아공이랑 저랑 기운이 좀 맞는 것 같아요.”
나의 기운찬 대답을 들은 사무엘 형님이 인상을 팍 구겼다.
“그거 정말 끔찍한 소식이네. 감독님한테 얘기해서 주전 바꿔 달라고 해야 할까 봐. 어이, 니코. 네가 나 대신 나갈래?”
부르디소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선수인지라 주전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안 됩니다. 이왕이면 그리스전에서 양보해 주세요. 제가 로마 이적하고 백강한테 당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보셨으면서.”
“농담도 잘하셔라. 오늘 잘 부탁드려요.”
“그래. 페어플레이하자고.”
지금은 이렇게나 훈훈하지만 이 무대는 월드컵.
이따 경기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치열한 몸싸움이 전개될 것이다.
“백강아! 감독님이 찾으신다!”
돌아서는 나를 타이밍 좋게 남익 선배가 불렀다.
“네! 갑니다!”
경기 시작 20분 전, 사커시티 스타디움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