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97화 (98/176)

97화

우리의 선발 라인업은 그리스전과 거의 동일했다.

오른쪽 풀백 선발이 차도리 선배에서 오범서 선배로 바뀐 게 유일한 변화였다.

도리 선배는 피지컬에서, 범서 선배는 수비 스킬에서 더 낫다는 평가였는데, 상대 공격진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안정감 있는 범서 선배가 낙점되었다.

사실 누가 나오더라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이는 건 함정이었지만...

한편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 감독이 계속 밀고 있는 4-1-2-1-2 전술을 오늘도 들고나왔다.

수비형 미드필더인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에게 과부하가 걸린다는 점 때문에 비판이 많았지만, 마라도나 감독은 꿋꿋했다.

어떤 전술이든 이기면 장땡.

어차피 모든 건 결과가 말해주는 법이다.

킥오프.

아르헨티나의 선축으로 B조 3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사람 잡아! 사람!”

허종무 감독이 초장부터 목소리를 높이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일단은 전원 수비 모드.

나를 포함한 11명 전원이 하프라인 아래로 내려앉아 진을 쳤다.

나이지리아전에서 보여준 모습이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 상대는 어디까지나 아르헨티나였다.

출전한 선수들의 면면을 봤을 때 정공법으로 힘싸움을 벌이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방어 태세가 생각보다 완강하자 상대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볼을 돌렸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탐색전이 10분가량 이어졌다.

팽팽하던 필드 위에 처음으로 균열을 낸 건 벤피카 소속인 앙헬 디 마리아였다.

아직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이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 실력만큼은 이미 톱클래스로 인정받는 디 마리아가 마스체라노의 패스를 받고 직접 전진을 시도했다.

바로 들어가는 이창용의 압박.

창용이가 상대의 유니폼을 슬쩍 잡으며 오른발을 쭉 뻗었지만 디 마리아는 절대 당황하지 않았다.

톡-

왼발로 슬쩍 공을 건드리며 태클을 가볍게 피한 후 창용이의 쏠린 무게중심을 이용해 오른쪽으로 툭 치고 나가며 순식간에 벗겨 내는 디 마리아.

뒤이어서 기성영은 헛다리 드리블 한 번으로 무력화시켰다.

전술이고 나발이고 간에 압도적인 개인기로 밀어붙이는 모습이었다.

디 마리아를 저지해야 할 범서 선배는 중앙의 메시를 의식하다가 커버를 너무 늦게 들어왔고, 할 수 있는 거라곤 파울밖에 없었다.

코너킥보다 훨씬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기회를 얻은 아르헨티나.

왼발의 메시, 오른발의 막시 로드리게스가 공을 사이에 둔 채 섰다.

누가 차든 직접 슈팅은 어려운 각도였다.

딱히 눈에 띄는 장신 선수가 없는 아르헨티나지만, 앞서 나이지리아전에서 세트피스 골을 넣은 바 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니어포스트 조심해요!”

마르틴 데미첼리스나 왈테르 사무엘 형님 등 공중전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선수들이 몽땅 먼 포스트 쪽에 모여 서 있어서 나도 그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연막작전처럼 보였다.

역시나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메시의 프리킥은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예리한 각을 그리며 감겨 들어왔다.

* * *

“이예에에에에!”

카를로스 테베즈가 벅찬 기쁨의 소리를 내지르며 프리킥을 한 메시의 품에 가서 안겼다.

누가 보면 자기가 넣은 줄 알겠네.

왜 저렇게 좋아해?

“하...”

발랄한 테베즈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창용이의 침통한 표정.

한숨을 깊게 내쉬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전반 17분.

첫 득점은 허무하게도 자책골로 나왔다.

가장 먼저 점프한 박지승 선배, 이어서 머리를 내밀었던 디 마리아, 두 사람 모두 공을 건들지 못했는데, 3번 타자인 창용이는 앞의 두 사람 때문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 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창용이의 정강이에 툭 맞은 볼은 야속하게도 골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성룡 선배가 황망히 발을 내뻗어 봤지만 이미 상황 종료였다.

“괜찮아, 임마. 그럴 수도 있지. 형이 바로 넣어줄게.”

막내가 오롯이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

잔뜩 풀 죽은 창용이가 안쓰러워 한 번 안아 주었다.

미처 예상 못 한 방향으로 조금 꼬이긴 했지만, 위안이라면 아직 남은 시간은 많다는 것.

“다들 어깨 펴고 가자!”

축 가라앉은 공기를 의식했는지 지승 선배가 평소보다 훨씬 높은 톤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경기 재개.

“성영아! 나한테 붙여라!”

우리 중원의 핵심인 지승 선배에게는 ‘마지우개’ 마스체라노가 100일 된 커플처럼 지독하게 들러붙어 있어 정상적인 플레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럴 땐 내 머리를 이용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성영이가 하프라인 약간 뒤쪽에서 로빙 패스를 쏘아 올렸다.

콰앙-

골문과의 거리가 30m는 족히 넘었지만 일단 때리고 봤다.

이게 바로 ‘정백강 스타일’의 분위기 반전 신호탄.

뛰어난 드리블러는 드리블로, 좋은 패서는 패스로 게임을 풀어가는 것처럼 나는 호쾌한 헤더 슈팅을 활용하는 것이다.

꽤 많이 나와 있던 세르히오 로메로 골키퍼가 화들짝 놀라 골문을 향해 달려가다가 휙 몸을 날려 공을 바깥쪽으로 쳐냈다.

아오, 아까워라.

로메로의 발이 조금만 느렸더라면 얄짤 없이 골이었는데.

아니, 지금 아쉬워할 때가 아니지.

공은 아직 살아 있었다.

착지하자마자 곧바로 페널티박스로 쇄도했다.

“으아아아!”

에투랑 같이 뛰다 보니, 전력 질주할 때 소리 지르는 버릇도 옮았나 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으나, 느리기로 정평이 난 나의 발이 빨라지는 일은 없었다.

여유 있게 공을 걷어내는 데미첼리스.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나한테 해트트릭을 허용했던 친구다.

그 앙금 때문인지 뭔가 더 열심히 뛰는 것 같기도 하고...

오오오!!!

아르헨티나 관중들에게서 불길한 함성이 터졌다.

궤적이 꽤나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낙하지점을 정확히 포착한 메시가 공을 한 번에 탁 잡아내는 완전무결한 트래핑을 선보였다.

축구화에 초강력 접착제를 떡칠해도 나오기 힘들 멋진 기술이었다.

“막아!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

역습 상황에서 메시가 공을 잡자 허종무 감독이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게, 본선 조 추첨 이후 기자들이 가장 많이 한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 리오넬 메시를 어떻게 막으실 생각입니까?

인지도, 실력 등 모든 면에서 메시가 우리 대표팀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상대인 것은 분명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

하지만 축구는 11명이 하는 스포츠였고, 아르헨티나에는 메시 외에도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냐고?

왜긴 왜야.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그놈의 메시 때문에 대참사가 벌어졌으니까 그러지.

* * *

그리스전의 클린시트는 순전히 상대의 무딘 창 때문이었을까.

메시가 드리블을 시작한 순간 우리 수비진이 보여준 모습은, 한 국가를 대표하는 정예 멤버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무려 여섯 명의 선수들이 메시를 에워쌌는데, 말 그대로 에워싸기만 했다.

조직적인 움직임도, 볼 컨트롤에 방해가 될 만한 액션도 없었다.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

메시는 역대급 득점원이면서, 동시에 패스의 달인이었다.

파앙-

장승처럼 버티고 선 우리 수비진의 틈 사이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스루패스가 꽂혔다.

메시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겨서 라인 유지 같은 건 생각조차 못 했다.

당연히 온사이드.

침투한 테베즈가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맞았고, 성룡 선배가 각을 좁히며 뛰쳐 나왔다.

토옥-

그런 성룡 선배를 유린하듯 가볍게 띄워 찬 공이 곤살로 이과인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이 투톱이 박스 안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는 동안, 우리 수비진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삑- 삑-

휘슬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누군가가 기뻐하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꼴 보기 싫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Quiero descansar!”

마라도나 감독이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방방 뛰며 선수들을 끌어안았다.

‘골은 한국전을 위해 아껴 뒀다’던 자신의 호언장담을 지켰으니 기분이 날아갈 만도 했다.

불과 30분도 안 지나서 두 골을 허용한 우리 수비진은 단체로 뇌 정지가 온 것 같았다.

메시만 바라보다가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메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고, 기어이 한 골을 더 먹고 말았다.

똑같은 패턴이었다.

메시가 화려한 드리블로 ‘몹몰이’를 마친 후 아무도 막지 않는 디 마리아에게 멋들어진 패스를 전달했고, 디 마리아는 정밀한 크로스로 이과인의 득점을 도왔다.

득점도, 어시스트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세 골 모두 메시가 만들어낸 거나 다름없었다.

전반에만 0-3.

당혹스러운 스코어였다.

하프타임 분위기는 당연히 최악이었다.

“지금 장난해? 어? 집중 안 할래?”

화가 많이 난 허종무 감독이 작전판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질 수는 있어. 근데 이따위로 지면 무슨 개망신이야? 무슨 동네 축구야? 여기 남아공이야, 이 자식들아!”

“감독님. 좀 가라앉히시죠...”

흥분 수치가 얼마나 과도했던지 결국 정혜성 수석코치가 말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참을 씩씩대던 허종무 감독이 뒷목을 슬쩍 잡으며 전술 지시를 쏟아냈다.

“남익이... 남익이가 성영이 대신 들어가고. 메시 전담 마크해. 나머지는 철저히 지역방어다. 헬핑은 진짜 위험해 보일 때만 들어가.”

“알겠습니다.”

“제대로 좀 하자, 얘들아. 국가대표 아니냐, 국가대표. 월드컵이고.”

“네! 감독님!”

감정을 막 표출하고 나자 머리가 맑아진 것일까.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가 썩 바람직하다고 볼 순 없었지만, 전술 변화 자체는 문제점을 정확히 집어낸 것이었다.

한마디로 메시 수비에 배정되는 인원을 줄인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자, 수비는 이제 안정화될 거라 믿고.

나도 내 일을 좀 시작해야겠다.

“창용아.”

“네, 형.”

“후반전엔 말이야...”

내 사업 파트너(?)로 창용이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리버풀 선수답게 맨유에 악감정이 있는 건지, 지승 선배에 대한 마스체라노의 수비에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염기헌 선배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크로스 외에 기대할 수 있는 플레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전력 분석이 된 건지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기헌 선배가 공을 잡을 때마다 숨 막히는 근접 마크로 ‘마술사’의 왼발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그 결과는 45분 내내 버로우.

후반전에도 딱히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창용이가 그래도 재능만큼은 진퉁인 녀석이니 기대에 부응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우리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도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전반 막판 오른쪽 무릎 통증을 호소했던 사무엘 형님이 빠지고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투입되었다.

그렇게도 나와의 승부를 피하고 싶어 했던 부르디소였는데 말이지.

축구의 신은 그리 관대하지 못한 것 같다.

킥오프.

피파 랭킹 7위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0-3을 뒤집어야 하는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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