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98화 (99/176)

98화

이창용이 거의 터치 라인에 닿을 듯이 넓게 벌리고 섰다.

오늘 창용이가 주로 상대하고 있는 수비수는 마르세유 소속의 가브리엘 에인세.

예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레알 마드리드 등 유수의 명문 클럽에 몸담았던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리스전처럼 마구잡이로 달려들어서는 재미를 보기 힘든 상대란 이야기.

후반 시작 전 내가 창용이에게 귀띔한 내용은 간단했다.

- 내가 공중에 떴다? 그러면 무조건 일직선으로 달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달리라니.

의구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세계 최고의 선배’에 대한 창용이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백강아!”

김남익 선배의 로빙 패스.

마르틴 데미첼리스가 유니폼을 잡아채며 방해했지만 그런 견제는 이미 익숙하다.

그냥 무시하고 훌쩍 뛰어올랐다.

파앙-

내 말대로 달리기 시작한 창용이에게 날아가는 헤더 패스.

하지만 아직 집중력이 살아 있는 에인세가 놓치지 않고 공을 끊어냈다.

명성이 아깝지 않은 빼어난 수비력이었다.

일단 1차 시도는 실패.

그로부터 5분 후 똑같은 상황이 한 번 더 발생했다.

이번에는 조용헌 선배의 롱패스였고, 내가 점프하는 순간 창용이가 터치 라인을 따라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벌써 한 번 막혔던 패턴을 그대로 들고나올 줄 몰랐던 듯, 이번에는 에인세의 반응이 약간 늦었다.

시원스럽게 측면을 돌파한 창용이의 크로스.

달리느라 힘을 다 썼는지 아쉽게도 짧았다.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헤더 클리어.

“Come bien y vive bien!”

큰 위기를 넘긴 에인세가 동료들에게 뭐라고 말한 뒤 포지셔닝을 새로 했다.

집요하게 측면을 노리는 창용이를 견제하기 위해 넓게 벌려 서는 에인세.

그리고 후반 14분.

이번에는 김정운 선배가 공을 높게 뿌렸다.

또 스타트를 끊는 창용이.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사실은 내가 한 가지 지시를 더 내렸었거든.

- 계속 측면을 건드리면 상대 수비가 벌어지면서 빈틈이 생길 거야. 거길 공략해. 오케이?

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본 나.

후반전 내내 종적인 움직임만 가져가던 창용이가 별안간 ‘┘’자로 확 꺾으며 중앙 침투를 시도했다.

일단 붙었을 때의 대인마크 능력만 보면 에인세만한 선수도 없었지만, 특별히 민첩하거나 발이 엄청 빠른 선수는 또 아니었다.

측면만 막으면 된다고 믿다가 기습을 당하니, 마치 골키퍼가 역동작에 걸린 것처럼 무기력하게 창용이를 놓쳐 버렸다.

터엉-

나의 정밀한 헤더 패스가 창용이의 발 앞에 안착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부심 쪽을 바라보는 아르헨티나 수비진.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창용이의 슈팅은 세르히오 로메로 골키퍼의 다리 사이를 통과했고, 따라 들어온 부르디소가 슬라이딩 태클로 걷어냈지만 이미 골라인을 통과한 뒤였다.

드디어 처진 첫 골.

창용이를 믿고 걸었던 심리전이 제대로 먹혔다.

하지만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아직 우리에겐 두 골이 더 필요했다.

“창용아! 빨리 공 주워 와! 세리머니는 경기 끝나고 해!”

* * *

축구라는 건 참 재밌어서, 아직도 압도적 우위에 있는 아르헨티나가 오히려 승부를 서둘렀다.

적당히 볼 돌리면서 시간 끌기 전법으로 나왔다면 곤란할 뻔했는데 말이지.

마라도나 감독이 호언장담한 것도 있고, 3-1로는 만족 못 하겠다는 듯 공격적으로 밀고 올라오는 아르헨티나였다.

돌격대장은 역시 메시.

앞을 가로막는 건 남익 선배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성영을 빼고 남익 선배를 투입한 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물론 일대일로 막아낸다는 건 무리였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파울신공’을 적절히 활용하며 메시의 리듬을 뺏고 게임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다.

파울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카드 한 장 안 받은 건 짬에서 나오는 노련미 그 자체.

남익 선배가 일차적으로 버텨주니 전반전처럼 메시 한 명한테 전체가 휘둘리는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다.

메시가 여의치 않자 앙헬 디 마리아나 막시 로드리게스 쪽에서 공격 활로를 찾았지만 눈에 불을 켠 우리 수비진이 몸을 던지며 철통같이 막아냈다.

거 진작 좀 그렇게 해주시지... 크흠.

허종무 감독은 선수 교체로 공격 전술에 변화를 줬다.

오늘 거의 보이지 않았던 염기헌 선배를 불러들이고 대신 박주연 선배를 투입.

주연 선배가 누구던가.

나의 등장 전에는 한국 축구를 이끌어 갈 대형 스트라이커로 인정받았던 선수다.

왼쪽 윙어 역할을 하던 기헌 선배가 벤치로 들어가면서, 박지승 선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드디어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의 마수(?)에서 벗어난 셈.

뻐어엉-

올림픽 대표팀 시절 초초초장거리 킥으로 골을 기록한 적이 있을 만큼 강력한 오른발을 가진 전성룡 선배가 간만에 힘을 빡 줘서 골킥을 날렸다.

“백강아! 여기!”

그동안 억눌렸던 공격 본능을 폭발시키듯, 지승 선배가 로드리게스의 수비를 떨쳐내며 측면으로 침투했다.

곧바로 전달되는 택배 헤더.

공을 잡은 지승 선배가 주연 선배와의 2대 1 패스로 호나스 구티에레스까지 휭 지나쳐 버렸다.

오른쪽 풀백으로 나온 구티에레스의 원래 포지션은 윙어.

마라도나 감독이 워낙 좋아하는 선수라 억지로 선발 명단에 끼워 넣은 케이스였다.

역시 전문 수비수가 아니다 보니 이렇게 빠른 템포로 밀고 들어올 때의 대처가 미숙했다.

“Por favor dame dinero!”

로메로 골키퍼의 절규.

센터백 콤비인 부르디소와 데미첼리스가 동시에 나에게 붙었고, 지승 선배의 땅볼 크로스는 주연 선배에게 향했다.

나의 엄청난 어그로와 지승 선배의 침착한 판단이 만든 합작품.

후반 28분, 주연 선배가 아무런 방해 없이 다이렉트로 때린 왼발 슈팅이 골망을 갈랐다.

* * *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아르헨티나 응원단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0-3의 일방적이었던 경기가 2-3까지 좁혀지는 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희희낙락하던 마라도나 감독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모멘텀은 우리 쪽으로 확실하게 넘어온 상태.

마라도나 감독은 남은 교체 카드 두 장을 모두 소진하여 테베즈와 이과인을 동시에 빼고 이때까지만 해도 20대 초반의 풋풋한 유망주였던 센터백 니콜라스 오타멘디, 왼쪽 풀백 클레멘트 로드리게스를 들여보냈다.

골을 더 넣겠다는 오만함을 내려놓고 잠그기 전법으로 나오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질세라 허종무 감독도 오범서 선배 대신 안정한 선배를 투입하며 승부를 걸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창과 방패의 대결.

상대 수비의 포커스는 온통 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아예 볼 투입 자체가 불가능하게 앞뒤로 바짝 붙어서 점프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한테 두 명이 붙으면서 생기는 공간은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운신의 폭이 넓어진 정한 선배가 남익 선배의 전진 패스를 받아 주특기인 오른발 터닝슛을 시도했다.

까앙-

정말 날카로웠지만 결과는 골대 샷.

“아오! 저게 안 들어가네!”

머리를 쓸어올리며 아쉬워하는 정한 선배.

“그래도 나이스요! 계속 때려주세요, 형님!”

비록 들어가진 않았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슈팅이었다.

이런 장면이 계속 나오지 않으면 내가 블랙홀처럼 상대 수비를 끌어들여 주는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아르헨티나는 사실상 메시를 제외하면 전원 수비 모드였고, 메시에게는 공중볼을 따낼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로메로 골키퍼는 골킥을 짧게 연결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압박해! 압박! 간격 유지하고!”

지승 선배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공 가진 선수를 에워싸는 태극전사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반전과는 전혀 다른 팀워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팍 가라앉은 아르헨티나 선수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몸값이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선수들이 공이 무슨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처리를 미뤘다.

무의미한 횡패스와 쫄보스러운 백패스의 무한 반복.

결국 공이 하프라인조차 넘지 못한 채 로메로 골키퍼에게 도로 연결되었다.

“제가 붙을게요!”

최전방에 위치한 내가 로메로에게 붙은 것은 당연했는데, 여기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우리의 타이트한 전면 강압수비 때문에 로메로가 미처 공 줄 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중앙에는 안정한-박주연, 측면에는 박지승-이창용이 눈을 번뜩이며 인터셉트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Un saldo de cuenta!”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로메로의 얼굴.

급한 대로 일단 나를 드리블로 제치려고 들었다.

그러나 로메로의 킥 페이크는 너무나도 뻔했다.

아무래도 녀석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정백강이란 선수가 한때 국가대표 센터백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툭-

로메로가 공을 한 번 접는 순간 오른발을 슬쩍 뻗어 깔끔하게 공만 빼냈다.

“으어억!”

스페인어는 전혀 몰랐지만, 단말마의 비명 소리만큼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텅 빈 골문으로 툭 차 넣은 왼발 슈팅이 또르르 굴러가 그물을 출렁였다.

우오오오오오오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동점골에 광분하는 붉은 악마.

골키퍼인 성룡 선배를 포함한 모든 동료들이 달려와 나를 얼싸안았다.

평소 욕을 잘 하지 않는 나지만, 한 번 차지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아! 시이이발!!!!!”

* * *

“이번 월드컵 최고의 경기가 조금 일찍 나온 것 같다.”(프랑크 레이카르트)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히바우두)

“슈퍼스타의 영향력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던 경기. 메시도 훌륭했지만, 특히 정백강은 그의 존재 자체가 핵무기와도 같았다. 내 현역 시절 백강 같은 선수가 있었다면 은퇴가 빨라졌겠지.”(프랑코 바레시)

“여섯 골 중에 최고는 단연 정백강의 마지막 득점이었다. 파워나 기술도 중요하지만 공격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든 골을 만들어내겠다는 집착에 가까운 의지다. 정백강은 자신이 그 덕목을 갖췄음을 확실하게 입증했다.”(마르코 반 바스텐)

“세계 최고의 선수가 브라질 사람이 아닌 게 아쉽지만, 이 경기는 정말 끝내줬다. 오늘 집에 가서 한 번 더 돌려볼 생각이다.”(펠레)

3-3.

결국 동점으로 끝난 이 명승부를 지켜본 축구계의 레전드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뭐, 한국팬들의 반응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 정백강 진짜 미친 ㅋㅋㅋ

- 창용이한테 개꿀 어시, 박주연 골도 혼자 어그로 다 끌고 동점골까지 ㅋㅋㅋㅋㅋ 이게 사람이냐?

- 그냥 서 있기만 해도 2인분 ㄷㄷㄷ

- 무슨 농구도 아니고 ㅋㅋㅋ 11:11 경긴데 혼자서 이 정도로 캐리하는 게 가능하냐?

- 이제 정백강 아니다. 정백‘갓’이다.

- 정백갓 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데? ㅋㅋㅋㅋ

- 월컵에서 2경기 6골 ㅋㅋㅋ 이게 한국 축구 맞나?

- 요즘 진짜 축구 볼 맛 난다.

- 이러다 진짜 우승하는 거 아님??

- 역레발 모르냐 ㅋㅋㅋ 조용히 좀 해 ㅋㅋㅋ 근데 혹시...

- 아! 쫌! 하지 말라고! ㅋㅋㅋㅋㅋ

이처럼 환상적인 경기를 펼친 우리 대표팀에게 선물처럼 낭보가 하나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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