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물론 눈앞에 닥친 경기를 이겨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조별리그의 특성상 다른 경기의 결과에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와 아르헨티나가 혈전을 벌인 6월 17일, 그리스와 나이지리아 역시 자웅을 겨뤘다.
두 팀 모두 1패씩을 안고 있어 승리가 간절한 경기였다.
기선제압에 성공한 건 나이지리아였다.
전반 16분 칼루 우체가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넣으며 이번 대회 나이지리아의 첫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좋은 분위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전반 32분, 볼 경합 과정에서 상대를 걷어찬 사니 카이타가 주심에게 딱 걸리면서 다이렉트로 레드카드를 받아 들었다.
기회를 잡은 그리스는 수적 우위를 활용하여 일방적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고, 전반 44분 디미트리스 살핑기디스가 중거리포로 동점을 만들었다.
상대 수비 맞고 굴절되며 들어간 행운의 골이었다.
후반 들어서도 여전히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그리스는, 후반 21분 바실리스 토로시디스의 결승골에 힘입어 2-1 승리를 거뒀다.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이겨준 것은 우리 대표팀 입장에서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지리아는 2패로 16강 탈락 확정.
아무래도 동기부여가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우리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게 되었다.
거기에 무승부만 거둬도 그리스-아르헨티나전 결과와 상관없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혹시 지더라도 점수 차가 너무 크게 나지만 않는다면 역시 16강에 갈 확률이 높았다.
이게 다 그리스전에서 3-0으로 넉넉하게 이겨 놓은 덕분이었다.
16강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토너먼트 대진에 관한 이야기들도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B조 팀들과 8강 진출을 겨룰 A조의 상황은 아직 혼전이었다.
우루과이 1승 1무
멕시코 1승 1무
남아공 1무 1패
프랑스 1무 1패
당초 A조 최강이라 평가받았던 프랑스가 모래알 같은 조직력을 선보이며 헤매는 사이, 디에고 포를란-에딘손 카바니-루이스 수아레스의 삼각편대가 이끄는 우루과이와, 북중미 전통의 강호이자 ‘월드컵 16강 맛집’인 멕시코가 선두 그룹을 형성했다.
물론 마지막 경기 결과에 따라 모든 게 뒤바뀔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했다.
일부 성질 급한 언론에서는 16강 이후의 대진에 대하여 분석한 기사도 내놓았다.
조 1위를 할 경우 독일, 잉글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과 같은 블록에 속해 결승 진출을 다투며, 조 2위를 하면 브라질, 네덜란드 등을 만날 가능성이 높은데, 종합적으로 보면 오히려 2위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회 시작 전까지만 하더라도 ‘16강만 가면 감지덕지’였는데, 김칫국을 마시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 *
“혹시나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허종무 감독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론에서 떠드는 순위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길 바란다. 목표는 무조건 승리다. 알겠나?”
“네! 감독님!”
6월 22일, 더반에 위치한 모지스 마비다 스타디움.
B조의 마지막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찾아온 6만 명이 넘는 관중이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허종무 감독의 연설은 참 좋은 이야기였지만 ‘언행일치’라는 측면에서는 약간의 물음표가 띄워졌다.
지난 두 경기 동안 3골 1어시스트를 몰아치고 있는 나를 벤치에 앉힌 것이다.
체력 안배 목적이 제일 크기야 하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2등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이 녹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여, 제게 담대한 심장을 허락하소서...”
선발로 나서게 된 박주연 선배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재 월드컵 득점 선두이자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나를 대신해야 하니 부담이 클 터였다.
파이팅입니다, 주연 선배.
“백강!”
경기 시작 전 몸 푸는 시간.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포츠머스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은완코 카누 형님과 존 우타카였다.
인테르 이적 이후 첫 재회.
“이야, 진짜 오랜만이에요!”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말 걸어도 되나? 이젠 너무 스타가 돼 놔서...”
우타카가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그나저나 소식은 들었어요. 어떻게 잘 해결된 거예요?”
내가 뛴 2007-2008 시즌, FA컵 우승에 챔피언스리그 진출이라는 대단한 성과를 거둔 포츠머스는 오래지 않아 깊은 수렁에 빠졌다.
2008-2009 시즌에 리그에서 14위에 그쳤으며, 챔스에서도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32강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영광이 워낙 컸기에 그 몰락도 굉장히 드라마틱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2009년부터 시작됐으니...
비리와 횡령, 무려 3번의 구단주 교체, 심각한 재정난 등 상상 가능한 악재가 한꺼번에 포츠머스를 덮쳤다.
구단에 돈이 얼마나 없었는지, 선수들과 직원들은 받아야 할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 상황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EPL 사무국에서는 임금 체불의 책임을 물어 승점 9점 삭감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가뜩이나 엉망인 팀 분위기에 징계까지 떨어졌으니 그 결과는 참혹했다.
적자 메우느라 괜찮은 선수는 죄다 팔아서 애초에 전력 자체가 약한 것도 있었고.
그리하여 시즌이 끝났을 때 포츠머스의 순위는...
20개 팀 중 무려 20위였다.
“해결은 무슨. 더 나빠질 일만 남았지 뭐.”
카누 형님이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백강 너, 진짜 기가 막힌 시기에 나갔어. 탁월한 결정이었던 것 같아.”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몸값 몇 푼 더 올려보겠다고 포츠머스에 남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됐을까.
인생은 타이밍이고, 회귀로 얻은 두 번째 생에서 나의 모든 타이밍은 완벽하다.
* * *
“파이팅, 파이팅!”
인테르에서도 그렇지만, 팀에서 에이스 역할을 하다 보니 벤치에 앉아 있는 게 썩 익숙하진 않다.
게다가 마음도 더 불편하다.
차라리 땀 흠뻑 흘리며 뛰는 게 낫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목소리 높여 응원하는 것뿐이다.
킥오프.
우리 대표팀의 선축으로 32강전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비겨도 16강 진출이니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다.
수비진과 볼을 주고받으며 기회를 엿보는 기성영.
나이지리아 선수들이 거칠게 압박해 왔지만 좀처럼 공을 빼앗기지 않았다.
성영이는 경기를 치를 때마다 성장하는 모습이 확실히 눈에 보인다.
역시 유망주에게 경험치 먹이는 데는 훈련이고 나발이고 간에 큰 대회, 큰 경기 뛰는 게 최고다.
중원에서 안정적으로 볼을 소유해주는 사이 주연 선배가 오른쪽 측면으로 크게 돌아나가며 상대 수비의 빈틈을 찔렀고, 성영이가 놓치지 않고 패스를 연결했다.
이창용과 주연 선배는 자연스럽게 스위칭.
축구라는 건 참 재밌어서, 최전방 스트라이커 딱 한 명만 바뀌었을 뿐인데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공격 방법이 나왔다.
터엉-
‘한국에는 박주연도 있다’고 외치는 듯한 멋진 스루패스가 골문으로 쇄도하는 창용이에게 연결되었다.
슬라이딩 태클을 하듯 몸을 날리며 가까스로 발을 갖다 대는 창용이.
하지만 슈팅은 골문 옆을 살짝 벗어났다.
“어? 어어어? 아이고야...”
골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났던 벤치 선수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창용이 입장에서는 두 경기 연속골을 터뜨릴 좋은 기회를 놓쳤다.
나이지리아의 골킥.
비록 패하긴 했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 눈부신 선방을 연이어 보여주었던 빈센트 엔예아마 골키퍼가 전방으로 한 번에 연결되는 롱 킥을 시도했다.
197cm의 장신인 카누 형님을 이용한 공격 전개였다.
압도적인 높이를 과시하며 붕 떠오른 카누 형님이 풀럼 소속의 미드필더 딕슨 에투후에게 공을 떨궈 주었다.
날카롭게 전방을 주시한 에투후가 야쿠부 쪽으로 전진 패스.
포츠머스-풀럼-에버튼으로 이어지는 ‘EPL 3인방’이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뻐어엉-
퍼억-
공 잡자마자 곧바로 때린 야쿠부의 강슛을 이종수 선배가 배를 내밀며 막아냈다.
“와... 진짜 아프겠다 저거...”
숙소에서 내 룸메이트를 맡고 있는 곽민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센터백 마음은 센터백이 아는 법.
민수 말마따나 통증이 심할 텐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공을 걷어내는 종수 선배였다.
루즈볼을 따내기 위한 성영이와 에투후의 치열한 경주에서는 에투후가 승리를 거뒀다.
오늘 에투후의 몸이 상당히 가벼워 보이는데, 우리 팀 입장에선 썩 좋지 못한 소식이다.
“다들 올라가! 밀어붙여!”
상대 벤치에선 라르스 라예르베크 감독이 쉴 새 없이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원래 스웨덴 대표팀을 이끌던 라예르베크 감독은 이번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책임을 지고 사퇴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나이지리아의 러브콜을 받았다.
어떻게든 올해 월드컵에 참가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다만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 시기가 올해 2월이었다는 것이다.
어디 동네 축구팀도 아니고, 월드컵에 나갈 대표팀 아니겠는가.
팀을 장악하고 전력을 안정화하는 데 4개월 남짓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 결과가 무력한 32강 탈락이었다.
요컨대 이런 팀에게 진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아... 입이 방정이다.
* * *
전반 12분, 선제골을 넣은 칼루 우체가 혀를 빼꼼 내민 채 병아리처럼 양팔을 파닥거렸다.
뭔가 보는 사람을 굉장히 열 받게 만드는 세리머니다.
“어후... 저것들이 진짜...”
허종무 감독이 시뻘게진 얼굴로 분을 삭였다.
이거, 하프타임에 선배들 엄청 털리겠네...
축구를 하다 보면 실점은 할 수도 있는 거지만 그 내용이 너무 나빴다.
문제의 발단은 오늘 느낌 좋은 에투후.
오버래핑하는 오른쪽 풀백 치디 오디아를 발견하고 기가 막힌 스루패스를 연결해 주었다.
빠르게 반응한 김정운 선배가 즉각적으로 붙어준 건 좋았는데, 이 대목에서 정운 선배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184cm의 좋은 신장에 비해 지나치게 적게 나가는 몸무게가 그것.
평소 60kg 후반~70kg 초반대의 몸무게를 유지하는 마른 체질 때문에 ‘뼈정운’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운 선배였다.
오디아가 어깨로 한 번 퉁 튕겨내자 정운 선배가 순간적으로 휘청하며 흔들렸고, 이형표 선배가 백업 가기 전에 한 박자 빠른 크로스가 올라갔다.
하지만 사실 이때까지도 상황은 괜찮았다.
크로스의 궤적과 속도로 봤을 때 차도리 선배가 충분히 걷어내고도 남는 볼이었다.
그런데 박스 안에 있던 수비진 중 누구도, 도리 선배의 시야 뒤쪽에서 우체가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지역방어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엉망이었다는 얘기다.
자기밖에 없는 줄 알고 산책하듯 슬렁슬렁 달려오던 도리 선배는 갑자기 나타난 우체에게 밀려 공을 빼앗겼고, 횡재한 우체는 일대일 찬스를 침착하게 마무리하며 나이지리아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괜찮아, 괜찮아! 바로 갚아주자!”
축구화 끈을 고쳐 맨 박지승 선배가 고개 숙인 선수들을 돌아보며 파이팅을 외쳤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전혀 괜찮지 않은 쪽으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