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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로 발롱도르-102화 (103/176)

102화

후반전은 우루과이의 선축으로 시작했다.

선제골 이후 기세가 잔뜩 오른 녀석들의 표정엔 기분 나쁜 여유가 넘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루이스 수아레스 쪽을 본 로빙 패스를 이종수 선배가 끊어내면서 금방 공격권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좋았어.

드디어 내 머릿속에서 나온 필살 전술을 보여줄 차례다.

“Tener insomnio!”

공격에 나선 우리의 전형을 확인한 디에고 고딘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놀랄 줄 알았다, 이 짜식아.

후반전을 맞이하는 우리 팀의 메인 포메이션은 매우 공격적인 4-1-4-1이었다.

기성영 혼자 수비형 미드필더 롤을 소화하고, 나머지는 모두 득점이나 어시스트를 노릴 수 있는 자리에 배치되었다.

다소 일찍 승부를 건 허종무 감독.

원톱에 박주연, 오른쪽 측면에 이창용, 중앙에는 부지런한 박지승-금재성 라인이 배치되며 우루과이 수비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비어 있는 왼쪽 측면에는 바로 나, 정백강이 포진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공격형 미드필더로 뛴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윙어로 나서는 건 난생처음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데뷔전(?)인 셈.

대체 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가.

하프타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허종무 감독과의 면담을 불사하면서까지 측면으로 이동한 이유는 단순했다.

상대의 더블팀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공격수건 미드필더건 간에 내가 중앙 쪽에 있을 경우에는, 두 사람 이상이 붙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정말 위급할 때 다른 쪽으로 도움 수비 가기도 좋고, 하다못해 중거리슛을 때릴 때 골문 쪽으로의 시야를 가리는 역할이라도 하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측면에 있다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만약 내가 자리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더블팀을 고집한다면, 우리 공격진은 전반전보다도 훨씬 엷어진 수비벽을 난타할 수 있게 된다.

그건 수비하는 입장에서 꽤 큰 모험.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제 공은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에게 넘어갔다.

어때요, 이래도 더블팀 붙일 겁니까?

“Es dificil!”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타바레스 감독의 대답은 ‘No’였다.

마침내 우루과이의 수비가 정상으로 돌아갔고, 나 역시 2인분의 땀 냄새로부터 해방되었다.

아! 원래 남아공의 공기는 이처럼 프레시한 거였구나.

최초의 의도는 적중.

그러나 이 전술적 실험의 성패를 가리는 건 사실 지금부터였다.

내가 윙어 자리에서 의미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냥 자리만 바꾼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터엉-

나의 생각보다 빠르게 기회가 찾아왔다.

도비처럼 자유로워진 내게 한 방에 연결되는 성영이의 롱패스.

173cm에 불과한 풀백이자 내 마크맨인 막시 페레이라는, 내가 공을 따라 점프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골문으로 쇄도하는 주연 선배.

여러분들, 들어는 보았나?

이게 바로 ‘헤더 크로스’라는 거다.

퍼엉-

나와의 비교는 물론 어렵지만, 주연 선배도 거의 1m 가까운 서전트 점프를 자랑하는 하이 플라이어(High Flyer).

고딘과의 경합을 훌륭하게 이겨내며 공을 머리에 맞히는 데 성공했다.

비록 슈팅은 골대를 살짝 넘어갔지만 ‘윙어 정백강’의 가능성을 보여준, 아주 깔쌈한 공격이었다.

“백강아, 지금 좋았어!”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리는 주연 선배.

이후에도 우리의 공격은 양쪽 측면을 위주로 이어졌다.

압도적 높이와 정교한 헤더의 정백강, 기술적인 돌파력과 센스로 무장한 이창용.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윙어 두 명이 번갈아 가며 수비를 흔들었고, 박주연-박지승-금재성 라인은 활발한 침투와 연계 플레이로 끊임없이 골문을 위협했다.

복싱으로 치면 레프트·라이트·잽·스트레이트·훅· 어퍼컷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연타였다.

이번 대회 무실점을 자랑하는 철벽 우루과이였지만, 그 단단한 가드도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마이 볼!”

종수 선배가 에딘손 카바니보다 높은 타점을 과시하며 우루과이의 롱볼 공격을 다시 한번 끊어냈다.

우루과이가 후반전 들어 보여주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칠 정도로 역습만 노린다는 것.

리드에 너무 취한 나머지 바짝 얼어 있는 모습이었다.

냉정하게 보면 고작 한 골 차이인데 말이지.

공을 따낸 기성영이 지승 선배를 향해 전진 패스.

지승 선배는 다시 창용이에게 볼을 밀어주었다.

앞서 아기자기한 패스워크를 선보이며 유의미한 기회를 여러 번 창출했던 두 사람이다.

거기에 주연 선배와 재성 선배까지 종횡으로 움직임을 크게 가져가며 상대 수비를 현혹했다.

우루과이 녀석들도 사람인지라, 터치라인에 붙어 서서 가만히 있는 나에 대한 경계는 상대적으로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피파 올해의 선수고 나발이고, 현재 전술하에서는 그저 한 명의 ‘헤더 셔틀’에 불과했으니.

그래서일까?

내가 조심스럽게 페널티박스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놀라울 정도로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반 발짝, 반의 반 발짝, 또 반의 반의 반 발짝.

여전히 페레이라의 시선은 반대쪽 사이드에서 벌어지는 패싱 플레이에 못 박혀 있었다.

“창용아!”

어느새 오버래핑한 차도리 선배가 스프린트를 시작한 것과, 내가 필사적으로 박스 안 침투를 시도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마치 약속된 플레이를 수행한 마냥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혔다.

여차하면 중앙 쪽 커버 갈 생각에 빠져 있던 페레이라가 뒤늦게 내 유니폼을 잡아챘으나 뿌리쳐 버렸다.

점프력을 제외하더라도 애초에 나와 페레이라는 체급 자체가 다른 상대.

힘싸움에서 내가 승리하는 것은 당연했다.

도리 선배가 크로스하는 순간 나를 포함해 무려 5명의 한국 선수가 골문으로 달려들었다.

그중 누구를 노린 건지 알기 힘든, 조금은 어정쩡한 공중볼.

하지만 내가 누군가.

‘개떡같이 올려줘도 찰떡같이 넣는’ 바로 그 정백강 아니겠는가.

콰아앙-

내 도약 위치가 골문과 정면이 아니라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곳이었기 때문에, 임팩트 순간 일부러 공의 왼쪽 부분을 타격하며 회전을 먹였다.

감아 찬 것과 같은 효과를 머리로 준 것이었다.

헤더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궤적, 그리고 파워.

페르난도 무슬레라 골키퍼가 멋들어지게 몸을 날리며 이 환상적인 골의 조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우오오오오오!!!

열광하던 붉은 악마들이 내가 관중석으로 다가가자 일제히 손가락을 들어 이마를 두드렸다.

후반 21분, 경기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 * *

타바레스 감독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8분도 아니고 80분 동안 잠근다는 건 역시나 어려운 미션이었다.

차라리 ‘창 대 창’ 대결로 나왔다면 더 곤란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런 결과론에는 하등의 의미도 없지만.

이제 정규시간 종료까지는 약 20분.

연장전, 그리고 승부차기는 양 팀 모두에게 큰 부담.

어떻게든 20분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감독 지시에 따라 수비에 전념하던 디에고 포를란이 간만에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단단히 굳히고 있는 우리 수비진을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동점골이 터진 시점에서, 우루과이를 상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효율적이었다.

‘졸라게 버티다가 찬스를 노린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벗어 던진 지 이미 오래였다.

애초에 우루과이는 우리보다 강한 팀 아니었던가?

첫 골을 어이없게 허용하긴 했지만, 우루과이의 웬만한 공격 패턴에 대해서는 이미 준비해 둔 방법이 있는 상태였다.

우루과이가 자랑해 마지않는 ‘황금의 3톱’도 결국엔 사람.

이름값에 현혹되지 않은 채 찬찬히 분석해 보면, 약점이 분명했다.

일차적으로는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맡은 포를란만 좀 견제해주면 공격 전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수아레스와 카바니가 날뛰는 것도 한발 빠른 위치선정을 통해 제어가 가능했다.

모 스님이 말하지 않았던가.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우루과이에게서 ‘남미의 강호’라는 이름표를 떼 버리자, 남은 것은 ‘한 번 붙어볼 만한, 축구 좋아하는 나라’라는 타이틀뿐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벗어 던진 대한민국 대표팀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양 팀의 운명을 제대로 갈라 버린 후반 39분.

카바니가 성영이의 끈질긴 수비를 뿌리치고 페널티박스 인근에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경기 내내 카바니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보내주었던 포를란은 또다시 카바니를 믿고 패스를 전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포를란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카바니의 체력이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1시간이 넘게 공수를 넘나들며 미친 멍멍이처럼 뛰어다녔던 카바니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제 딴에는 공을 잡아둔 채 잠시 시간을 끌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카바니가 볼을 채 한숨 돌리기도 전에, 수비에 가담한 재성 선배가 거칠게 압박해 들어갔고, 당황한 카바니는 뒤쪽으로 돌리며 소유권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타악-

그곳에는 부지런함의 화신, A.K.A(Also Known As) ‘두 개의 심장’인 지승 선배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달려!”

전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이지만, 그곳에 자비는 없었다.

카바니의 패스를 기습적으로 끊어낸 지승 선배는 템포를 죽이지 않고 왼쪽 측면으로 공을 뿌렸다.

주연 선배는 상대 골문을 향해 오늘 경기 13번째 질주를 펼쳤고.

모르겠다.

내가 그때 모든 욕심을 버리고 헤더 크로스를 올렸으면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지승 선배의 패스가 나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툭-

일단 이마로 공을 잡아 놓은 채 다음 플레이에 대해 생각했다.

대회 전체를 통틀어 줄곧 ‘간결한 플레이’만을 펼쳐왔던 나였다.

때문에 주연 선배에게 공을 넘기지 않고 직접 트래핑한 나의 판단은 일종의 ‘돌발 행동’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나를 막던 페레이라의 예측 반경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기도 했다.

“Maldito mundo!”

스페인어를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어조로 봤을 때 페레이라가 내뱉은 말은 분명 욕설이었다.

추측하건대,

‘이 새끼 지금 뭐해?’ 혹은, ‘개망했다 시발!’

둘 중 하나에 해당하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답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드는 페레이라.

나는 당황하지 않고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고, 내 이마에 맞으며 바닥을 강타한 공이 하늘 높이 튀어 오르면서 페레이라의 키를 훌쩍 넘겼다.

허무하게 벗겨진 페레이라는 뒤돌아보며 소리를 빽 질렀고, 이에 호응하듯 무슬레라 골키퍼가 뛰어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습은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와 같았다.

양팔을 있는 힘껏 허우적거리며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하는 모습.

파아앙-

나의 대응은 다를 것이 없었다.

페레이라를 제쳤던 것처럼 무심히 공을 내려찍는 헤더.

두 번 연속으로 잔디를 때린 볼은 무슬레라의 쭉 뻗은 손끝을 스치듯 넘어갔고, 또르르 굴러가 그물을 출렁였다.

오늘 경기의 마지막 득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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