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정백강 선수, 우선 8강 진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도 대단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네 경기 중 무려 세 경기에서 멀티골을 기록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네 경기 7골이랑, 네 경기 4MOM(Man Of the Match) 중 뭐가 더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식의 경기 후 인터뷰도 물론 네 번째다.
“대회 시작 전 목표가 사실 3골이었습니다. 이미 두 배 이상 초과달성을 한 셈인데요. 막상 여기까지 오니까 욕심이 생깁니다. 깔끔하게 10골을 채우고 싶네요. 물론 매우 어렵겠지만요. 희망 사항 정도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지금 페이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두 골 모두 멋졌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후반전의 포지션 체인지였습니다. 왼쪽 윙어로 깜짝 변신을 했는데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이런 질문엔 또 답변을 잘 해줘야지.
“전반전에 상대 마크가 너무 거세서 정상적인 플레이가 어려웠습니다. 고민 끝에 감독님께 애로사항을 말씀드렸더니, 후반전에 사용한 4-1-4-1 전술을 뚝딱 구상해내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감독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디스 이즈 정치.
허종무 감독의 ‘아빠 미소’가 눈에 선하다.
진행 요원 중 한 명이 나를 인터뷰하던 리포터에게 쪽지 하나를 급히 주고 갔다.
- 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대한민국의 8강 상대가 결정되었습니다. 가나가 접전 끝에 미국을 2-1로 꺾었네요. 가나와의 8강에 임하는 각오 들으면서 인터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별리그에서 나이지리아도 그랬지만, 아프리카 팀들은 기본적으로 까다로운 상대입니다. 선수 한 명 한 명의 기량이 워낙 뛰어나거든요. 쉽지 않은 경기가 되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와 친한 문타리에게 한마디 하고 싶네요.”
- 아, 같은 인테르 소속이시죠. 네, 한 말씀 해주시죠.
“살살 하자, 친구야.”
* * *
-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사람 하나 더 뽑기로 했어.
“정말요? 진작 좀 그러시지. 늦었지만 잘하셨어요.”
‘월드컵 특수’는 나의 어머니, 천하의 김영순 여사마저 무너뜨렸다.
인건비 아껴야 한다며 미루고 미루던 직원 채용을 드디어 단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니까? 김밥 한 줄, 라면 한 그릇 먹겠다고 그게 뭐하는 짓이라니?
투덜대시긴 했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아들에 대한 뿌듯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시겠네.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 아프긴 뭘... 타국에서 고생하는 우리 아들만 하겠니.
이런,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시지...
얼굴 본 지가 워낙 오래되다 보니 이런 따뜻한 말을 들으면 더 보고 싶고, 괜히 눈물 날 것 같고 그렇다.
- 아, 그리고 아들.
“네, 엄마.”
- 손님들이 밥 먹다가 뭐라더라? ‘정백강 레알 돋네?’ 뭐 이런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라니? 너 험담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직접 물어보긴 겁나고, 내 주변 사람들도 요즘 말은 잘 모르잖아.
5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울리려던 엄마가 이번엔 웃을 일을 만들어주셨다.
혹시나 아들 욕은 아닐까 전전긍긍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귀엽다.
“좋은 뜻이에요, 엄마. 내가 축구를 너무 잘해서 정말 소름 돋는다, 뭐 그런 얘기예요.”
- 정말? 엄마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
“그런 거짓말을 왜 해요. 우리 탈락하기 전까지 나는 거의 국민 영웅이니까 그런 걱정 하지 마세요.”
내 입으로 ‘영웅’이란 칭호를 붙이니 좀 쑥스러웠지만, 사실이 그랬다.
기사 댓글이든 인터넷 커뮤니티든 나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찬양 일색이었다.
암암리에 활동하던 내 안티 세력들은 월드컵을 계기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남아공에서의 체감 인기가 이 정도니, 아마 한국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엄마. 또 연락할게요.”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이창용이 숙소 문을 두드리며 등장했다.
“감독님이 전 인원 집합이랍니다!”
나의 절대 타이밍은 이런 상황에서도 얄짤 없었다.
* * *
이번 대회 16강전 최고의 빅매치로 꼽혔던 ‘스페인 VS 포르투갈’을 마지막으로 우승을 다툴 8팀의 명단과 대진까지 모두 정해졌다.
대한민국 VS 가나
네덜란드 VS 브라질
아르헨티나 VS 독일
파라과이 VS 스페인.
나도 대표팀 선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
그렇다, 소위 말하는 ‘꿀대진’이었다(아마 가나 국민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
조 1위로 올라갔으면 8강에서 전차군단 독일을 맞닥뜨릴 뻔했다.
인생사 새옹지마.
우주의 기운이 대한민국을 돕고 있었다.
아, NHK피셜 ‘정백강과 동급의 재능을 가진’ 혼다 케이스케가 이끄는 일본 대표팀은 파라과이와 엄청나게 지루한 경기를 펼친 끝에 0-0으로 경기를 마쳤다.
연장전까지 득점 없이 마친 양 팀은 운명의 승부차기에 돌입, 키커 5명 모두가 놀라운 집중력을 선보인 파라과이가 5-3으로 승리하며 8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 상대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스페인이라는 건 함정이었지만.
어쨌든 다행히도 내가 혼다보다 아주 약간이나마 더 괜찮은 선수라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8강 대진을 본 전문가들의 평가는 딱 한 줄로 요약이 가능했다.
[‘스페인 VS 파라과이’ 빼고 전부 백중세!]
우리(47위)보다 가나(32위)의 피파 랭킹이 약간 높긴 했지만, 이번 대회 들어 보여주는 경기력이나 기세를 봤을 때 전력 차는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한편 가나의 밀로반 라예바치 감독은 아주 화끈한 인터뷰로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한국의 16강전을 분석한 결과 내린 결론은, 정백강을 무득점으로 묶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위해 노력할 생각은 없다. 맞불 작전으로 나가겠다. 과연 어느 팀의 공격력이 더 강한지 제대로 한 번 붙어보겠다. 아무리 못해도 5골은 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리 팀이 3골이다.”
* * *
2010년 7월 3일, 남아공 최대의 도시인 요하네스버그에 슈퍼스타 정백강이 떴다.
무려 9만 4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커 시티 스타디움.
슬쩍 봤는데 빈자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리적 여건(?)을 고려해 보면 관중들 중 대부분은 가나를 응원하러 왔을 터다.
하지만 그렇다고 징징대고 싶은 마음은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 정도의 핸디캡은 있어야 더 할 맛이 나지.
“백강!”
근 2개월 만에 듣는 유쾌하면서도 뽀짝한 음성.
몸을 풀던 문타리가 내 얼굴을 확인하곤 쫄래쫄래 달려왔다.
왈테르 사무엘 형님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만나는 ‘트레블 메이트’다.
이렇게 보니 또 느낌이 색다르네.
반가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덕담 같은 건 없다.
일단 ‘디스’로 인사의 스타트를 끊었다.
“16강전 잘 봤어. 아주 멋진 활약이던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의례적인 칭찬이겠지만, 사실은 문타리를 ‘멕이는’ 말이었다.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 클럽 인테르 소속이자 2009-2010 시즌 트레블의 주역 중 한 명인 문타리는, 미국과의 16강전에서 벤치 스타트를 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가던 연장 후반에 시간 끌기용으로 투입되었다.
뛴 시간으로 보면 120분 중 7분 정도?
“에이스에 대한 특별 관리라고 볼 수 있지. 그 증거가 오늘 선발 라인업 아니겠어?”
오올.
나랑 오랜 시간 어울려서 그런지 타리 형의 혓바닥도 꽤나 쓸 만해졌다.
이래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니까.
인정할게.
어설픈 심리전은 포기하기로 했다.
“내 인터뷰 봤지? 살살 해줘.”
“생각 좀 해볼게.”
게다가 도도함까지!
16강에서 사실상 휴식을 취해 힘이 넘칠 문타리는 오늘 왼쪽 윙어로 선발 출전한다.
인테르에서는 대체로 수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대표팀에서는 공격을 책임져야 하는 포지션에 서는 셈이다.
우리 팀으로 치면 박지승 선배랑 비슷하달까?
클럽에서나 국대에서나 절대적 에이스로 군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좋은 경기 하자고.”
“그래.”
마무리 포옹으로 짧은 인사를 마쳤다.
문타리와 같이 뛴 지 벌써 햇수로 3년 차.
‘가장 친한 동료’라는 기자들의 단골 질문을 받았을 때 첫번째로 떠오르는 얼굴이 문타리다.
그러나 개인적 친분과 승부는 또 별개 아니겠는가.
타리 형,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가 좀 이겨야겠어.
* * *
킥오프.
가나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
우와.
라예바치 감독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작과 동시에 우리 진영으로 밀려오기 시작하는 가나 선수들.
마치 한 무리의 들소 떼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 기세가 엄청났다.
분명 4-3-3 포메이션이라고 들었는데, 적어도 공격할 때는 2-3-5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수비에는 정말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했다.
16강 미국전에서 한 골을 기록한 바 있는 미드필더 케빈프린스 보아텡이 거침없는 돌파로 기성영을 벗겨낸 뒤 시원스럽게 스루패스를 찔러 넣었다.
이번 대회 가나의 득점 리더인 스트라이커 아사모아 기안이 순식간에 일대일 찬스를 맞았다.
삑삑-
휘슬이 살렸다.
정말 다행히도 오프사이드.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 수비진이 라인 관리를 잘했다기보단, 운이 무척이나 좋았다.
기안이 0.5초만 늦게 들어갔어도 꼼짝없는 실점 위기였다.
축구도 결국 템포 싸움.
상대의 경기 콘셉트를 감지한 전성룡 선배가 아주 천천히 골킥을 준비했다.
그러곤 주심이 뭐라 한 소리 할 만한 타이밍에 골킥.
성룡 선배의 발등에 제대로 얹힌 공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오늘 우리 팀의 포메이션은 4-4-2.
이번 월드컵에서 나와 박주연 선배가 나란히 선발 출장한 건 처음이다.
대놓고 ‘공격 축구’를 표방한 상대의 도발에 자극받았는지, 허종무 감독 역시 우리가 가동할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인 전술을 선택했다.
포츠머스 때도 그랬고, 사무엘 에투와 함께 뛰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정백강이 있는 팀에서 투톱을 사용할 때 가장 효율적인 공격법은 누가 뭐래도 파트너의 침투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 사실을 상대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
주연 선배가 나의 도약과 동시에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했으나 상대 수비의 반응이 좀 더 빨랐다.
첫 패턴이 막혔을 땐 일단 돌려야지.
성영이에게 헤더 패스.
앞서 당했던 걸 갚아주듯, 성영이가 트래핑과 동시에 한 바퀴 빙글 돌면서 덮쳐 오는 보아텡의 압박을 손쉽게 벗겨냈다.
“형!”
아니, 얘는 기껏 제쳐놓고 왜 또 나를 주는 거야?
물론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가장 믿음직한 공격수에게 패스하고 싶은 건 미드필더들의 본능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정말 나빴다.
주연 선배는 밀착 마크에 고전 중이고, 지승 선배와 창용이의 위치도 썩 좋지 않아 잘못 줬다간 역습 당하기 십상이었다.
가나 선수들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극초반에 잠깐 보여준 성난 모습을 봤을 때, 턴오버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 같았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내가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게 베스트.
그러나 나의 시야는 골문과 반대쪽을 향해 있었고 패스가 생각보다 낮아서 지금 몸을 비트는 것도 어려웠다.
에라 모르겠다.
퍼어엉-
“뭐... 뭐야?”
내 마크맨인 센터백 이삭 보르사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뒤통수로 때린 헤더슛이 리처드 킹슨 골키퍼의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그물을 출렁였다.
전반 3분 터진 선제골.
생각도 못 한 상황에 나도 순간 보르사에게 빙의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