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04화 (105/176)

104화

허리에 두 손을 짚은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처드 킹슨 골키퍼.

골을 넣은 나조차 얼떨떨할 정도니 킹슨의 허탈한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형! 세리머니 안 해요?”

졸지에 어시스트를 달성한 기성영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내게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아, 그래.

할 건 해야지.

우오오오오오!!!

내가 관중석으로 다가가자 천지가 울릴 듯한 함성이 터졌다.

정백강!!! 정백강!!! 정백강!!!

나는야 뒤통수로도 골을 넣는 사나이 정백강.

예전에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뒤통수 골을 넣은 적이 있긴 한데, 그때는 스네이더의 슈팅이 가만히 서 있는 내게 와서 맞은 거고, 지금은 내가 머리를 휘둘러 때렸다는 차이가 있다.

물론 정말 들어갈 줄은 몰랐다.

이마로 때리는 것만큼 강력하진 않았지만, 킹슨은 설마 그 자세에서 슈팅이 날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한 것 같다.

상대의 허를 제대로 찌른 선제골이었다.

“자! 당황하지 말고 우리 플레이하면 돼!”

오오올.

인테르의 그 ‘샤이 보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런 파이팅이라니.

국대에서의 문타리는 확실히 다르다.

경기 재개.

바로 그 문타리가 볼을 잡았다.

즉각 수비에 나서는 기성영.

뻐엉-

귀찮다는 듯 곧바로 때려 버리는 대륙 횡단 패스.

반대쪽 사이드로 정확히 날아간 공이 오른쪽 윙어 새뮤얼 잉쿰의 품에 안겼다.

이게 문타리야? 베컴이야?

가나의 공격 방향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우리 수비진도 그에 맞춰 재정비에 들어갔는데, 그 찰나의 빈틈을 노리고 잉쿰이 스루패스를 시도했다.

감각적인 트래핑을 선보이는 아사모아 기안.

오른발 바깥쪽으로 공을 멈춰 놓은 뒤에 발바닥으로 슬쩍 굴리면서 이종수 선배의 스탠딩 태클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내가 인터뷰에서 아프리카 팀들을 까다롭다고 한 게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압도적인 피지컬에 더해 이런 기술까지 갖추고 있으니 막는 입장에서 굉장히 괴롭다.

토옥-

기안이 발재간을 부리는 사이 순간적으로 아르헨티나전의 비극이 재현되었다.

메시에게 그랬듯 무려 다섯 명의 우리 선수들이 기안을 둘러쌌다.

명백한 인원 배분 실패.

기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조용헌 선배의 다리 사이로 땅볼 패스를 깔아주었다.

뻐어어엉-

쇄도하던 문타리의 묵직한 왼발 한 방.

철썩-

아아...

전반 7분.

첫 골의 기쁨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허용한 동점골이었다.

* * *

7분 동안 두 골.

이 심상찮은 숫자는 오늘 경기가 조금은 남다르게 흘러갈 것을 예고했다.

벌써 세 번째 킥오프.

너무나도 급박한 흐름에 양 팀 선수들 모두 초흥분 상태.

조금은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일부러 최후방 지역까지 길게 백패스를 날리며 템포 조절에 나서는 박주연 선배.

그러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밀로반 라예바치 감독은 늦출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다 올라가! 밀어붙여!”

‘광인(狂人)’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공격축구 신봉자,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이 빙의된 것 같다.

우리가 무슨 탈압박 장인들이 모여 있는 스페인도 아니고,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압박해오는데 어쩌겠는가.

상대 의도인 줄은 알지만 ‘킥 앤 러시’ 스타일로 빠른 축구를 할 수밖에.

“백강아!”

용헌 선배가 눈에 불을 켠 채 달려드는 기안을 가까스로 제친 후 롱패스를 뿌렸다.

성영이고 용헌 선배고 간에 공만 잡았다 하면 나부터 찾는구만.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드려야지.

다행인 것은 가나가 우루과이처럼 나에게 여러 명을 붙이는 치졸한(?) 수비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매우 고전했던 16강과는 달리 좀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슈팅 조심해!”

내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순간 마크맨인 이삭 보르사가 킹슨 골키퍼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이번에는 직접 때릴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지.

‘뒤통수 골’의 잔상이 꽤 오래 가는 모양이다.

터엉-

헤더 패스의 행선지는 박지승 선배.

공을 받은 지승 선배는 주연 선배를 발견했고, 패스와 동시에 수비를 따돌리며 앞으로 달렸다.

툭- 탁-

‘쌍박’의 멋진 2대 1 패스가 왼쪽 측면을 완전히 허물었다.

이어지는 크로스.

골문 안쪽에서 막으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킹슨 골키퍼가 후다닥 뛰어나왔으나, 내 머리가 좀 더 빨랐다.

철썩-

뭐지?

골 넣는 게 이렇게 쉽다고?

다시 리드를 잡는 득점이자, 전반 10분만에 기록한 멀티골.

그러나 진짜 난장판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 * *

“백강아, 지금 우리 뭐하고 있는 거냐?”

전반 종료 후, 기진맥진한 김정운 선배가 숨을 헐떡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쳤던 45분이 지난 후, 전광판에는 3-3이라는 숫자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3-2로 승리할 거라는 라예바치 감독의 예언은 이미 빗나갔다.

아마 그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점수 쟁탈전이 될 줄은 몰랐겠지.

득점자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가나 : 문타리(7), 기안(21), 보아텡(42)

대한민국 : 정백강(3), 정백강(10), 정백강(16)

그렇다.

나는 90분을 뛰어도 하기 어렵다는 그 해트트릭을 이미 달성했다.

아울러 인터뷰에서 밝혔던 목표인 10골 고지도 점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동점이었다.

3-1까지 벌렸을 때만 해도 손쉽게 4강 가는구나 싶었는데, 가나의 ‘닥공’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허허허허... 축구 인생 30년 동안에 이런 경기는 또 처음일세.”

허종무 감독도 할 말을 잃은 듯 웃기만 했다.

혼을 내기도 좀 애매하고, 그렇다고 칭찬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으니...

득점 기록에 대해서는 역사가 평가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의 ‘승부’라는 측면에서 보면 경기는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골득실이 걸려 있는 조별리그도 아니고.

사실상 0-0이라고 볼 수 있었다.

“도저히 못 뛸 것 같은 사람 있나?”

“없습니다!”

“좋아.”

선수교체 없이 그대로 후반전 출격.

흥미롭게도 가나 역시 라인업이 전반과 동일했다.

양 팀 감독 모두 경기를 길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과연 어떨지...

“으라차!”

“아자아잣!”

여기저기서 파이팅 넘치는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그 풍경은 전반전이 얼마나 빡센 시간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킥오프.

후반전은 우리의 선공이었다.

새로운 45분을 맞아 차분한 마음으로 침착하게 공격을 전개...

“더 뛰어! 더!”

내가 가나 선수였다면 라예바치 감독에게 물병이라도 집어 던졌을 것 같다.

아니 우리나라에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결국 후반전도 난타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전반과 비교하면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선수들의 체력 문제가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마어마한 속도로 공수 전환이 이뤄졌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네 개의 심장’이라는 별명의 지승 선배조차 발놀림이 느려진 게 확연히 눈에 보였으니.

다른 선수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체력이 떨어지니 집중력도 자연히 전반 같지 않았고, 양 팀 모두 실수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 많은 실수들이 묘하게도 계속 겹쳐서 일어나는 바람에, 골이 터질 듯 터질 듯 터지지 않으며 3-3의 균형이 계속 유지됐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지친 가나 수비를 공략하며 이창용이 측면 돌파를 쉽게 성공하면, 꼭 마무리 크로스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성영이가 위험한 지역에서 패스 미스를 범하면, 공을 끊어낸 보아텡 역시 또 우리 선수에게 패스하며 기막힌 역습 찬스를 알아서 반납해 주었다.

주연 선배와 기안은 누가 더 ‘X맨’에 가까운지 경쟁하듯 일대일 찬스를 여러 번 허공에 날려 버렸다.

미드필더들의 체력 저하로 인해 정확한 볼 공급이 되지 않으니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정백강 역시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전반전의 기세로 봤을 때 최소 10골은 터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이 경기는, 지켜보던 이들을 우롱하듯 반전 드라마를 쓰며 정규시간 90분을 동점으로 마무리했다.

가나는 16강에 이어 두 번째 연장, 우리는 첫 경험(?)이었다.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교체 카드를 끝까지 아꼈던 허종무 감독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정운 선배와 창용이를 빼고 김남익 선배와 안정훈 선배를 투입했다.

두 선배 모두 2002년 한일 월드컵 멤버였던 노장들.

자신들의 발로 생애 두 번째 4강 진출의 역사를 만들 기회를 잡았다.

예상대로 연장전 분위기는 우리가 주도해 나갔다.

두 경기 연속으로 120분을 뛴다는 건 선수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이야기였다.

라예바치 감독이 승부를 왜 서둘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체력이 남아 있을 때 결정을 지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확실하게 하나 가자!”

중원에서 공을 잡은 정훈 선배가 농구의 포인트가드처럼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가나 선수들은 역습이고 나발이고 포기한 채 완전히 내려앉아 있는 상태였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을 순 있었지만, 또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기 때문에 완성도 있는 플레이가 필요했다.

수비 숫자가 워낙 많아서 박스 안쪽으로 직접 볼 투입은 어려운 상황.

2선에서의 플레이 메이킹을 맡은 정훈 선배가 지승 선배와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기회를 엿봤다.

전형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법.

정훈 선배가 원하는 그림은 따로 있었다.

“도리야!”

지승 선배가 있는 왼쪽으로 상대 수비를 쏠리게 만들며 시간을 끌다가, 차도리 선배의 오버래핑 타이밍에 맞춰 별안간 오른쪽 측면으로 스루패스를 뿌리는 정훈 선배.

노련미가 물씬 풍기는 장면이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질주한 ‘터미네이터’ 도리 선배가 4강 진출의 염원을 담은 크로스를 올렸다.

본능적으로 점프.

그러나 나답지 않게 마음이 급했는지 공의 궤적 예측을 좀 잘못했다.

덕분에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익!”

어떻게든 머리를 갖다 대려고 기괴하게 몸을 비트는 와중에, 나는 보고야 말았다.

골문 앞에 독야청청 서 있는 주연 선배의 모습을.

가나 수비진은 온통 나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선배!”

됐다, 이걸로 4강이다.

파앙-

아니?

“으아아아악!”

주연 선배가 절규하며 무릎을 꿇었다.

일단 공을 받아두고 때렸으면 김영순 여사도 넣을 만한 장면이었는데, 주연 선배도 조급했는지 발리로 마무리한 게 독이 되었다.

향후 ‘백두산 대폭발 슛’으로 놀림을 받을 만한 흑역사가 이 중요한 순간에 나오고 말았다.

가뜩이나 오늘 안 좋았던 주연 선배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실수였다.

이 치명적인 삽질을 끝으로 연장 전반 종료.

‘4강 감독’이 될 결정적 기회를 놓친 허종무 감독의 마지막 교체 카드는 골키퍼였다.

전성룡 선배를 불러들이고 이원재 선배를 투입.

원재 선배는 이번 대회 첫 출전이었다.

그동안 쌓은 실적을 보나, 최근 데이터를 보나, 우리 팀 골키퍼 중에 페널티킥을 가장 잘 막는 선수는 누가 뭐래도 원재 선배였다.

승부차기를 염두에 둔 선택.

최후의 최후까지 골을 노려봤으나, 연장 전반 막판의 커다란 위기를 통해 오히려 각성한 가나의 수비진은 집요하게 몸을 던지며 우리의 예봉을 꺾었다.

삑- 삑- 삑--

경기 종료 휘슬.

사커 시티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120분 간의 혈전은, 끝내 승자를 가리지 못한 채 승부차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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