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동전 던지기 결과 우리가 선공권을 가져갔다.
승부차기는 통상적으로 먼저 차는 팀이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다.
징크스라는 게 다 맞는 건 아니지만 기분 좋은 출발임엔 분명하다.
우리 팀의 첫 주자는 안정훈 선배.
2002 월드컵 8강전에서 그 유명한 이케르 카시야스 골키퍼를 상대로 PK를 성공시켰던 이력을 갖고 있다.
“어우... 이야, 진짜 다행이다.”
차도리 선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훈 선배의 발목이 생각보다 덜 꺾이면서 공이 가운데로 몰린 감이 있었는데, 리차드 킹슨 골키퍼가 예측 무빙(?)을 너무 크게 가져갔다.
축구화 끝을 살짝 때리며 그물을 흔드는 공.
자칫하면 1번 타자부터 실축할 뻔했다.
가나의 1번 키커는... 문타리.
오늘 중거리포로 한 골 넣은 바 있다.
경기 때 잘한 선수가 꼭 승부차기 실축하는 징크스 가 있...
철썩-
에이, 무정한 친구 같으니라고.
살살 좀 해달라니까.
“흠... 이러면 좀 부담시러운뎅...”
1-1의 팽팽한 상황.
189cm의 피지컬을 자랑하는 성영이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면서 페널티 스폿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긴장되는 순간.
까앙-
안돼!
철썩-
휴우... 십 년 감수했네.
골문 오른쪽 상단을 겨냥한 성영이의 슈팅이 골포스트 안쪽을 강타한 후 꽂혔다.
“헤헤헤, 이렇게 차면 절대 못 막거든요.”
돌아온 성영이가 마치 의도한 것처럼 약을 팔았다.
훈련할 때 많이 봐서 아는데, 성영이 킥력이 좋긴 하지만 월드컵 8강에서 이걸 노리고 찰 정도는 아니다.
이어서 케빈프린스 보아텡이 등장.
징크스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득점자들을 초반에 배치한 밀로반 라예바치 감독이었다.
“이거 왠지 느낌이 좋은데요? 빗나간다에 한 표.”
기성영이 자신 있게 예언했고 그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예에에에스!”
이원재 선배를 완벽하게 속이며 슈팅을 꽂아 넣은 보아텡이 하늘을 바라보며 포효했다.
“다녀올게.”
‘캡틴 박’, 지승 선배의 출격.
뒷모습에서 설명하기 힘든 결연함이 느껴진다.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믿음도 함께.
그리고 역시는 역시였다.
부담을 떨쳐낸 지승 선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나의 세 번째 키커 역시 주장 스티븐 아피아.
양 팀 감독들이 마치 짠 것처럼 진행되는 승부차기다.
세상 무뚝뚝한 표정으로 걸어 나온 아피아가, 쿨하게 PK를 성공시킨 후, 비로소 환하게 웃으며 동료들 곁으로 돌아왔다.
“편하게 해, 편하게. 연습했던 것처럼만 하면 절대 실패 안 해.”
지승 선배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는 우리 팀의 네 번째 주자는, 박주연 선배였다.
오늘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경기력을 선보였던 주연 선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 허종무 감독.
내가 감독이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과감한 선택이었다.
지금 주연 선배가 느끼고 있을 부담감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겠지.
그 옛날 로베르토 바조 같은 선수들은 대회 내내 날아다니고도 승부차기 실축 하나 때문에 역적이 됐는데.
만약 주연 선배가 놓친다면...
어우, 생각도 하기 싫다.
“아자아자!”
“파이팅 파이팅!”
동료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 주연 선배가 먼 길(?)을 떠났다.
아직 한 번도 막아내지 못한 킹슨 골키퍼가 ‘펑펑’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세게 치며 주연 선배를 맞았다.
저것도 일종의 심리전.
킹슨은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주심의 신호가 떨어지고, 도움닫기를 시작하는 주연 선배.
“못 보겠다, 못 보겠어.”
도리 선배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우와아아아악!
일제히 터지는 함성.
그리고 무릎을 꿇는 주연 선배.
“뭐야? 뭐야?”
눈을 뜬 도리 선배가 빠르게 상황을 체크했다.
함성은 붉은 악마들에게서 나왔고, 무릎을 꿇은 이유는 감사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골문 왼쪽 상단을 꿰뚫는 호쾌한 슈팅으로 모든 우려를 불식시킨 주연 선배.
“이번엔 진짜, 진짜 촉이 왔어요. 쟤 분명 놓칩니다.”
자기가 무슨 스네이더인 줄 아는 성영이가 언급한 ‘쟤’는 아사모아 기안이었다.
그래, 쟤도 오늘 골 넣었잖아.
징크스가 한 번쯤은 맞을 때도 됐다.
원재 선배, 당신의 힘을 보여주세요.
퍼억-
“그렇지!!!”
긴장한 탓일까.
기안의 슈팅 각은 밋밋하기 그지없었고, 파워도 실려 있지 않았다.
왼쪽으로 살포시 쓰러지며 선방해낸 원재 선배가 싱긋 웃어 보였다.
8년 전, 호아킨 산체스의 PK를 막아냈을 때 보여준 바로 그 살인미소였다.
이제 우리 팀 다섯 번째 키커가 넣으면 그대로 승부 끝.
대망의 4강 진출이었다.
하하하하하.
기어이 여기까지 오고 말았구나.
“믿어요, 형.”
성영아, 그런 얘기 하지 마.
영화도 안 봤니.
그런 말이 ‘플래그’란다.
승부차기가 처음도 아니고, 실축한 적도 없는 나지만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1m가 이렇게 먼 거리였나.
킹슨이 이렇게 덩치가 컸던가.
그에 비해 골대는 왜 이렇게 작은 걸까.
승부차기도 헤더로 할 순 없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휘슬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대체 어디로 차야 넣을 수 있지?
잘 모르겠다.
토옹-
공이 발에 닿는 촉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의 궤적.
경악한 듯한 킹슨의 표정.
공에 맞고 흔들리는 그물의 움직임.
그 모든 것들이 슬로 모션처럼 망막에 맺혔다.
들어갔다.
4강이다, 월드컵 4강.
“으아아아아아아아!”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무작정 달렸다.
세리머니고 뭐고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발이 느린 덕분에 동료들에게 금방 따라잡혔고, 순식간에 압사의 위기에 처했다.
“숨! 숨은 좀 쉴게요!”
* * *
[대한민국, 남아공에서 또 한 번의 신화를 쓰다!]
[정백강, 이번 대회 첫 해트트릭 달성]
[슈퍼스타의 품격,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화룡점정’ 완성한 정백강]
- 소름... 소오름...
- 진짜 죽을 때까지 월컵 4강은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ㄷㄷㄷ
- 정백강을 위한 대회다 정말 ㅋㅋㅋ
- 조별리그 5골, 토너먼트 5골, 합이 10골 ㅋㅋㅋㅋㅋㅋ 이게 사람이냐?
- 와 근데 해트트릭도 해트트릭인데 승부차기가 진짜 개지렸음 ㅎㄷㄷ
- 레알 ㅋㅋㅋ 거기서 파넨카를 할 줄 누가 알았겠어?
- 담력 진짜 ㅋㅋ 괜히 세계 최고가 아님
- 얼마 전에 <백강분식> 갔었는데 ㅋㅋㅋ 미친 무슨 전날부터 줄 서 있더라 ㅋㅋㅋㅋㅋ
4강 진출이라는 결과, 그리고 나의 해트트릭만큼이나 화제가 됐던 게 바로 경기를 마무리 지은 나의 파넨카 킥이었다.
국내외 언론과 네티즌들은 ‘역시 정백강은 다르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진실은 좀 달랐다.
솔직하게 말하면, 힘 빡 줘서 차면 빗나갈 게 무서워서 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원인과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좋은 거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인생의 진리다.
한편 7월 2일과 3일, 이틀에 걸쳐 펼쳐진 8강전은 굉장히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먼저 리오넬 메시 월드컵 등정에 있어 가장 큰 산으로 여겨졌던 ‘아르헨티나 VS 독일’.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냥 산이 아니라 무슨 얼음 절벽급이었다.
독일은 전반 3분 터진 토마스 뮐러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클로제가 2골, 아르네 프리드리히가 1골을 추가하며 4-0 완승을 거뒀다.
누가 이겨도 이상할 게 없는 매치업이었지만, 이렇게 일방적인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과에 아르헨티나 응원단은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경기장을 떠나지 못했고, 마지막임을 감지한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은 선수단 한 명 한 명을 안아주며 위로했다.
누가 누굴 위로하는 게 맞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이와는 반대로 스페인의 압도적 우세를 점쳤던 파라과이와의 일전은 의외로 접전이었다.
서로 페널티킥을 하나씩 놓치는 난장판 속에서, 80분 넘도록 0-0의 균형이 계속 유지되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대회 최고의 이변을 머릿속에 살짝쿵 그리는 순간, 천재 미드필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나섰다.
간결하면서도 재기 넘치는 드리블로 순식간에 상대 수비수 두 명을 넘어뜨리더니 빈 공간으로 파고드는 페드로 로드리게스에게 완벽한 스루패스를 전달했다.
페드로는 골키퍼 나온 것을 확인하고 침착하게 땅볼 슈팅을 시도.
이 공이 왼쪽 골포스트를 강타하고 나왔는데, 그곳에는 파라과이 수비수가 아닌 다비드 비야가 서 있었다.
텅 빈 골대에 꽂힌 비야의 마무리 샷.
83분 터진 이 골로 스페인의 1-0 승리.
비야는 포르투갈과의 16강전에 이어 또 한 번의 결승골을 터뜨리며 스페인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경기.
바로 대한민국의 준결승 상대가 결정될 ‘네덜란드 VS 브라질’이었다.
우리와 가나가 그러했듯, 이 경기 역시 ‘인테르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스네이더가 부동의 ‘10번’으로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맡았다.
브라질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수문장 세자르 형님, 다니 알베스를 미드필더로 쫓아내며 풀백 자리를 차지한 마이콘, 수비의 핵심이자 ‘셀레상’의 주장까지 겸하고 있는 루시우까지.
무려 3명의 선수가, 그것도 모두 주전으로 뛰고 있는 팀이 바로 브라질이었다.
‘아르헨 VS 독일’에 이은 또 하나의 ‘남미 VS 유럽’의 자존심 대결에서 먼저 웃은 쪽은 브라질.
중원에서 볼을 잡은 수비형 미드필더 펠리피 멜루가 네덜란드 수비진의 방심을 틈타 기습적인 롱패스를 최전방으로 전달했고, 호비뉴가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경기 시작 10분 만에 선제골을 뽑아냈다.
네덜란드는 동점골을 위해 몰아붙였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브라질의 날카로운 역습에 간담 서늘한 실점 위기를 넘겨야 했다.
1-0으로 전반이 끝났을 때만 해도 브라질의 11번째 4강 진출이 유력해 보였다.
그렇게 맞은 후반전.
후반 8분경 스네이더가 오른쪽 측면에서 올린 얼리크로스 하나가 경기의 향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킥을 한 위치를 보나, 궤적을 보나, 그 킥은 무조건 크로스였다.
하지만 공을 보고 점프했던 선수들 중 그 누구도 머리에 맞히지 못했고, 골문을 비우고 나왔던 세자르 형님은 같은 팀인 멜루와 충돌하면서 펀칭에 실패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크로스는 골문 안쪽으로 휙 빨려 들어갔다.
행운, 또는 관점에 따라선 불운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골.
인테르 소속 선수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1-1 균형이 맞춰지면서 양 팀의 공방은 더욱 거세졌다.
그리고 후반 23분.
로빈 반 페르시가 적극적인 돌파를 통해 코너킥을 이끌어냈고, 키커로는 아르연 로벤이 나섰다.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짧게 붙여준 코너킥.
디르크 카윗이 머리를 툭 갖다 대며 골문 앞쪽으로 공을 전달했다.
패스의 행선지는 브라질 수비진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한 단신 선수, 스네이더였다.
방향만 살짝 바꿔 놓은 기술적인 헤더슛이 골문을 향해 날아갔고, 세자르 형님은 손 한 번 뻗어보지 못한 채 실점을 허용했다.
스네이더는 기쁨에 몸부림치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두드리는, 표절이 매우 의심되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스네이더의 두 골을 끝까지 지킨 네덜란드는 결국 2-1로 승리를 거두며 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12년 만에 준결승 무대를 밟게 되었다.
대한민국 VS 네덜란드
스페인 VS 독일
유럽의 강호들 틈에 낀 한 아시아 국가의 이름이 빛나는 가운데, 뜨거웠던 남아공 월드컵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