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07화 (108/176)

107화

비교적 이른 시간에 두 골이 터지면서 또 다득점 양상으로 가지 않을까 싶었던 경기는, 의외로 잔잔하게 흘러 1-1로 전반전을 마쳤다.

서로가 서로의 공격력을 인정하고 수비를 단단히 굳히며 무리를 하지 않은 탓이었다.

“잘하고 있다, 정말 잘 싸우고 있어.”

30년이 넘는 본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경기를 치르고 있는 허종무 감독은 전반전 내용에 만족감을 표했다.

0-5 참사가 났던 98 프랑스 월드컵 때 해설위원으로서 네덜란드전의 참상을 똑똑히 지켜봤던 허종무 감독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 있으니 소회가 남다를 것이었다.

후반전 재개.

우리는 전반전 라인업과 동일했고, 네덜란드는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데미 더 제이우를 불러들이고 공격적 성향이 강한 미드필더 라파엘 반 더 바르트를 투입.

이는 네덜란드도 4-3-3으로 전환해서 스네이더와 반 더 바르트의 더블 플레이 메이킹으로 득점을 노려보겠다는 의미였다.

“자! 다들 정신 바짝 차리자! 특히 수비!”

박지승 선배가 수비를 강조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킥오프.

네덜란드가 전방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초반 러시’하다가 후반에 퍼져버린 가나와는 정반대의 게임 운영이었다.

상대 등쌀에 밀리고 밀리다 최후방의 전성룡 선배에게까지 백패스가 전달되었다.

끝까지 압박하는 로빈 반 페르시.

성룡 선배가 급하게 찬 롱킥이 마르크 반 봄멜에게 차단당했다.

조금은 허무하게 넘어간 볼 소유권.

“재성아! 성영아! 내려와!”

김정운 선배의 SOS 신호.

전반에야 스네이더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반 더 바르트까지 신경 써야 한다.

정운 선배 혼자서 커버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다.

툭- 탁- 톡- 틱-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두 명의 천재 미드필더가 자기들끼리 볼을 돌리며 기회를 엿봤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광경이지만 수비하는 쪽에서는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언제 칼날 같은 패스가 뿜어져 나올지 예상하기 어려웠으니.

빠앙-

지금처럼 말이지.

반 더 바르트의 시원스러운 왼발 킥이 쭉 뻗어나가 아르연 로벤에게 연결되었다.

방금 전까지 중앙 지역에 있던 성영이는 도움 수비를 위해 측면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축구는 11 대 11의 동등한 숫자가 싸우는 게임이지만, 한쪽의 전력이 떨어질 경우 똑같이 뛰어서는 승리를 쟁취하기 어렵다.

개인 기량의 부족을 활동량과 투지로 메워야 하는 것이다.

약팀이 잘 버티다가도 한 번에 우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 이유.

가뜩이나 8강전에서 연장 혈전을 치르고 온 상태라, 체력 역시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전반전 내내 단독 돌파로 우리 수비진을 괴롭혔던 로벤이 이번에는 오른쪽 풀백 그레고리 반 더 비엘과 호흡을 맞췄다.

오버래핑해 올라온 반 더 비엘에게 왼발 바깥쪽을 활용해 패스 연결,

반 더 비엘은 로벤에게 리턴 후 터치라인을 따라 폭풍 질주,

마무리는 로벤의 스루패스였다.

딱 세 번의 패스로 우리 측면 수비를 허물어뜨리는, 간결하면서도 위력적인 패턴이었다.

이형표 선배가 끝까지 따라붙었으나 크로스 차단에는 실패했다.

뻐어엉-

반 페르시는 ‘네덜란드의 이돈국 선배’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발리슛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

그 반 페르시가 작정하고 때린 왼발 하프발리슛이 살벌하게 날아가서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까아아앙-

골대가 7초 동안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한 방.

화들짝 놀란 조용헌 선배가 공을 걷어냈는데 멀리 뻗지 못했다.

콰아아앙-

완벽했다.

공이 왼발등에 임팩트되는 순간의 자세, 슈팅의 궤적, 공의 속도와 파워까지.

발리슛의 교본으로 삼아도 될 만한 반 더 바르트의 중거리포가 골문 왼쪽 상단을 꿰뚫었다.

이 골의 유일한 결점은 세리머니였다.

잔디 위를 양쪽 무릎으로 쭉 미끄러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중간에 걸리면서 나동그라지는 반 더 바르트.

하지만 얼굴엔 너무나도 해맑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팽팽하던 균형이 다시 무너졌다.

* * *

후반 15분 터진 반 더 바르트의 골로 분위기가 네덜란드 쪽으로 넘어가자 허종무 감독이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금재성 선배를 빼고 박주연 선배를 들여보내며 4-4-2로 전환.

한골 차로 지나 열골 차로 지나 탈락하는 건 매한가지, 공격으로 승부를 걸었다.

킥오프를 준비하면서 드는 생각 하나.

정말, 그리스전 이후로는 쉽게 가는 경기가 하나도 없구나.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가나를 상대로는 무승부였고, 그나마 이겼던 우루과이전도 역전승이었다.

응원하시는 팬들이야 극적으로 올라가니 더 열광할 수 있겠지만, 뛰는 입장에서는 정말 죽을 맛이다.

“아, 죄송합니다...”

지승 선배 쪽으로 뿌린 성영이의 패스가 라인을 벗어나면서 네덜란드의 스로인이 선언되었다.

그리 어려운 패스는 아니었는데 아쉬운 턴오버.

심리적 요인도 있겠지만 체력 문제가 더 커보였다.

성영이는 이번 대회 모든 경기에 선발 출전을 했으며, 아르헨티나전을 제외하면 전부 풀타임이었다.

심지어 에이스인 나보다도 출전 시간이 길었으니 말 다했지 뭐.

거기다가 중앙 미드필더면 가장 많이 뛰어야 하는 포지션 아니겠는가.

몸이 비명을 지를 만도 하다.

중원에서 성영이만큼 안정적으로 볼을 배급해줄 인재가 없다는 게 우리 대표팀이 품고 있는 여러 약점 중 하나였다.

“괜찮아! 다시 수비부터 차근차근 하자!”

지승 선배가 한숨을 쉬는 성영이를 격려해 주었다.

시간은 이제 네덜란드의 편.

전진 패스는 아예 할 생각이 없는 듯, 자기네 진영에서 볼을 돌리는 모습이 아주 얄밉다.

그 와중에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다니며 전방 압박을 가장 열심히 하는 건 주연 선배였다.

아무래도 현재 필드 위에 있는 선수들 가운데는 체력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기도 하고, 8강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본인 플레이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을 터.

더 큰 무대인 4강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네덜란드 선수들이 주연 선배의 압박에 당황할 정도로 수준이 낮지는 않았지만.

전광판은 어느새 후반 3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 올라가! 붙어주고! 압박해, 압박!”

허종무 감독의 애타는 외침이 무색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선수들의 발은 급격히 느려졌다.

서서히 엄습하는 ‘패배’라는 두 글자.

Hup- Holland-

Hup- Holland-

승리를 확신하는 듯, 네덜란드 응원단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후반 35분 돌파.

반 더 바르트가 경기를 아예 끝내버릴 작정을 했다.

스네이더와의 2대 1 패스로 이미 발이 딱 굳어버린 성영이를 가볍게 제친 뒤 그대로 전진.

정운 선배마저 스텝오버 한 방으로 날려 버렸다.

무너지는 우리 중원의 모습은 말 그대로 추풍낙엽이었다.

이미 중거리슛으로 한 골을 넣었던 반 더 바르트인지라, 슈팅 각도를 좁히기 위해 용헌 선배가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반 더 바르트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툭-

오프사이드 트랩을 완전히 깨는 환상적인 스루패스.

그리고 반 페르시의 마무리 슈팅.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퍼억-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이번 월드컵에서 워스트(Worst) 멤버를 하나 꼽으라면 1위를 다툴 만한 사람이 전성룡 선배였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선방이 거의 없었다.

‘막을 수 있는 것만 막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골키퍼가 가장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승부차기 때도 허종무 감독은 이원재 선배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그 성룡 선배가, 야신 사각지대를 완벽하게 찌른 반 페르시의 슈팅을 막아냈다.

쳐내기도 어려운 볼을 그대로 잡아낸 후 옆으로 한 번 구르며 재빨리 몸을 일으킨 성룡 선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달려!”

이 목소리에 호응한 건 성영이었다.

“형! 여기요!”

성룡 선배가 지체없이 길게 내던진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하는 성영이.

쐐기골의 순간을 만끽할 준비를 하고 있던 네덜란드 녀석들의 수비 전환이 늦었다.

퍼엉-

붙어 있는 수비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 있게 때린 로빙 스루패스.

주연 선배와 상대 센터백 욘 헤이팅아가 치열한 경주를 벌였다.

마르텐 스테켈렌버그 골키퍼도 반대 방향에서 공을 향해 짓쳐 들었다.

“띄워만 주세요!”

주연 선배만큼 빠르지 못한 데다 체력까지 고갈 상태인 나는 몇 발짝 뒤쪽에서 필사의 스프린트를 펼치고 있었다.

“백강아!”

끝내 공에 먼저 발을 갖다 대는 데 성공한 주연 선배가 스테켈렌버그와 충돌하며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터엉-

이번 대회 최고의 선방을 보여준 성룡 선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마지막 기력을 짜내 패스를 날린 성영이.

그동안의 부진을 씻기 위해 혼신을 다한 주연 선배까지.

나에게는 이 기회를 반드시 마무리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밑에서 유니폼이 찢어질 기세로 부여잡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나의 도약을 방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촤아악-

헤더 슈팅이 그물을 가르는 소리가 마치 천상의 음악처럼 들렸다.

“으아아아아!!!”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유니폼을 벗어 버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상의 탈의 세리머니.

체지방 5%를 자랑하는 근육질의 몸이 전 세계 시청자들 앞에 공개되었다.

발로텔리야, 네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왜 벗는지 알 것 같다.

엄청 상쾌한걸?

피파 규정에 의해 옐로카드는 받았지만 상관없었다.

경고 누적이고 나발이고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남은 경기는 하나뿐이었으니까.

* * *

성영이는 결국 김남익 선배와 교체되었다.

절뚝이며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찡했다.

정말 잘 해줬다, 녀석아.

베르트 반 마르비에크 감독도 어마어마한 활동량을 보여준 디르크 카윗을 빼주었다.

공격진의 빈자리는 클라스얀 훈텔라르가 대신했다.

후반 추가 시간은 3분이 주어졌다.

남은 정규 시간과 합하면 약 6분가량이 남은 상태.

2-2 동점 상황이긴 했으나 경기 흐름으로 봤을 땐 네덜란드의 공세를 우리가 막아내야 하는 전개가 유력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무리뉴 감독이 종종 활용하던 ‘정백강 시프트’를 허종무 감독도 사용하면서, 나를 필두로 한 영혼의 10백이 가동되었다.

그런데 우리 팀의 발목을 잡는 커다란 문제가 두 개 있었으니...

첫째는 상대 팀에 세계 최정상급의 캐논 슈터가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네이더와 반 더 바르트가 여차하면 때리겠다는 표정으로 가운데 버티고 서 있으니 무작정 페널티박스 안쪽만 걸어 잠글 수가 없었다.

둘째는 집중력 저하.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는 ‘정신력’이라는 것도 결국엔 좋은 몸 상태에서 나오는 법.

로테이션이나 조기 교체를 기대하기 힘든 빈약한 스쿼드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거의 한계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이 두 가지 불안 요소가 한꺼번에 작용한 결과, 라인 사이의 간격이 붕 뜨면서 수비 숫자에 비해 너무 많은 공간을 허용하고 말았다.

텅-

아직 냉정을 잃지 않은 스네이더의 송곳 같은 패스가 공간을 잘라 먹으며 들어오는 로벤에게 전달되었다.

왼발로 감아 차기 딱 좋은 위치.

‘로벤 존’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곳이었다.

“안돼!”

로벤이 킥 모션을 취하는 순간 이종수 선배가 앞쪽으로 몸을 날린 건 거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페이크.

로벤의 재치에 제대로 당한 종수 선배가 비틀거리며 끝까지 발을 뻗었다.

삑-

휘슬이 날카롭게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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