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저 왔어요!”
“아들!”
엄마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어디 보자...
2009년 9월에 만났으니 거의 1년이 지났다.
이 정도면 거의 이산가족 상봉 수준.
“야, 너는 우리 집에 왜 있냐.”
“그냥 갈까 그럼?”
“농담이야, 임마. 잘 왔다.”
베프이자 츤데레인 김석중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에 몇 년 있다 보니, 대표팀 동료들을 제외하면 한국엔 이제 친구가 거의 없다.
석중이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선수 생활을 했으니, 반은 축구인이긴 하다.
내 인생, 정말 축구 빼면 아무것도 없구나.
따지고 보면 나연도 축구 덕분에 만났으니...
띵동-
미녀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지막으로 나연이 등장했다.
“어머니~ 녹화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좀 늦었어요. 죄송합니당~”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나를 지나쳐 김영순 여사에게 폭 안기는 나연.
아니?
저런 애교는 나한테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우리 예쁜 나연이가 왔구나.”
뭐지?
내 여자친구고 우리 엄만데 소외되는 이 기분은?
나의 벙찐 표정을 바라보며 석중이가 낄낄 웃었다.
엄마와 감격의 인사를 끝내고 나서야 나를 꼭 안아주는 나연.
“고생 많았어.”
달콤한 목소리에 사르르 녹는다.
“얘들아, 밥부터 먹자 일단.”
“네!”
따르릉-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간만에 평화로운 식사를 만끽하고 싶었는데 울리는 핸드폰.
“음? 뭐지?”
발신자는 무리뉴 감독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네, 감독님.”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첫 마디부터 파격 그 자체였다.
- 내일 한국 도착 예정이야.
음? 아!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비로소 생각이 났다.
2009-2010 시즌 개막 전, 미국 투어 때 했던 약속 말이다.
첼시전에서 발로 골을 넣으면 한국에 와달라고 했던 그 약속.
상대가 파울로 끊는 바람에 반만 성공했지만 무리뉴 감독은 한국에 와주겠다고 했었다.
시간이 제법 지난 데다가, 월드컵이란 큰 대회를 치르느라 정말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다.
애초에 와달라고 부탁한 것도 나요, 가이드는 걱정 마시라고 호기롭게 말한 것도 나다.
정백강 너,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구나.
지금 혼자 다녀도 길거리가 마비될 수준인데, 옆에 무리뉴 감독까지 있다?
어우, 상상도 하기 싫다.
- 걱정 마, 마중은 필요 없으니.
깜짝이야.
간만에 ‘무리뉴표 독심술’이 발동되었다.
- 놀러 가는 게 아니거든.
“감독님, 그럼 한국엔 무슨 일로...”
- 만나서 얘기하지.
그러곤 전화가 끊겼다.
이게 대체 무슨...
* * *
수수께끼의 통화 다음 날.
무리뉴 감독이 알려준 접선 장소(?)는 인천 시내의 한 호텔이었다.
오라니까 일단 가면서도 의구심은 가시지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라도 떴단 말인가.
뭐야, 여기 맞아?
목적지에 도착한 후 나는 주소가 맞는지 다섯 번 확인했다.
이름만 호텔이지 그냥 모텔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아는 무리뉴 감독이 이런 곳에서 묵었단 말이야?
의혹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뭔가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의 기분을 느끼며 307호의 문을 두드렸다.
“감독님?”
철컥-
문을 연 남자는 놀랍게도 정말 무리뉴 감독이었다.
인천의 모텔방에서 트레블 팀의 감독과 월드컵 MVP가 만났다고 하면 몇 명이나 믿어주려나.
“들어와.”
허름해 보이는 건물 외관과 달리 실내는 꽤 깔끔했다.
“놀랐나?”
놀라다마다요.
그걸 말이라고.
“네, 조금은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재회 장소는 당연히 밀라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감독님과 내기했던 사실을 잊었거든요.”
“하하. 나도 그건 잊어버리고 있었지. 한국에 와야겠다고 결정한 다음에 생각이 나긴 했지만.”
“감독님, 그러면...”
“대체 한국엔 왜 왔냐고 묻고 싶겠지?”
“네, 그렇습니다.”
“백강, 너에게 인사를 하러 왔어.”
“인사라뇨?”
“나는 다음 시즌 레알 마드리드로 갈 거야.”
“네에?”
아아아앙-
하필 이 타이밍에 옆방에서 누군가의 달뜬 교성(嬌聲)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감독님, 남들 눈에 안 띄고 싶었던 마음은 알겠는데요.
그래도 방음은 좀 되는 곳에서 묵으시지...
어쩐지 피곤해 보이신다 했어.
* * *
그렇지, 그랬었지.
내가 회귀를 하긴 했지만 축구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달달 외우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무리뉴 감독의 선언을 듣고 나니 비로소 생각이 난다.
트레블 하자마자 바로 레알로 옮기는 바람에 화제가 됐었더랬지.
“계약은 이미 확정됐고, 내일이면 언론에 공표가 될 거야.”
무리뉴 감독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미세한 떨림 같은 게 느껴졌다.
“모라티 씨가 많이 슬퍼하셨겠군요.”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의 ‘무리뉴 사랑’은 정말 각별했다.
숙원 오브 숙원이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그것도 트레블과 함께 안겨줬으니 얼마나 고맙고 어여뻤겠는가.
“내 마음도 좋지만은 않았지.”
“이해합니다. 그런데...”
나는 무리뉴 감독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인사를 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푸하핫!”
무리뉴 감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내가 로맨티시스트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니까.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
순식간에 사라지는 웃음기.
“내가 한국에 온 건 백강, 너를 설득하기 위해서야.”
올 것이 왔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웃으면 된다고 생각... 아, 이게 아니지.
“페레즈 회장과는 이미 이야기를 마쳤어. 너에게 아주 푹 빠져 있더군. 질투가 날 정도로 말이야.”
그렇겠죠.
레알의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만 두 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나다.
눈앞에서 그 활약상을 지켜봤으니 ‘백강홀릭’에 빠질 만도 하지.
월드컵은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결정이 돼 있지.”
세부적인 사항이라고 에둘러 얘기했지만 돈 얘기일 것이다.
“제 에이전트가 라이올라라는 건 알고 계시죠?”
지금 이 소식을 미노 라이올라가 듣는다면 거구를 흔들며 브레이크 댄스라도 추고 싶을 것이다.
“페레즈 회장은 빈틈없는 사람이야. 거의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하아... 이것 참...
“지금 당장 답변드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
“물론. 나도 확답을 바라고 온 건 아니야. 다만,”
다시 미소를 짓는 무리뉴 감독.
“세계 최고를 넘어 역대 최고로 달려가고 있는 선수를 잡으려면, 이 정도 정성은 보여야 하지 않겠어?”
역대 최고라.
어쩐지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말이었다.
무리뉴 이 양반, 정말 혓바닥 하나는 ‘온리 원’이다.
* * *
나에게 커다란 숙제 하나를 던져둔 채 무리뉴 감독은 한국을 떠났다.
대표팀 멤버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오찬, 계속 해외에 있느라 조금 늦게 치러진 체육훈장 청룡장 수여식 등 굵직굵직한 행사들이 많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통 딴 생각뿐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라.
축구선수라면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뛰어보길 소망하는 구단 중 하나다.
‘20세기 최고의 클럽’이라는 수식어면 게임 오버지 뭐.
요즘에야 ‘16강 마드리드’나 ‘하얀 호구’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팀에서 나를 열렬하게 원하고 있단다.
신임 감독은 나를 설득하려고 한국까지 왔다 갔고.
세상은 나에게 안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음이 콩밭에 있으니, 쉬어도 쉬는 느낌이 안 들었다.
결국 고민 끝에 예정보다 조금 일찍 이탈리아행을 결정했다.
이 선택은 신의 한 수.
밀라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레알 측에서 인테르에 공식적으로 오퍼를 넣음과 동시에 라이올라와의 접촉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이적 요청이 왔을 때만 해도 코웃음을 쳤던 인테르지만,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확인한 후에는 이야기가 그리 간단치 않게 되었다.
최초로 비드(Bid)한 금액이 자그마치 1억 2천만유로였다.
우리 돈으로 하면 1800억 원.
종전 역대 1위 기록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9400만 유로를 가볍게 뛰어넘는 것이었으니.
‘절대 안 팔지!’ 하고 넘기기엔 너무나도 많은 액수였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아니 전 세계의 언론들이 이 역사적인 이적의 성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사자인 나한테 한마디라도 들으면 그게 곧 특종인 상황.
어딜 가도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당분간은 라이올라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나의 다짐은 생각보다 빨리 무너졌다.
* * *
“5분 내로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청와대 갔을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었다.
모라티 구단주와의 독대라니.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 피하고 싶었던 만남이다.
회사원으로 치면 이직 건을 두고 대표이사랑 면담하는 꼴 아닌가.
대체 무슨 말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끼익-
이런 젠장.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5분이라더니 50초 만에 오셨네.
일단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강! 오랜만일세!”
나는 악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모라티 구단주의 선택은 격한 포옹이었다.
“아... 네... 오랜만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경기는 모조리 챙겨봤다네. 우리는 형편없이 떨어졌지만, 자네 덕분에 월드컵 기간 동안 아주 즐거웠지.”
모라티 구단주가 ‘우리’라고 표현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2무 1패를 거두며 4개 팀 중 4위로 굴욕적인 탈락을 맛보았다.
불과 4년 전 우승 트로피를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충격적인 몰락.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가 실제로 있음을 보여주었다.
“너무 오래 세워뒀구먼. 자, 앉게나.”
“네...”
좌불안석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군.
“쥐스트 퐁텐이 13골을 넣었을 때 나는 축구에 미쳐 있던 10대 소년이었지. 나는 펠레의 플레이도 직접 본 사람이지만, 1958년의 퐁텐은 정말, 정말 굉장했다네.”
모라티 구단주는 1945년생.
광복 때 태어난 인물이다.
여기서 퐁텐을 라이브로 본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그런데 2010년의 정백강은 더 대단했지. 14골이라니! 아마 그런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을걸세. 아, 실례했구먼. 자네가 4년 뒤에 더 엄청난 걸 보여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모라티 구단주 역시 모를 리 없었다.
“이거, 바쁜 사람 불러다 놓고 엉뚱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군그래.”
안경을 한 번 고쳐 쓰는 모라티 구단주.
“오늘 내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멍청인 아니랍니다.
“좋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알다시피 나는 인테르의 구단주이기도 하지만, 사업가이기도 하다네.”
보통 사업가는 아니고 석유 ‘재벌’이시죠.
“사업을 할 때는, 그게 뭐가 됐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밀어붙이려고 하면 안 된다네. 그러면 십중팔구는 손해를 보지.”
“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미 떠난 마음도 억지로 붙잡으려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네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네.”
나는 약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팀에 남겠다면, 상대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공짜로 준다고 해도 자네를 팔지 않겠네. 그러나, 자네가 떠나겠다면 미련 없이 이적을 승인할 거야. 자네도 에이전트를 통해 들었겠지만, 저들이 제시한 이적료는 솔직히 놀라울 정도의 금액일세. 더 솔직히 말해볼까? 경영진에서는 이미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네. 나만 결정하면 끝이야. 그리고 난 그 결정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릴 수 있는 선택.
여기 오기 전부터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하긴 했지만, 입으로 이야기하는 건 또 별개의 영역이었다.
“저는...”
입을 떼면서 모라티 구단주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는... 이적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