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알겠네.”
“죄송합니다...”
“아냐,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네. 나도 젊을 땐 이런 일에 상처받을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좀 둔감해졌어. 백강, 자네가 우리 팀으로 올 때 이적료가 얼마였지?”
“3천... 900만 유로였습니다.”
“허헛!”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가 파안대소를 했다.
“리그 두 번, 코파 두 번, 빅이어 한 번에 트레블까지 하는 데 3900만 유로였다니. 내가 정말 수지맞는 장사를 했었구먼.”
“저 혼자 이룬 업적은 아닙니다.”
“자네가 일등 공신인 건 부정할 수 없지.”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구단주와 선수로서 보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겠구먼.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네. 그리고 고마웠어.”
“저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무래도 어색할 테니 내가 먼저 나가도록 하지.”
마지막까지 의연하게 유머 감각을 발휘한 모라티 구단주가 작별 포옹을 나눈 후 방에서 나갔다.
하... 복잡 미묘한 기분이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왠지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절대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무리뉴 감독의 제안을 듣고 나서 며칠 동안은 정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리고 엄청난 고민 끝에 이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건 내가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칼치오폴리 이후 꾸준히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세리에는 2009-2010 시즌 인테르의 트레블을 마지막 불꽃으로 해서 예전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암흑기에 들어가게 된다.
심지어 분데스리가에 밀려 ‘3대 리그’라는 타이틀까지 상실.
물론 내가 인테르에 남는다면 약간이나마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축구계의 커다란 흐름을 거스르는 데는 한계가 있을 터였다.
짧다면 짧은 선수 생활, 이왕이면 가장 큰물에서 놀다 가야 하지 않겠는가.
* * *
[정백강, 이적시장 역사도 새로 썼다]
[이적료 2억 유로... 한화로 약 3000억 원]
[세부 계약 조건은 비공개, 연봉도 세계 최고 수준일 것으로 추정]
레알 마드리드가 최초로 제시했던 1억 2천만 유로라는 숫자 역시 거금이었지만, 나의 시장 가치는 그 이상이었다.
- 야 ㅋㅋ 아무리 그래도 3천억은 개오버 아님?
- 호날두 몸값 2배라... 흠...
- 근데 정백강이 다른 선수들하고 레벨이 다른 건 사실이지
- ㅇㅇ 몇 년 지나면 싸게 샀다고 할지도 ㅋㅋ
- 약간 비싼 감이 있긴 한데... 스타성 감안하면 할 만한 투자라고 본다
- 트레블 한 번에 천억이라 하고, 트레블 세 번 하면 본전 뽑네 ㅋㅋㅋㅋ
- 처음엔 인터 밀란이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적료 보고 납득 ㅋㅋ 저 돈이면 펠레도 팔아야지
- 근데 레알이 진짜 돈이 많긴 하구나 ㄷㄷㄷ
- 그렇게 쉽게 말할 건 아닌 게, 이 영입은 레알 입장에서도 사활을 건 거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함,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정백강이 돈값 못해주면 레알 운영도 힘들어질 거야
- 아 진짜 ㅋㅋ 방구석 좆문가들 개많네 ㅋㅋㅋㅋㅋㅋ
심지어 한국에서조차 의견이 갈릴 정도로, 2억 유로라는 숫자는 충격과 공포였다.
이적료가 이 정도니, 주급 역시 세계 최고인 게 당연.
미노 라이올라가 줄다리기 협상 끝에 받아 온 결과물은 세후 35만 유로, 연봉으로 하면 우리 돈으로 270억 원이 넘었다.
출전 수당, 득점 수당 등 각종 보너스를 제외한 순수 연봉만 이 정도였다.
이번 계약을 통해 뭘로 보나 ‘세계에서 가장 비싼 축구선수’로 등극하게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 하나만큼은 자신 있는 내게, 메디컬 테스트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테스트 담당 의료진은 나의 낮은 체지방률에 한 번 감탄하고, 전력 질주 테스트 때 또 한 번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이야... 제가 테스트했던 공격수 중에 가장 느리네요.”
선생님, 그거 TMI...
그나마 ‘선수’가 아니라 ‘공격수’라는 게 작은 위안이었다.
* * *
이전에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환히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 이럴까.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해트트릭을 하던 자네를 본 순간 생각했네. ‘언젠간 우리 팀의 일원으로 만들겠어!’라고 말이지. 그런데 오늘 그 꿈이 현실이 되는군.”
나도 페레즈 회장을 바라보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가장 즐거워 보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또 한 번 돈방석에 앉게 된 라이올라였다.
매번 얼굴을 볼 때마다 살이 찌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시인가 싶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뒤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했다.
“취재를 원하는 곳이 하도 많아서, 추첨으로 정했다네. 이례적인 일이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이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준비된 좌석과 마이크는 네 개.
가운데에 내가 앉고, 양쪽 끝으로 페레즈 회장과 무리뉴 감독이 배석했다.
“의자 하나가 남는데요?”
“아, 거긴 통역사 자리일세.”
“통역, 없어도 괜찮습니다.”
페레즈 회장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무리뉴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강은 축구 실력도 놀랍지만 언어에서도 천재적입니다. 인테르 입단 기자회견 때도 이탈리아어를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었지요.”
‘언어 천재’는 5개 국어를 하는 무리뉴 당신 같은 사람에게 할 말이고요.
저는 그냥 ‘능력발’이죠 뭐.
페레즈가 손짓을 하자 진행 요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의자를 치웠다.
펑- 퍽-
좌중이 정리되자, 플래시 세례에 익숙한 나조차도 눈이 시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카메라들이 저마다 불을 뿜었다.
“궁금한 일들이 아주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회견 시간을 넉넉히 잡았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페레즈 회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운을 뗐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질문 세례.
- 우선 정백강 선수의 입단 소감을 좀 듣고 싶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들뜨는 일이다. 그 장소가 레알 마드리드처럼 특별한 팀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위대한 구단에서 써 내려갈 수많은 이야기들에 대해 기대가 매우 크다.”
나의 유창한 답변에 취재진이 술렁였다.
- 스페인어 솜씨가 완벽하다. 얼마나 공부했나?
“오랜 취미 중 하나가 외국어 공부다. 어릴 때부터 해온 일이라 특별한 건 없다.”
- 천문학적인 이적료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에 대해 부담을 느끼진 않나?
“부담감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축구선수의 일이란 게 곧 그런 부담을 극복하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잘해 온 편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 이적을 결정하는 데 무리뉴 감독과의 관계가 영향을 미쳤는가?
“하하하. 앞선 질문과 마찬가지다. 아니라고 말하면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무리뉴는 최고의 감독이고, 나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무리뉴 감독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취재진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한테 질문을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끼어들자면, 100% 사실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닌 무리뉴표 유머.
그의 기분이 아주 좋다는 뜻이었다.
- 분위기를 바꿔서 무리뉴 감독에게 질문을 좀 드리겠다. 감독직을 맡은 후 첫 영입이 정백강 선수인데, 혹시 추가적인 영입이나 방출 계획이 있나?
“글쎄. 그걸 논하기 전에 일단 팀의 재정 상황을 봐야 할 것 같다. 어쨌건 2억 유로를 쓴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쪽 분야의 전문가는 저기 앉아 계신 페레즈 회장이다.”
교묘하게 어려운 질문을 넘기는 무리뉴 감독.
자연스럽게 페레즈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적시장이 이걸로 끝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팀 재정 상황엔 전혀 문제가 없다. 우리는 레알 마드리드다.”
* * *
“뭐야, 내가 1등이야?”
내 얼굴을 확인한 에투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 축하해, 사무엘. 어서 와요, 조르젯.”
밀라노에 있는 한 대형 식당.
마드리드에서 당장 닥친 급한 일들을 다 처리한 나는 다시 밀라노로 넘어왔다.
갈 때는 가더라도, ‘전우’들과의 작별 인사는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후의 만찬 격으로 내가 거하게 한 번 쏘기로 했다.
“떠나는 건 좋은데 왜 하필이면 그딴 팀으로 가는 거야. 영 마음에 안 들어.”
스페인의 양강(兩强), 레알과 바르셀로나에 대해 모두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에투가 평소 성격 그대로 독설을 내뱉었다.
“에이, 왜 그래. 백강 씨, 사무엘이 서운해서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조르젯이 툴툴대는 남편을 타박했다.
“잘 알죠. 괜찮아요.”
두 번째로 도착한 인물은 루이스 피구 형님이었다.
“여~ 다들 오랜만이야!”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요?”
“은퇴하니까 너무 좋은 거 있지. 너희들도 빨리 은퇴... 아, 이런 말은 좀 그렇네. 취소 취소.”
이어서 잉꼬 커플 문타리-돈코르가 등장했다.
“메나예!”
“조르젯!”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얼싸안는 두 명의 여인들.
“오랜만에 보나 봐?”
“아마... 어제 같이 쇼핑했을걸?”
문타리가 대답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딘가 소외되어 보이는 남편들의 모습.
엄마와 나연의 깨가 쏟아지는 장면을 봤을 때 나도 좀 그랬었지.
“이제 배가 꽤 많이 불렀네요?”
돈코르는 제법 임산부 티가 났다.
“4개월이 넘었으니까요. 태어날 아기가 좋은 삼촌을 잃었네요.”
“에이, 다신 안 볼 것도 아닌데요 뭘.”
“백강 씨 이적 소식 발표 나고 이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크흠!”
묵묵히 듣고 있던 문타리가 헛기침을 하며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자기야, 그런 얘길 뭐하러 해.”
“왜? 사실이잖어.”
“그래두...”
으이그, 역시 문타리는 문타리다.
떠나는 내 마음도 편치만은 않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결정된 일인 것을.
뒤이어 초대 손님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도착하면서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다들 미안, 자선 행사가 있어서 좀 늦었어.”
밀라노 지역 유지 사네티 주장을 끝으로 모든 멤버가 모였다.
“자, 오늘의 주인공 백강이 건배 한 번 해야지?”
분위기를 띄우는 피구 형님.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하도 몰아가는 통에 잔을 들고 일어섰다.
“음... 어... 이거 생각보다 굉장히 쑥스럽네요.”
나에게 온전히 집중한,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니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컥했다.
그리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이고, 절대 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울어 버렸네요. 이거 참.”
목이 메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인테르에서 보낸 2년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트로피도 많이 들었고, 개인적으로도 이런저런 수상도 많이 했고요. 하지만 가장 뜻깊었던 건... 바로 여기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자, 건배!”
“건배!!!”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