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우리는 레알 마드리드다.”
나의 입단 기자회견에서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이 했던 이 간지폭풍 대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일종의 허언이었음이 드러났다.
천하의 레알이라도 3천억 원은 역시 큰돈이었다.
영입 소식은 전무한 가운데 한두 명씩 팀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수가 계속 줄어듦에도 불구하고 이적료 수입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단 첫 타자는 센터백 크리스토프 메첼더.
페페와의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며 지난 시즌 겨우 3경기 출전에 그쳤던 메첼더는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고국인 독일의 샬케04로 이적했다.
계약이 종료됐으니 당연히 이적료는 0원.
이어서 ‘만년 유망주’로 불리다 나이만 먹어버린 왼쪽 측면 자원 로이스톤 드렌테가 라리가 하위 팀인 에르쿨레스로 임대를 갔다.
임대이니 이적료가 있을 수가 없었다.
세 번째는 앞의 두 명과는 ‘레베루’가 다른 이적이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 레알을 위해 헌신한 부주장 구티가 터키의 베식타스로 떠난 것이다.
계약 기간은 아직 1년 남아 있었지만, 구단 측에서는 그동안의 업적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상호 해지를 통해 이적료 없이 구티를 놓아 주었다.
이렇게 무려 세 명의 선수를 공짜로 풀어준 대인배(?) 레알.
그러나 진짜 큰 사건은 이 다음에 일어났다.
[라울 곤살레스, 샬케04 이적 확정]
구티의 이적도 충격이었지만, 라울과의 작별은 팬들 입장에서 정말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라울이 누구던가.
741경기, 그리고 323골.
최다 출장-최다 득점 기록을 동시에 갖고 있는 레알의 상징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라울 마드리드’라는 말이 생길 정도.
유스 시절부터 오직 레알에서만 뛰었던 그가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격분한 팬들은 이게 다 ‘굴러들어온 돌’인 무리뉴 감독 때문이라 생각하고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라울이 언론을 통해 밝힌 이적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카림 벤제마나 곤살로 이과인 같은 재능 있는 선수들이 팀에 합류하면서 저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습니다. 저는 아직 필드 위에서 보여줄 게 더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무리뉴 감독님은 오히려 저를 붙잡았습니다.”
라울의 말마따나 정신적 지주가 미치는 영향력을 잘 아는 무리뉴 감독은 끝까지 이적을 만류했지만, 라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썩어도 준치’였고 ‘라울은 라울’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많다지만 이적료로 몇십억 원 정도는 챙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티라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라울에게도 똑같은 예우가 적용되었다.
땡전 한 푼 안 들이고 레알 선수를 두 명이나 데려간 샬케04만 노가 난 셈이었다.
‘2억 유로의 사나이’ 정백강의 합류와 라울의 이탈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사건은 ‘2010 버전 새로운 레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라울의 빈자리를 메울 신임 주장은 짬밥 순에 따라 이케르 카시야스로 결정되었다.
레알이 정백강 하나를 얻고 4명의 선수를 허무하게 보내는 사이, 숙명의 라이벌이자 라리가의 또다른 ‘큰손’인 바르셀로나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이적시장을 보내고 있었다.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던 즐라탄을 밀란에 팔고, 대신 이번 월드컵 브론즈볼의 주인공인 다비드 비야를 발렌시아에서 데려왔다.
세르지오 부스케츠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린 야야 투레는, 만수르의 오일 머니를 앞세운 맨체스터 시티에 매각.
그 돈은 리버풀에서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를 영입하는 데 썼다.
즐라탄과 투레의 공통점이라면, 펩 과르디올라 감독과의 사이가 갈 데까지 갔다는 것.
어차피 안 쓸 선수를 가지고 장사를 꽤나 잘한 셈이었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팀의 이적시장 풍경에 대해 스페인의 유력 칼럼니스트 한 명은 이런 표현을 썼다.
“상식적으로 이번 여름을 평하자면, 레알에게는 B, 바르셀로나에게는 A를 주고 싶다. 그러나 레알이 영입한 선수가 정백강이라는 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감히 예상하건대, 바르셀로나는 이번 시즌 무조건 A 이상의 성적을 거둘 것이다. 하지만 레알은, S 아니면 B를 받겠지. 정백강, 그는 상식이란 걸 벗어나는 선수니까 말이다.”
* * *
이적 후 첫 번째 팀 훈련 날.
레알에 온 기념으로 새로 산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를 몰고 천천히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인테르에서 항상 1등을 도맡았던 나였기에, 당연히 텅 비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막 주차한 포르쉐 카이엔에서 내리는 익숙한 실루엣의 인물.
호날두였다.
아... 굉장히 어색하게 생겼군그래.
2019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9년 후.
대한민국을 분노에 빠뜨렸던 ‘노쇼 사건’의 여파로, 호날두에 대한 나의 감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도 그냥 데면데면하게 인사 정도만 나눴을 뿐이다.
그런데 이젠 팀 동료가 되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관계 형성을 해야만 한다.
바로 이동하지 않고 자리에 멈춰 선 걸 보니, 호날두도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에라, 어차피 넘어야 할 산.
과감하게 가자.
내리자마자 일단 밝게 인사하는 거야.
하나, 둘, 셋!
“백강!”
어라?
“우리 팀에 온 걸 환영해. 정말 반가워.”
호날두 녀석이 선수를 쳤다.
해맑게 웃는 표정에는 어떠한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흑화’하기 전이라 그런가.
하긴.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가지고 사람을 미워한다는 게 좀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도 반가워.”
호날두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다음엔 더 일찍 와야겠는데? 까딱하면 1등 자리를 놓칠 뻔했네. 이렇게 빨리 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나도 놀랐어. 인테르에선 항상 여유 있게 1등이었거든.”
호날두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는 녀석이었다.
첫째, 상당한 수준의 투머치토커다.
둘째, 의외로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
“맨유에 있을 때 지승하고 네 이야기를 많이 했었어.”
“그래?”
“내가 물어봤었거든. ‘대체 백강이란 친구는 누구야?’ 하고. 축구를 너처럼 하는 선수는 태어나서 처음 봤으니까. 솔직히 좀 신기했어.”
그럴 만도 하지.
“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카카가 그랬었는데. ‘어우, 다행이야. 같은 편일 땐 그렇게 든든한 선수도 없지.’ 백강 네가 밀란 상대로 강했었잖아.”
신이 나서 혼자 떠드는데 조금 당혹스러웠다.
대체 어디까지 대답을 해줘야 하는가.
“훈련장 라커룸은 이쪽이야.”
선배 노릇을 하는 호날두를 따라 옷을 갈아입은 후 일단 러닝으로 가볍게 몸을 풀었다.
뛰는 동안에도 쉴새 없이 재잘대는 호날두.
얘도 어색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누가 좀 와줬으면 좋겠다.
“헤이!”
나이스 타이밍.
나의 구세주로 등장한 인물은 카카였다.
사실 사람이라면 아무나 상관없었는데, 아는 얼굴이 오니 반가움이 더욱 크다.
“오랜만이야, 백강.”
“그러게.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같은 유니폼을 입은 인테르와 밀란의 전 에이스들.
이탈리아의 팬들이 본다면 눈물이 날 만한 장면이다.
2007년 발롱도르 & 피파 올해의 선수 카카.
2008년 발롱도르 & 피파 올해의 선수 호날두.
2009년 피파 올해의 선수 정백강.
나란히 달리는 세 명의 몸값만 합쳐도 어지간한 구단 하나는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카카!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그 영화 봤어?”
“응, 재밌더라.”
“그치? 정말 재밌지?”
아까까만 해도 친밀하게 굴던 호날두였는데, 진짜 절친인 카카가 오자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그랬구나.
그냥 얘는 자기 말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던 거였어.
* * *
“자! 다들 집합!”
무리뉴 감독이 선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이미 다들 인사를 나눴겠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는 해야겠지? 오늘부터 정백강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됐다.”
“다들 반갑습니다.”
“워후! 2억 유로의 사나이! 뿌뿌뿌뿜~”
이 격한 리액션의 주인공은 알바로 아르벨로아.
데포르티보와 리버풀에서 잠깐 외도(?)의 기간을 거쳤으나, 레알 유스 출신이니 일종의 ‘성골’이다.
아까 잠깐 대화를 나눠 봤는데, 곱상하고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도 무지하게 크고 성격도 활달하다.
“아마 지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날걸? 이제 백강한테 골 먹힐 일이 더 없잖아.”
그동안 나한테 험한 꼴 많이 당했던 주장 이케르 카시야스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만만치 않아. 정백강 마크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잠깐만 방심하면 바로 실점이니까.”
“동감이야. 제일 만나기 싫은 타입이지.”
세르히오 라모스와 페페도 거들었다.
전반적인 분위기를 스캔해 보니, 수비랑 미드필더진은 나를 환영하는 것 같고, 최전방 라인인 카림 벤제마나 곤살로 이과인은 경계하는 느낌이다.
자기들끼리 경쟁도 빡센데, 무슨 황소개구리 같은 생태계 교란종 하나가 떡하니 와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감독님! 새로운 슈퍼스타 실력도 볼 겸 오늘 청백전 어떠십니까?”
이제 보니 아르벨로아가 완전 분위기 메이커다.
“청백전이라, 그거 재밌겠군. 그러면 주장과 부주장이 번갈아 가면서 팀원을 뽑도록 하지.”
선선히 수락하는 무리뉴 감독.
선수들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무리뉴는 온 지 얼마 안 된 신임 감독이다.
그 말인즉슨 팀원들에 대한 선입견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지난 시즌 기회를 많이 못 얻었던 선수들에게는 눈도장을 쾅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세르히오, 먼저 뽑을래?”
“형이 먼저 뽑아.”
‘선픽권’을 놓고 아웅다웅하던 카시야스와 라모스는 결국...
“Piedra, papel o tijera!”
스페인어라 좀 있어 보이지만 그냥 ‘가위바위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시 순서 정하는 데는 이만한 게임이 없지.
“좋았어!”
라모스가 주먹, 카시야스가 가위를 내며 희비가 엇갈렸다.
“나의 선택은...”
이게 뭐라고.
은근 긴장되는 순간이다.
“백강!”
전체 1픽의 영광은 나에게 돌아왔다.
“그렇다면 나는, 크리스.”
카시야스는 예상대로 호날두를 선택.
“흠...”
잠시 고민하던 라모스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좋았어! 사비 형!”
크, 나이스 픽이다.
이로써 정백강-알론소-라모스로 이어지는 황금의 척추 라인이 완성되었다.
“카카!”
카시야스는 호날두-카카를 연속으로 찍으며 공격 쪽에 힘을 싣는 선택을 했다.
치열한 드래프트 끝에 최종적으로 구성된 팀은 아래와 같았다.
<팀 카시야스>
GK : 카시야스
DF : 페페, 라울 알비올, 나초 페르난데스, 다비드 마테오스
MF : 카카, 마하마두 디아라, 페르난도 가고
FW : 호날두, 벤제마, 이과인
<팀 라모스>
GK : 예지 두덱
DF : 라모스, 마르셀루, 아르벨로아, 에세키엘 가라이
MF : 알론소, 반 더 바르트, 라사나 디아라, 에스테반 그라네로
FW : 정백강, 호셀루
우리 팀이 밸런스에 신경을 썼다면, 상대는 화려한 공격진에 몰빵한 느낌이 훅 풍기는 라인업.
“자! 한바탕 놀아볼까?”
라모스의 호기 넘치는 파이팅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