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13화 (114/176)

113화

전반 30분, 후반 30분으로 진행되는 청백전.

초반은 일단 탐색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보니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우리 팀의 후방 빌드업 리더 격인 사비 알론소는 무리한 전진 패스 대신 안정적으로 볼을 돌리며 기회를 엿봤다.

그 와중에 최전방에서는...

“후욱, 후욱”

나의 투톱 파트너인 호셀루가 뛰다 뛰다 지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리저브 클럽, 쉽게 말해 2군에 해당하는 카스티야 소속인 호셀루는, 1990년생이니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유망주다.

1군 훈련에 끼게 된 것만 해도 대단한 기회인데, 무리뉴 감독 앞에서 청백전까지 뛰게 됐으니 얼마나 의욕이 넘치겠는가.

공은 저 뒤쪽에 있는데 혼자서 엄청난 강도의 오프더볼 무브를 가져갔다.

효율은 매우 부족했지만 말이다.

터엉-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알론소가 왼쪽 측면으로 돌아나가는 호셀루에게 로빙 패스를 때려 넣었다.

오오, 이것이 알론소표 ‘대지를 가르는 패스’.

잘 찬 패스는 볼 줄기부터 다른 느낌을 주는데, 알론소의 킥이 바로 그랬다.

적당한 회전과 속도로 쭉 뻗는 공.

왜 사람들이 롱패스 하면 알론소를 첫손가락에 꼽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호셀루를 막아서는 건 다비드 마테오스.

역시 카스티야 소속인 마테오스의 원래 포지션은 센터백이지만, 오늘은 페페와 라울 알비올에 밀려 오른쪽 풀백을 소화하는 중이다.

그 누구보다도 간절한 두 선수의 공중볼 경합.

승자는 호셀루였다.

“나이스 헤더!”

어느새 상대 진영 깊숙이 올라온 마르셀루가 호셀루가 떨궈준 볼을 멋들어지게 발등으로 트래핑했다.

거짓말처럼 착 붙는 공.

고난도 동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모습이 경이롭다.

저게 무슨 수비수야.

뻐엉-

지체없이 올라오는 크로스.

완벽하다.

“막아야 돼!”

라울 알비올의 외침은 공허했다.

콰아앙-

골문 오른쪽 상단을 시원스럽게 꿰뚫는 헤더.

청백전의 첫 골은, ‘생태계 교란종’ 정백강의 머리에서 나왔다.

페페와 알비올이 어떻게든 막아보려 쌍으로 달려들었으나, 일단 공중에 뜬 이상 나를 저지할 방법은 없었다.

손도 못 뻗은 채 실점한 이케르 카시야스가 다소 일그러진 얼굴로 공을 내팽개쳤다.

비록 자체 청백전이지만 자존심이 걸린 대결 아니겠는가.

“이야! 이런 느낌이구나? 그냥 대충 올려주면 되네? 마이콘 형이 잘하는 게 아니었어.”

어시스트를 기록한 마르셀루가 나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면서 대표팀 선배를 해맑게 디스했다.

물론 말만 그렇게 한 거지, 마르셀루의 크로스는 굉장히 정교했다.

브라질산 ‘마씨 가문’ 풀백과 정백강의 조합은 역시 진리임을 증명한 장면.

선제골을 허용한 ‘팀 카시야스’ 선수들의 얼굴이 한층 진지해졌다.

특히 공격진에 해당하는 선수들은 나도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퍼엉-

빠아앙-

피슝-

슈팅을 남발하기 시작했다는 게 그 증거.

“아니! 거기서 때리면 어떡해? 나 완전 프리였다고!”

경기가 안 풀리면서 호날두의 짜증 수치도 덩달아 올라갔다.

조금은 철없지만 유쾌해 보이던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호날두 녀석, 축구화만 신으면 성격이 확 바뀌는 구나.

이런 투쟁심이 호날두를 최고로 이끌었겠지만, 같이 뛰기엔 좀 피곤한 스타일이긴 하다.

특히 카림 벤제마는 호날두의 호통에 기가 죽은 듯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결국 1-0으로 우리 팀이 앞선 상태에서 전반전 종료.

“어떻게, 멤버 바꿀까요? 상대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우리 팀 주장인 세르히오 라모스가 카시야스에게 엄청난 도발을 시전했다.

어지간하면 저런 말 하기 쉽지 않은데, 둘이 정말 친하긴 한가보다.

“천만에, 아직 30분이 통째로 남았다고.”

입술을 살짝 깨물며 응대하는 카시야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라모스에게 자극을 받았는지, ‘팀 카시야스’의 기세가 바싹 올랐다.

강력한 태클로 라파엘 반 더 바르트의 공을 뺏어낸 마하마두 디아라가 카카에게 땅볼 패스 연결.

“헤이!”

“이쪽!”

좌우 측면에서 동시에 쇄도하는 호날두와 곤살로 이과인.

카카의 선택은?

투웅-

역시나 호날두였다.

알바로 아르벨로아를 상대하는 호날두.

끈질기면서도 안정적인 수비력으로 이름난 아르벨로아였지만, 분노 상태의 호날두를 제어하는 데는 실패했다.

폭발적인 순간 스피드를 과시하며 아르벨로아를 휑 지나쳐 간 호날두가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막을게!”

크.

‘호날두 VS 라모스’라는 세기의 대결.

전반전에는 라모스가 잘 막아냈었는데 이번만큼은 여의치 않았다.

현란한 스텝오버로 타이밍을 뺏은 뒤 그대로 오른발 강슛 시도.

야신 사각지대를 제대로 겨냥한 무회전성 슈팅이 날아가다가 뚝 떨어졌다.

까앙-

“젠장!”

호날두가 또 한 번 성질을 내며 거칠게 내뱉었다.

들어갔으면 작품 하나 나올 뻔했는데, 야속한 골대가 호날두의 꿈을 짓밟았다.

골킥을 준비하는 예지 두덱 형님.

‘이스탄불의 기적’ 당시 리버풀 골키퍼로서 역대급 드라마를 썼던 장본인이다.

이제는 레알에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내며 조용히 은퇴를 기다리는 중.

길게 내지른 골킥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어디, 유망주 실력 한 번 볼까?

내 눈길이 향한 곳은 에스테반 그라네로 쪽.

1987년생으로 나보다 한 살 어린 그라네로는, 내게 꽤 낯익은 얼굴이다.

회귀 전에 박지승 선배와 같이 퀸스 파크 레인저스에서 뛴 적이 있기 때문.

공을 받은 그라네로는 호셀루와의 2대 1 패스를 선택했다.

툭- 탁-

엉성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나초 페르난데스가 침투해 들어가는 그라네로를 허무하게 놓쳤다.

퍼억-

“야! 나초!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뭘 멀뚱 보고만 있어?”

슈퍼히어로처럼 ‘짠’ 하고 등장해서 공을 걷어낸 페페가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죄... 죄송해요.”

불쌍한 나초...

다른 사람도 아닌 페페한테 혼났으니 얼마나 무서울까.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깡페페’라고 불릴 정도로 성깔 더러운 녀석이 바로 페페다.

“어이, 페페. 너무 열 올리지 말라구. 연습게임이잖아, 연습게임.”

스로인을 하러 올라온 아르벨로아가 나초를 구원해 주었다.

“흐얏차!”

아르벨로아의 롱 스로인.

“백강!”

나의 점프 타이밍에 맞춰 반 더 바르트가 마하마두를 따돌리며 슈팅 가능 지역으로 진입했다.

뭐지?

이 내 집 같은 편안함은.

아까 마르셀루의 플레이가 마이콘을 연상시켰다면, 반 더 바르트는 스네이더를 떠올리게 만든다.

뻐어어엉-

철썩-

가볍게 1골 1어시스트.

이거 참, 아무래도 적응엔 전혀 문제가 없겠어.

* * *

종료 직전에 호날두가 기어이 한 골을 넣으면서 청백전은 ‘팀 라모스’의 2-1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카카-호날두-이과인-벤제마가 겨우 한 골 넣는 동안, 혼자서 가볍게 공격포인트 2개를 기록한 나였다.

어딘가 분해 보이는 호날두의 표정이 킬링 포인트.

날두야.

이게 9400만 유로와 2억 유로의 격차란다.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지.”

“고생하셨습니다!”

새 유니폼을 입고 치른 첫 번째 팀 훈련이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뿔뿔이 흩어지는 동료들의 모습.

흠... 어째 좀 뻘쭘하다.

“백강! 우리 집에 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

포츠머스 시절 한 시즌을 함께 했던 라사나 디아라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래도 라스가 의리가 있네.

역시 친구는 많고 볼 일이야.

“혹시 오늘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니지?”

의외로(?) 깔끔하게 정리된 라스의 집에 들어서면서 노파심에 물었다.

인테르에 처음 갔을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영 싸했던 게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게 아니라...”

라스가 코끝을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이 팀 분위기가 좀 그래. 끈끈한 맛이 좀 없지. 끼리끼리 노는 문화고 말이야.”

“끼리끼리라니?”

“크게는 두 개 그룹이 있어. 카시야스-라모스를 주축으로 한 스페인 그룹, 호날두-카카-마르셀루가 중심이 된 모임. 원래는 ‘네덜란드 커넥션’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스네이더랑 훈텔라르가 이적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지.”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일종의 파벌 같은 건가?”

“아니 뭐, 파벌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 그냥 주로 그렇게 나눠서 어울린다 이거지. 두루두루 친한 건 알바로 정도?”

“라스 너는 어느 쪽인데?”

“나는 그런 거 관심 없어.”

“친구가 없구나?”

“너 그냥 집에 갈래?”

“미안, 밥 줘. 배고파.”

라스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은근한 역학 관계가 있는 건 사실일 것이다.

물론 축구선수도 사람이고, 친밀도의 차이는 당연히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첫 훈련을 나갔던 내가 뭔가를 느낄 정도라면...

“맞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문제이긴 하지.”

아이, 깜짝이야.

독심술 쓰는 인간이 하나 더 있었네.

“나 못지않게 독고다이로 사는 친구가 사비인데, 종종 그런 얘길 하거든. ‘재능으로만 보면 지금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팀이다. 그런데 단합이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말이야.”

최근 3년 동안 레알이 들어 올린 트로피는 라리가 1회가 전부였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6강, 16강, 16강으로 처참한 성적을 거뒀고.

리그야 바르셀로나라는 초강팀이 존재했으니 넘어간다고 쳐도, 챔스에서의 부진은 핑곗거리도 없었다.

로마, 리버풀, 그리고 올림피크 리옹.

16강에서 상대한 팀들의 국적도 참 다채로웠다.

물론 세 팀 모두 강호임에는 분명하지만, 스쿼드로만 따지면 레알이 못 이길 팀도 아니었다.

“그나마 라울 주장이 있을 때는 지금보단 나았지. 팀을 묶으려는 노력을 꽤 하던 사람이라서. 근데 이케르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잘 모르겠어. 그런 의지가 있을지 없을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듣고만 있고 라스 혼자 계속 떠들었다.

굉장히 쿨한 척했지만, 사실은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라스의 하소연을 듣고 있자니, 새삼 사네티 주장의 리더십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끼게 된다.

리더, 리더라...

“아까 보니 아르벨로아가 역할을 좀 해줄 수 있을 것 같던데.”

“성격으로만 보면 알바로가 정말 최고긴 하지. 근데 좀 미안한 얘기지만 실력이 아쉬워. 솔직히 알바로가 엄청난 선수는 아니잖아? 바르셀로나의 푸욜 정도 위상이었으면 아마 알바로가 팀을 많이 바꿔놨을 거야.”

냉정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우리 대표팀만 보더라도, 지승 선배가 더 나이 많은 선배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압도적인 경력과 실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반면 아르벨로아는 레알 선수단 중에서는 B급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으니.

“그러니까 빨리 적응하라고. 지내다 보면 그러려니 하게 돼.”

글쎄.

과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내가 레알로 이적한 이유는 더욱 빛나는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다.

혹시라도 장애물이 될 수 있는 요소는 제거하는 게 맞다.

아, 나도 귀찮은 일에 엮이긴 싫지만 어쩔 수 없지.

“라스.”

“응?”

“바꿔보자.”

“뭘?”

“팀 분위기 말이야. 우리가 바꿔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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